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 Mar 14. 2024

베개를 10년 쓰다 보면

『또ㅡ 못 버린 물건들(은희경)』

  남편과 나는 물건을 오래 쓰는 편이다. 자주 쇼핑하지 않는다. 명품에 대해 잘 모른다. 씀씀이면에서 우리는 잘 맞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사람, 생각보다 심하다.


  이건 대학생 때부터 입었으니까 20년 된 거야. 이건 더 오래됐네.

  목이 축 늘어지고 여기저기 해진 옷을 들고 남편이 말했다. 옷이 닳아서 겨드랑이 쪽에는 구멍이 났다. 자랑스럽게 오래 입었다고 흡족해하는 그를 보니 한숨이 났다.

  이런 옷을 입고 있으니까 어머님이 싫어하시잖아. 남편 옷도 안 사 입힌다고 생각하실 거 아니야.


  옷장에는 남편과 처음 만났던 때부터 입고 있었던 옷. 그러니까 10년 정도 된 옷들이 여전히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심지어 남편의 전 여자친구가 사 준 남방도 걸려 있다. 아직 건재한 남방을 가리키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남편에게 말했다.

  저거 내가 싸그리 불태워버릴 거야.

  싫으면 버려도 돼.

  남편이 무심하게 말했다. 옷은 옷일 뿐이라며 개의치 않았다. 심지어 십 년도 더 된 옷이 아직 상태가 좋다. 어딘가 흠이 있으면 당장 가져다 버렸을 텐데. 멀쩡한 옷을 버리자니 뭔가 잘못을 하는 것 같다. 남편과 달리 나는 저 옷에 무심하지 못하니, 남방을 꺼내 입을 때 남편을 놀릴 구실로 삼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독립하면서 샀던 16년 차 베개

  하루는 베개를 보니 가운데가 일자로 툭 터져 입을 벌리고 있다. 안에 있는 솜이 금방이라도 '나 여깄소.' 하며 풀풀 날릴 것 같다. 이 베개는 내가 독립하면서 샀으니까 15년이 더 됐다. 터진 부분을 보니 바느질하는 걸로는 해결이 안 될 것 같다. 충분히 사용하고도 남았지만, 왠지 이십 대 초반의 내가 떠올라 베개와 헤어지기가 아쉽다. 처음 집을 떠나 자취를 시작했고, 낯선 곳에서 일하면서 적응하느라 힘들었던 그때. 지금 생각하니 아득한 꿈처럼 아련하고 애틋하게 느껴진다. 지금은 결혼하면서 산 더 크고 푹신한 베개를 쓰고 있다. 예전 베개를 쓰지는 않지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괜히 위로받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헤어지기가 더 아쉽게 느껴지는 것 같다. (지금은 새 베개 커버를 씌웠다.)




  은희경 작가의 책 "또ㅡ 못 버린 물건들"에서도 여러 물건들이 등장한다. 구두 주걱, 만화경, 펜, 감자 깎는 칼 등 종류가 다양하다. 꼭 필요하지는 않지만 버리기는 왠지 아까운 작가의 물건과 그것에 담긴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읽다 보면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서 '아' 소리를 내면서 글 읽기를 멈추게 됐다. 그러고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신발 신는 것을 우아하게 만들어주는, 상아로 만든 매끄러운 구두 주걱을 예찬하다가 문득 그 상아가 코끼리에게서 왔다는 것을 깨닫고 반성하는 모습, 펜을 수시로 잃어버려서 소중한 펜은 밖에 들고 가지 않지만 사인회가 있을 때만큼은 아끼는 펜을 들고나가 정성껏 사인해 주는 모습, 그러다 또 펜을 잃어버리고 겨우 찾고 다시 또 잃어버리는 모습. 공항에서 비행기 시간에 쫓겨 아주 값비싼 형관펜을 사던 모습. 물건들과 관련된 에피소드들 속에서 서툴지만 소신 있고, 당당해 보이지만 허당인 듯한 작가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미니멀이 중요해지고 있는 요즘, "나 이렇게 쓸모없는 물건들이 많아요."라고 대놓고 말하는 그의 모습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버리고 비우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안심이 되기도 한다. 작가의 물건들은 행복할 것 같다. 그의 물건들은 쓸모에만 맞춰진 것이 아니라 의미와 가치를 담고 있는 것들이니까.




  슬며시 고개를 들어 나를 둘러싼, 내 시간들이 담겨 있는 물건들을 살펴본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노트북은 큰맘 먹고 작년 가을에 새로 산 것이다. 예전 노트북은 버리지 못하고 책상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오래된 노트북으로 남편과 함께 영화를 보았고, 아이들 영상을 만들기도 했다. 10년이 훌쩍 넘다 보니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부팅 시간이 10분 넘게 걸리고 자주 버벅댔다. 창 하나를 열고 다른 것을 하면서 기다리고, 다시 또 창 하나를 열면 다른 것을 하면서 기다려야 했다. 남편이 버리자고 했지만, 아이들이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쓸 때 필요하다고 굳이 남겨두고 있다. 노트북 옆에는 커버가 다 벗겨져 나무가 훤히 드러나 있지만 촉감이 부드러워 쓰기 좋은 연필이 놓여 있다. 노트북을 받치고 있는 16년 차 탁자,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게 해 준 분홍색 수면바지, 빨래하기는 귀찮지만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1m가 넘는 노란색 솜인형. 내 옆에는 많은 물건들이 있다. 물건에 담긴 기억들을 떠올리다 보니 하나의 물건이 아니라 오래된 친구처럼 느껴진다. 


  문득 궁금해진다. 지금 당신 옆에는 어떤 물건이 곁을 지키고 있는지. 쓸모는 없어졌지만 선뜻 헤어지기 아쉬운, 친구처럼 편안한 물건은 무엇인지.


이전 07화 당신의 '기본'은 무엇인가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