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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다움 Mar 19. 2024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항상 그렇듯, 좋은 마음으로 다정한 말로 시작은 했었다.  

일정을 마치고 밤 9시쯤 집에 돌아오니, 첫째 행복이가 복도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행복이> "엄마, 윤이와 찍은 인생 네 컷이 없어."

<나> "복도에 흘린 것 같아? 어느 쪽으로 왔는데?"

<행복이> "엘리베이터까지는 있었어. 이 근처에서 흘린 것 같아."

<나> "찾아보자."

<행복이> "자전거랑 가방 안까지 다 봤는데 없어."

<나> "늦었으니 조금만 더 찾아보고 내일 엄마랑 찾자." 

<행복이> "안 돼."

살짝 짜증이 올라왔지만 누르며, 좋게 말해본다.


<나> (제대로 된 훈육은 과거의 잘못을 들추지 않고, 현재의 상황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아이의 문제에 대한 확대 해석 하는 대신 가능성을 보는 긍정의 말을 건네야 한다고 배웠다. 지금이 긍정적인 말이 필요한 시점이지만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행복아, 오늘도 저녁까지 친구와 먹고 8시까지 놀다 왔지, 지금 9시 넘었고, 할 일도 남았지? 지금은 일단 들어가자."

<행복이> "안 돼. 찾아야 해."


사춘기의 초입에 들어선 첫째는, 원래도 친구를 참 좋아하는 아이인데 베프와 찍은 스티커 사진을 몽땅 잃어버렸으니 얼마나 속상할까 싶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인생에서 특히, 학창 시절에 친구가, 그리고 친구와 함께하는 시간이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지, 인생 굽이굽이 경험해 왔기에. 위로를 건넸다. 달래 주었다. 힘들고 괴롭고 외롭고 불안하고 좌절하고 죄책감과 후회로 범벅이 된 밤을 마주하며 내일은 절대 이러지 말자 수없이 다짐하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마음 곳곳을 짓눌러도, 되돌아갈 수도 무를 수도 없는 엄마의 자리지만 그래도 12년 육아 인생 되돌아보면 수월한 생활이었다. 나에게 과분한 아이였다. 순하고 어질고 따뜻하고 배려심이 깊은 아이, 잘 알고 있기에 '나만 잘하면 돼.'를 되뇌었던 요즘이다. 그래서 책도 읽고 강연도 듣고 운동도 하고 글도 쓰고 명상도 하며, 열심히 공부하고 배우고 익히고 연습하며 살아가는 거다. 내가 나를 알아야 아이에게도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으니. 간절하게 더 좋은 엄마가 되고 싶어서.


그런데 참 간사하게도 아이와 함께 정한 공부가 밤 10시가 다 되어가는 이 시간에도 한참 남아있다는 사실과 지난주에도 친구네서 파자마파티를 했고, 그 전주에도 친구들과 놀았으며 평일에도 친구들과 노는 시간은 최대한 확보해 주려고 했고, 오늘도 그랬다. 고학년 엄마로서 정말 많이 허용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며 화가 나기 시작했다. 환기시킬 무언가를 찾아야 했다. 심호흡을 했다. 화를 낸다고 스티커 사진이 찾아지고 아이나 내 마음이 좋아지지 않는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지만 심호흡도 나를 멈추진 못했다. 딸의 흐느낌은 계속되었고 그 소리는 신경을 건드리며 결국 폭주하기 시작했다.



<나> "너 지난주 토요일에도 윤이네서 파자마하고 놀다 와서 일요일도 또 놀러 나갔지? 그러고 월요일에 엄청 피곤해했지? 엄마가 어떻게 할지 알아서 그래. 그러니깐 일단 들어가자고."

<행복이> "(울면서) 쫌만 더 찾아볼게. 복도에 없으면 한 번만 갔다 올게."

<나> (화가 올라오는 걸 꾹꾹 눌러본다.) "어딜 갔다 와? 지금 9시 넘.었.잖.아."

아이에게 말을 하면서도 '증폭시키지 말자, 정도만 하고 넘어가자.' 다짐하고 기도했다.


아이의 울음이 커진다.

못 참겠다.

"네가 그 수업 다니고 싶대서 동생도 스케줄 다 너한테 맞추면서까지 다니고 있지? 지금 5년째야! 잔소리 안 하게 미리미리 한다고 몇 천 번을 약속해 놓고 또 시작이네? 지금 10시 다 됐는데 언제 하고 잘 건데? 이딴 식으로 하는데 네가 원하는 거 왜 다 들어줘야 해? 엄마는 다른 건 몰라도 네가 하고 싶다는 거, 친구들이랑 노는 거 되도록이면 다 해주려는 거 알아, 몰라? 알아 몰라? 왜 대답을 안 해???????"

"5학년 다른 애들 봐, 너처럼 이렇게 찔끔찔끔 공부하는 줄 알아? 3시간씩 자리에 앉아서 문제 풀어. 다른 집 가 볼래?"


앞뒤가 맞지도 않는, 말도 안 되는 이상한 단어와 문장들을 날카롭게 쏘아 올린다. 가시 돋친 말들은 딸아이에 가슴에 가 박힌다.


"... 엄마는 이제 나 안 사랑하나 봐. 내가 이렇게 우는데 위로는 안 해주고 무서운 말만 하고."

"........ 뭐라고?"


이후에는 차마 복기하고 싶지도 않다.

기분 좋게 마무리하려던 토요일 밤은 서운함, 야속함, 분노와 미움이 뒤섞여 눈물과 고성으로 얼룩진 채 지나가고 있었다.



난 또 반칙을 했다. 아이의 과거를 일일이 들추며 잘못을 나열하고 증폭시키는 일을 했다. 것도 괴물같이 무서운 눈과 말로



끊임없이 아이의 흠집을 들추거나 매사에 흠을 잡는 것으로는
그 시간이 앞당겨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이의 정서에 부정적인 영향만 끼칠 뿐이에요.
지난 일은 마음속에서 얼른 지우고 보내주는 것이 최선입니다.
<엄마의 말 연습>





보통의 나였으면, 고민이나 걱정이 있어도 푹 자고 나면 대부분 털어버려졌다. 자고 일어난 다음 날에도 기분이 썩 나아지지 않았다. 이런 감정이 들지는 몰랐는데 내 노력을 전혀 알아주지 않는 것 같은 아이가 야속했고 그래서 속상했다. 그리고 그 모진 말들을 퍼부었던 어제의 내가 너무 싫고 미웠다. 실수를 또 반복했던 모습이 지겨웠다.  



마흔 두 해를 살고 있지만 여전히 흔들리는 나와,

안아주고 기다려주기만 했어도 스스로 잘 해결했을 아이에게

꼭 필요했던 말, 해주고 싶은 말,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정말 괜찮아.


그럴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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