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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진 Jan 12. 2024

빈혈, 변비 그리고 너

19주 2일

빈혈수치 8.6g/dl


빈혈이 심했다. 임산부에게 빈혈은 흔한 증상이다. 거기다 나는 원래부터 빈혈이 있던 사람이다. 그러니 임신하고 더 심한 빈혈이 찾아온 것이다. 이대로 두면 아이들에게 피와 산소, 철분 등이 제대로 공급되지 못해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거기다 나는 아이가 셋이다. 세 명 모두에게 부족함 없이 모든 것이 다 가야 한다.


시중에 파는 철분제에는 보통 한 알에 10~24mg의 철분이 들어 있다. 임산부는 20~24mg 정도를 먹는다. 보통은 그 정도만 먹어도 충분하다. 하지만 이전부터 빈혈이 약간 있는 데다 세쌍둥이를 임신한 나는 90mg을 먹고 있던 상태였다. 이미 엄청나게 먹고 있었지만 그걸로는 턱없이 부족했나 보다. 개인적으로 사서 먹는 철분제에 병원에서 처방 나온 마시는 철분제까지 총 140mg의 철분 먹기 시작했다. 입에서 쇠맛이 나기 시작했다.


25주 2일

빈혈수치 9g/dl

매일 140mg의 철분을 하루도 안 빠지고 열심히 먹었건만, 빈혈 수치는 눈에 띄게 오르지 않았다. 세상에나! 철분제를 220mg으로 늘렸다.


임산부는 변비가 잘 생긴다. 호르몬의 영향으로 장 운동이 감소하고, 자궁이 커지면서 주변 장기가 압박받아 움직임이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거기다 철분제의 부작용에도 변비가 있다.

매일 아침 1분 쾌속 모닝똥으로 상쾌한 아침을 맞이하던 나게 시련이 찾아왔다. 더 이상의 미라클 모닝은 없었다. 살면서 변비를 겪어본 적이 없던 나는 그제야 비우는 것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원래도 야채를 많이 먹는 편이긴 했지만 더욱 많이 먹었고, 유산균도 원래보다 더 챙겨 먹었다. 하지만 큰 도움이 되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물론, 안 먹었다면 더 심해졌을 수도 있는 일이긴 하다)


30주 2일

빈혈수치 11g/dl

드디어 정상수치에 어왔다. 감격스러웠다. 그렇다고 철분을 줄일 수는 없는 법. 220mg 정도는 먹어줘야 정상 수치가 유지된다는 말이기에 복용량은 계속 지킬 수밖에 없었다.

30주 2일의 배


정상수치는 겨우 만들었지만,  덕분에 나는 심각한 변비를 얻었다. 변비만 얻었다면 다행이었다.

어느 날, 큰일을 보던 중 극강의 찢어지는 고통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악 소리를 내었다. 겨우 일을 보고 일어났더니 변기 그야말로 피바다가 되어 있었다. 순간 자궁에서 피가 쏟아졌나 싶어 깜짝 놀랐지만,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그 후로도 나는 큰일을 볼 때마다 살이 찢어지는 고통과 함께 엄청난 출혈을 해야 했다.(내 소중한 피)

그렇다. 치질에 걸린 것이었다. 변비와 함께 치질도 임산부에게 흔한 증상이긴 하다. 그래도 내가 치질에 걸리게 될 줄은 몰랐다. 임신과 출산은 경이롭고 아름다운 과정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치질에 걸리다니.

내가 치질이라니!!!!!

그렇게 치질란 녀석은 허락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내 삶에 불쑥 들어와 버렸다.


다음 외래에 가서 나는 교수님에게 심각하게 나의 치질을 고백했다.(나는 실제로 심각했다) 일을 볼 때마다 피를 너무 많이 쏟아 서 걱정된다는 말도 했다. 내 걱정과는 다르게 교수님은 너무도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힘들면 약 처방해 줘? 정도가 그녀가 내게 보인 최대한의 반응이었다. 당황스러웠지만 오히려 쏘쿨한 교수님에 반응에 별 일 아닌 거구나 싶어 안심이 되었다.

안 그래도 피가 부족한데 걱정이라니, 엄마 피를 쏟아내는 거라 아기들과는 전혀 상관없으니 괜찮다고 했다. 바르는 연고를 처방받아 바른 후, 찢어지는 고통은 그대로였지만 피를 흘리는 일은 많이 줄어들었다.

철이 부족해서인지 평소 좋아하지 않던 소고기가 그렇게 당겼다


치질아이들이 세상밖으로 나올 때까지 요란하게, 신의 재감을 뽐내며 내 곁에 머물렀다. 아이들이 태어난 후, 아픈 데가 너무 많아 치질 따윈 신경도 쓰지 못하던 나날 속 어디쯤, 그 녀석은 그렇게 조용히 내 곁을 떠나갔다. 


잘 가, 치질. 우리 다시는 보지 말자.(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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