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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다움 Apr 02. 2024

'요즘 것들'의 언어생활

개**, 개**, 아 이 미친**야, ****!!


부쩍 따뜻해진 주말 오후, 놀아도 놀아도 또 놀아야 하는 놀이터 특공대 둘째와 친구들을 보다 '개'와 육두문자가 난무하는 대화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의 남학생이 벤치에 앉아 있다. 핸드폰 게임을 하며 친구와 통화 중인 듯했다. 뽀얗고 고운 아이의 입에서 매초 비속어와 외계어가 쏟아져 나온다. 때라고, 주위 친구들도 많이 쓰니 자연스럽게 같이 욕을 하며 대화를 하겠지, 또래 관계에서 소속감이 점점 중요해지는 나이고, 유대감을 형성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욕을 쓰기도 한다니까. 쓰다 보니 너무나 당연해서 욕을 욕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고. 또 우리 때보다 욕이 주는 타격감이나 임팩트도 크지 않고, 심지어는 방송에서조차 이런 언어 스타일이 인기를 끄니, 일종의 10대 문화 혹은 언어생활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모든 문장이 '개'로 시작해 욕설로 끝나는 대화는 너무 크게 들렸다.

 

물론, 나는 고작 몇 분의 대화를 들었을 뿐이다. 아이에 대한 배경지식도 없고 전후 사정도 모른다. 주말 오전 내내 열심히 공부하고 밖으로 나와 친구와 게임으로 소통하며 스트레스를 푸는 찰나일 수 있다. 욕은 찰지게 하지만 지나가는 할머니의 짐을 들어주는 배려심이 많은 친구일 수도 있고, 소외된 친구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 따스한 아이일 수도 있다. 그렇다, 몇 마디 말로 누군가를 알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동시에 그 말 '몇 마디'는 그 사람의 지나온 시간을 반영하기도 한다. <단어의 품격>을 연재하고 있는 중이라 그런 걸까, 생각은 확장되어 우리 첫째 또래인 그 남학생의 엄마가 떠오른다. 너무 멀리 간 걸까? 동시에 사회생활을 할 때의 우리 아이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진다. 엄마인 나는 까마득히 모르는 모습이 점점 많아지겠지... 철봉에 올려달라고 엄마를 부르는 둘째의 목소리에 저 멀리 갔던 시선이 놀이터로 돌아온다.







몸은 비록 40대지만 마음만은 10대라고 자부해 왔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대화하고 소통하는 게 좋았다. 개방적이고 열린 마음으로 세상과 사람을 대하려고 해 왔고 그러고 싶다. 특히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누군가나 무언가를 예단하거나 속단하는 태도는 갖고 싶지 않다. 우리에게는 다양한 얼굴이 있다. 내 안에도 모순과 양면성이 존재하는 것처럼, 하나의 사건에도 상반된 인식과 각각의 입장, 천차만별의 대응방식이 있다. 


이렇게 장황하게 나의 느낌과 감정을 설명하는 건, 내가 정말 '요즘'의 세태를 파악하지 못하는 젊은 꼰대가 되어가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라테'를 시전 하는 그런 어르신 말이다. 일단, 말이 길어지면 꼰대라고 하던데 10대, 특히 초등학생들의 욕에 대해서, 언어생활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아진다. 나도 사춘기를 겪었고 부모님께 반항도 했었고, 곱고 바르고 예쁜 말만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아이의 사춘기를 맞이하는 엄마로서, 감정적이고 충동적이며 반항적으로 변하는 건 사춘기의 뇌 발달상 지극히 정상적인 단계라는 것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말과 단어가 우리의 정신세계와 사고방식, 가치관, 나아가 인생 전반에 걸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는지는 알고 있기에 신조어와 외계어, 욕이 난무하는 현실이, 거기에 남의 아이 일에는 개입하면 큰일 나는 풍조가 안타깝다.





기원전 그 옛날에도 '요즘 것들'은 버릇이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나도 불과 20여 년 전에는 한창 '요즘 것들'이었고 그때는 이런 생각을 할 거라고는 짐작조차 못했을 거다. 이런 생각을 하기에는 놀 것도 갈 곳도 즐길 것도 너무 많았다.  


1311년, 중세시대 대학교수 알바루스 펠라기우(오른쪽), 기원전 196년 고대 이집트의 로제타 석(왼쪽)



"요즘 젊은것들은 버릇이 없다."
<기원전 196년 고대 이집트의 로제타 석>





언어 생활자로서의 어른의 역할은 무엇일까?

아이들은 정말 몰라서 그럴 수 있다. 가르치고 교육하고 훈육하는 길은 지난하고 어렵고 재미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부모가, 선생님이, 옆집 이모가, 친구 아빠가 가르쳐줘야 한다. 

꽃다비(꽃처럼 아름답다) 같은 우리 아이들을 위해.






어른들은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다.
<어린 왕자>









출처: Un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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