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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Apr 19. 2024

아이 문제집을 사다가 뭉클해졌습니다

이현정,『부모의 말 공부』

  동네 책방에 초등학교 2학년 수학 문제집을 보러 갔다. 울이의 문제집이 필요해서다. 9살 아이가 벌써 수학을 제일 싫어하기 시작했다. 수학을 더 싫어하기 전에 심화 문제집을 그만 풀기로 했다. 대신 난이도와 문제수가 적당하고 편집이 잘 되어 있는 한 권을 골랐다. 울이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 민하며 문제집을 계산했다. 직원 분이 적립을 해주려고 전화번호를 물었다.

  번호 불러보세요. 어? 고객님 번호가 있는데.

  네? 여기 온 적이 없는데.

  2017년에 왔었네요. 위치가 저기일 때.

  아,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 갔었나 봐요.

  어머나, 그 아기가 벌써 수학 문제집을 풀 나이가 됐어요?

  카드를 건네받아 결제하면서 직원 분이 놀라워했다. 나도 신기했다. 2017년이면 울이가 돌을 갓 지났을 무렵이다. 기억을 더듬었다. 울이가 아기였을 때 색칠북이나 장난감을 사러 집 근처 서점에 갔던 것 같다. 보통 인터넷으로 주문을 하지만 빨리 사고 싶거나 직접 눈으로 보면서 고르고 싶을 때는 가게에 들르기도 했다. 그때 책방에서 무엇을 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이에게 무엇을 사 줬을지 궁금하면서 한편으로는 뭉클해졌다. 엄마 손을 잡고 겨우 한 걸음씩 떼며 걸음마를 하던 아기가 지금은 친구와 등교를 하고, 휴대폰으로 나에게 전화를 하고, 어려운 문제를 풀기도 하고, 예쁜 그림을 그려 주는 9살이 되었다.

울이가 그려준 그림




  둘째 꿍이가 하원할 때마다  아이와 엄마를 만난다. 아이의 오빠가 꿍이와 같은 유치원에 다녀서다. 볼이 통통하고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여자아이는 매번 유아차를 타고 있었다. 내 손바닥보다도 훨씬 작은 손이 유아차 밖에 빼꼼히 나와 있다. 낯선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는 편이지만 나도 모르게 아이 엄마에게 다가가 물었다.

  몇 개월이에요?

  19개월이에요. 이제 어린이집에 가기 시작했어요.


  울이가 처음 어린이집에 가던 때도 19개월이 되던 무렵이었다. 어린이집에 가고 며칠은 아침마다 세상이 떠나가라 엉엉 울어서 마음이 아팠다. 아이는 일주일이 되기 전에 언제 울었냐는 듯 원에 적응해서 씩씩하게 다녔다. 놀이 시간에 노래가 나오면 온몸을 흔들면서 신나게 춤췄고, 영어 시간에는 무슨 뜻인지도 모를 동요를 목소리를 높여 따라 불렀다. 원에서 생활하는 영상을 선생님께 전해받고 마음을 놓았었다. 걷는 것보다 안겨 있는 걸 좋아했던 자그마했던 아이가 벌써 9살이 되어서 초등학교에 다닌다. 엄마가 속상할 때는 등을 토닥여주고, 용돈을 모아 아메리카노를 사줄 때도 있다. 남의 아이도 잘 자라지만 내 아이도 쑥쑥 자라고 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가면 육아가 쉬워질 줄 알았는데 크는 시기마다 나의 고민은 종류와 깊이가 달라졌다.




  아이가 3, 4살이던 때는 육아가 너무 힘들어 집을 뛰쳐나가고 싶었다. 무작정 떼를 쓰고 울고 불고 드러눕는 것. 감기에 너무 자주 걸려서 병원에 출근하다시피 다녔던 것. 육아도 어설프고 살림도 힘들고 감정은 수시로 널뛰기를 했다. 그때보다는 나아졌지만 요즘에도 속이 상할 때가 많다. 잘못을 지적하거나 동생을 칭찬하면 울이는 하루에도 몇 번씩 엄마를 노려보면서 대들기도 하고 속상함에 북받쳐 방문을 쾅 닫아버릴 때도 있다. 9살에도 사춘기가 오는 겁니까. 선배 엄마들에게 묻고 싶다. 아이가 수시로 짜증을 내고 나에게 쏘아붙이면서 말을 할 때는 어떻게 평정심을 유지해야 할까요. 답답하고 화가 났다. 감정에 휩싸이면 폭발했고 곧 후회했다. 지금도 이런데 사춘기가 오면 너와 나 사이에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두려워졌다.


  도서관에 들렀다가 제목에 반해 이현정 작가의 "부모의 말 공부"를 읽게 되었다. 사춘기 아이와의 대화법이라니. 혹시 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감이 생겼다. 책을 읽고 깨달은 것은 아이가 크면 그만큼 멀리서 바라봐줘야 한다는 사실이다. 사춘기를 잘 보내는 방법은 아이를 타인으로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거라고 했다. 아직 내 품에서 보호하고 챙겨주고 싶은데, 아이는 놀랄 만큼 성큼성큼 자라고 있다. 아이가 자란 만큼 '타인'으로 인정해 주고 거리 두기를 시작해야 하는 거다. 타인이라는 말이 당연한 건데도, 마치 내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아쉽고 허전하다.


  사춘기가 되면 아이는 자기 스스로도 혼란스럽고 힘들어서 주변을 살필 여유가 없다고 한다. 엄마의 역할이 달라져야 할 시기다. 아이를 존중하고 믿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한 걸음 뒤에서 지켜봐 주고 힘들 때는 언제든지 기댈 수 있는 가장 편안한 곳이 되어 주는 것이다. 이런 엄마가 된다면 아이가 얼마나 행복할까. 엄마의 내공이 단단해야 가능할 것 같다.


  걱정이 된다. 엄마가 자꾸 간섭하고 잔소리한다고 느낄까 봐. 말이 통하지 않는 답답한 엄마라고 생각할까 봐. 아이에게 안 된다고 수시로 말하는 것, 아이가 화내면 지지 않으려고 더 불같이 화를 내는 것, 쉽게 말을 듣게 하려고 가벼운 협박을 일삼는 것들이 아이와 나를 더 멀어지게 하는 것 같다. 지금부터 노력해보려고 한다. 아이의 의견을 듣고 존중하는 것부터. 된다는 말이 자꾸 튀어나오려고 하면 일단 멈춰야지. 잘 될까, 잘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그래도 원하는 모습이 있으니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두 걸음 나갔다가 잠시 쉬기도 하고 한 걸음 물러서기도 하면서 조금씩 나가는 거다. 편안한 너의 사춘기를 위해, 따스한 우리 가족을 위해 일단 나부터 변하려고 다짐해 본다. 우리의 뾰족함이 둥그스름해지도록 다시 결심해 보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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