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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옷 Feb 27. 2024

출전, 배번은 7860입니다.

입문합니다, 러닝의 세계에


드디어 오늘이다. 가지 말까, 하지 말까를 직전까지 생각하며 '아, 그래. 실려오더라도 한 번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여의나루역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있었다. 많은 인파를 보니 설레는 마음뿐이었다. 배번을 붙이고 가뿐하게 점프하며 스트레칭 비슷하게 몸을 이리저리 휘둘러본다. 날이 흐리고 비도 아직 덜 그쳤고 온도는 생각보다 쌀쌀했지만 입김이 얼어버리는 추위에서 걸었던 날, 눈 맞으면서 뛰었던 날, 안개 가득한 날에 운동화를 고쳐맨 날을 떠올리니 별 것도 아니었다. 풀 코스 출발, 32km 출발, 하프 코스 출발, 그리고 10km.


"그래도, 한 번 해봐. 헥헥하는 것도 경험이지. 한 번 해 봐."

남편과 아들의 격려와 함께.

출발!

사람들과 함께 우르르 출발한다. 중랑천에서 걷던 음악을 틀어 귀에 꽂는다. 나와 함께 해주던 오리들을 떠올리며 가볍게 뛰어본다. 목표는 뒤돌아 보지 않는 것이다. 이 레이스는 나만을 위한 레이스고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다. 바닥의 웅덩이를 피해 요리조리 가볍게 뛰며 앞서 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도대체 뒤에 얼마나 많이 있길래 뒤에서 한도 끝도 없이 밀려 나오는 건지 궁금했지만.

네 트럭 반 정도의 사람들이 나를 앞서 나가고 한적한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는 쾌적한 너비의 공간을 가져본다. 혼자 러닝 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함께 뛰는 느낌이 들었다. 중랑천에서는 새들과 함께 걸으며 자연을 누볐다면 사람들과 함께 있으니 뛰는 것도 힘들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뛰는 내 다리에 관성의 법칙이 작용한 것처럼 걷는 것이 오히려 부담스러운 상황이 되어버려 계속 뛰었다.

문득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가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건 나만을 위한 레이스니까 다른 사람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경쟁이 아니야라고 생각하면서도 끝에서라도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자꾸 들었다. 마음의 갈등 속에서 계속 뛰다 보니 그건 또 어때, 그런 마음이 들 수 있지 하고 마음을 가라앉힌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당연하고, 끝에서라도 잘 해내고 싶은 마음도 당연하고, 경쟁이 중요한 것은 아니더라도 그렇게 일렁이는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또한 중요하다. 내 마음을 부정하지 말자. 어떤 마음이 들든 내 마음에 귀 기울이고 다정히 들어주자.

9km, 8km 그리고 5km! 와 반이나 왔어! 진짜 딱 절반 왔다! 온대로 가면 된다! 반환점이 보인다. 입가에 미소가 가시질 않는다. 1시간 30분이 넘어 실려가도 좋다. 정말 반환점까지 오게 될 줄 몰랐어!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폭포처럼 한강변을 장식하는 개나리 덩굴에 노오란 꽃망울과 사이 꽃잎이 보인다. 유튜브 선생님께서 10km는 물 안 마셔도 된다고, 시간 아끼라고 하셔서 물도 마시지 않았지만 개나리는 못 참지. 잠시 멈추어 사진을 찍고 다시 출발한다. 오는 길에는 차마 보지 못했던 풍경들을 마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열심히 걷거나 달려오고 있는 사람들, 자전거 안전속도 전광판에 잡히는 저마다의 속도들, 나와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뛰던 나비 같은 분.

지쳐가는 나에게 작은 것들이 힘을 불어넣어 준다. 뒤돌아 떨어뜨린 이어폰을 줍던 분에게, 달리며 웅덩이에 남은 한 짝이 있다며 알려주던 분. 함께 웃는다. 자신의 아이를 기다리는 것처럼 큰 게토레이 한 병을 안은 채로 여러 사람에게 파이팅 손바닥을 내미시는 아버님. 사람의 미소라는 것이, 다정함이라는 것이, 기운이라는 것이 실로 별 거 없구나, 작은 손길 하나 작은 말 하나에도 몸을 일으키는구나.

조금씩 지쳐 걷기도 해 보고, 그래도 마저 달려보자 하고 달리기도 해 본다. 땀이 흥건한 것이 느껴진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반팔도 입고 민소매도 입는 거구나. 할 수 있다. 해낼 수 있다. 입 밖으로 뱉어본다. 남편의 '한 번 해봐 그래도'가 얼마나 큰 힘이었는지 그는 몰랐겠지만.

그래 한 번 해보는 거야, 안 되면 그만이지만 해낼 수 있어, 안 되면 그때 그만 두면 되는 거지, 두려워하지 않고 그때 가서 그만두면 된다. 상담 선생님이 늘 말씀하시던 것들인데도 책을 읽고 달리기를 하고 나서야 그 목소리가 내 마음에 들려온다. 안 되면 그만이고, 그때 가서 그만 두면 된다. 달리기를 하며 내 삶의 방향을 잡는 진귀한 경험을 한다.



1km 남았다! 와, 저기 높은 건물이 가까워져 간다. 행복해서 자꾸 미소가 나온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얼굴에 웃음을 한가득 가지고 달린다.
어, 남편과 아들! 중간에 앉아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해서 음악을 들으며 지나갈 뻔했다.

악, 저기다! 유튜브 선생님 마지막에 사진 찍어주시는 분들이 있으니 미모를 관리하고 멋진 포즈를 해내는 것도 좋은 추억이라고 하셨는데. 사진기를 향해 한껏 웃어 보인다. 아니, 그냥 웃음이 계속 나고 있었다. 저기에 결승점이 있었다. 나는 실려오지 않았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사진기를 지나 전력질주 3미터!

해냈다!

해냈어!

왈칵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내가 해냈다. 진짜 해냈다. 10km를 달려냈다. 포기하지 않았다. 끝까지 완주했다. 걸어도 달려도 정말 '끝까지'였는데 내가 해냈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쾌감이 나를 감싸고 눈물이 왈칵 날 것만 같았다. 애를 낳은 기분이랑 정말 비슷하다고 생각했다(참고로 나는 병원 도착 30분 만에 순산한 케이스이다.). 끝이 보이지 않지만 희미하게 보이는 결말을 향해 힘주어 노력하고, 그리고 쑤욱! 아, 후련해!

메달을 수령하고 간식을 받아 챙기니 남편과 아들이 도착했다. 메달을 목에 걸어보기도 전에 뺏겼네. 그래도 좋아. 기록 문자가 왔다.
<챌린지 레이스 완주를 축하드립니다. 시옷님 기록은 01:07:44.43입니다.>
와, 1시간 20분쯤일까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좋은 결과에 또 기분이 날아가는 것 같다. 또 하고 싶다. 진짜 재밌다. 다음 목표는 1시간 00분에 들어와 보기로 할까? 아무렴 어때, 다음 목표도 완주다.

잊지 못할 이 기분, 나의 첫 레이스.
응원해 주신 많은 분들과 함께 달려주신 분들, 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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