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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가와 권장 소비자 가격

아파트는 정찰제가 아닙니다

by 송두칠

그간 너무 무거운 내용들을 다룬 것 같아서, 몇 편 정도는 가벼운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쉬어가는 느낌으로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권장 소비자 가격 제도'라는 거 아시나요? 공산품 판매자가 자신이 판매하는 제품에 '정가'를 표기하는 제도입니다. 예를 들면, 탄산수 라벨에 "1,600원"이라는 가격이 붙어있는 거에요. 편의점 매대에 적혀있는 게 아니라요.


10-01.jpg ▲ 라면에 부활한 권장소비자가격. 2011년이다. (출처: 경향신문)


이 제도는 혼란한 가격 문제를 해소하고 시장 질서를 확립한다는 이유로 도입되었다가, '고가표시 등으로 소비자의 합리적 선택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1999년에 폐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2010년에 다시 부활했고, 지금은 '희망 소비자 가격' 정도로 일부 남아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이 가격은 '정가'가 절대 아닙니다. 제일 비싸게 살 때의 가격이나 다름 없죠. 판매자가 '희망'하는 판매가격이니까요.


80년대 이전에 태어나신 분들은 다 기억하실 거에요. 동네 이름 없는 슈퍼에서는 과자곽에 적힌 가격대로 돈을 주고 사지만, 조금 큰 할인점에서는 '정가'에서 20%씩 할인 받아서 샀던 것을요.




사실 적절한 비유는 아니지만, 집값도 얼추 비슷합니다. 호가(呼價) 말입니다.


호가는 말그대로 '부르는 값'입니다. 무언가를 판매하는 사람 입장에서 '아, 이정도 받았으면 좋겠는데?'하는 '희망 가격'입니다. 마치 '희망 소비자 가격'과 마찬가지로요.


▲ 실거래가는 호가가 아니다. 45%가 넘는 괴리율을 보이기도 한다. 그나저나 17년 전 가격이라 그런지 참 저렴해 보인다. (출처: 매일경제)


'희망 가격'은 '최소 수용의사 가격(WTA; Willingness To Accept)'이 아닙니다. '희망 가격'은 행복회로를 돌린 가격인 반면, '최소 수용의사 가격'은 아무리 못 받아도 무조건 이 가격은 되어야 팔겠다 하는 가격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판매자는 그 가격보다 싼 값에도 팔 의사가 있다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부동산 시장에서는 가격 흥정을 쉽게 볼 수 있죠.


아파트는 정찰제가 아닙니다.


10-03.png ▲ 현대 경제학의 근간 그 자체. 수요-공급 곡선. 가격은 결코 공급자들의 뜻(호가)대로 정해지지 않는다. (출처: 위키백과)



그렇다면 정찰제가 아닌 부동산 시장에서 가격 흥정의 승자는 누구일까요? 흔히 부동산 시장에서는 집주인이 갑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결론만 말하면 안 급한 사람이 이깁니다. 현재 부동산 시장은 급하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거든요. 급한 매도인들은 호가에서 듬뿍 깎아서 '급매'라며 내놓지만, 급하지 않은 매도인들은 천천히 호흡을 길게 가져가면서 희망 가격인 호가만큼 다 받으려고 합니다.


▲ 여기에선 급매물이 난리라고 하고, 저기에선 콧대 높은 호가가 난리라고 한다. 둘 다 진짜다. 얼마나 급하냐의 차이다. (출처: 뉴스핌 / 서울경제)


이쯤에서 부동산 시장의 특성을 하나 생각해봐야 합니다. 바로 공급이 경직적이라는 특성입니다.


경제학 제1원칙인 수요-공급의 원리는 기본적으로 '가격'이 변함에 따라 '수량'이 변하는 이치를 담고 있습니다. 가령 시장에서 거래되는 가격이 비싸지면, 물건을 판매하는 사람들은 그만큼 신이 나서 시장에 물건을 많이 내놓는다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이 기본 원칙이 부동산 시장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일단 내놓고 싶어도 내놓을 물건이 없어요. 공산품이야 찍어내면 그만이고, 창고에서 꺼내오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집은 새로 지으려면 하세월이죠. 그래서 가격이 올라도 물량이 그만큼 시장에 풀리지를 않습니다.


10-07.png ▲ 단기 부동산 시장의 공급곡선은 S1과 같다. 공급을 더 할 수가 없다. 중기(S2), 장기(S3)로 갈수록 아파트를 지어서 공급할 수 있게 된다. (출처: 오렌지부동산중개법인)


여기에 하나 더. 심지어는 가격이 오르는데 매물이 시장에 풀리기는 커녕 오히려 더 줄어듭니다. 일반적인 공급 곡선과 전혀 다른 모양의 그래프가 그려지는 거에요. 아까도 얘기했듯이, 급하지 않은 매도인들은 호흡을 길게 가져가기 때문입니다. 매물을 거두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집주인이라고 생각해보세요. 지난주에 우리 아파트 누구네 집이 8억에 팔렸는데, 엊그제는 다른 집이 8억 5천에 팔리고, 오늘은 9억에 가계약을 쳤다고 하면, 여러분은 당장 집을 내놓으시겠어요?


아니요. 그 반대죠. 앞으로 더 오를 걸 기대하면서 매물을 거둬드릴 겁니다. 매물을 거둬드리지 않으면 호가를 높이거나요. 미래 아파트 가격에 대한 기대가 내 '희망 가격'에 반영되는 겁니다.


10-08.jpg ▲ 매물을 거두고 호가를 높인다. 눈치싸움이다. (출처: 아주경제)


그래서 부동산 상승기에 호가는 실거래가보다 높습니다. (차익 실현에 대한 이야기는 또 다른 맥락이니까 별론으로 하고요.)

10-02.JPG ▲ 부동산 상승기에는 실거래가 보다 호가가 높다. 당연하다. 더 비싸게 팔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더 비싸게 부르는 거다. (출처: 매일경제)



우리는 부동산 상승기에 집주인들이 매물을 다시 거두는 모습까지 봤습니다.


자, 이러면 결론적으로 어떻게 되냐면요, 굉장히 적은 실거래 건수만으로 집값은 미친듯이 떡상하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일종의 착시효과죠.


어떤 원리로 가격 착시효과가 나타나는지, 바로 다음편에서 이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송두칠 doo7@kaka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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