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 하는가 - 에리히 프롬
늘 우리는 무언가를 필요로 합니다. 좋은 학교라는 간판을 필요로 하고, 좋은 직장이 주는 안정감을 필요로 했으며, 경제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을 만큼의 돈을 필요로 하고,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결혼 상대를 필요로 하고, 어디 가서 부끄럽지 않을 만큼의 지위를 필요로 합니다. 마음은 늘 우리에게 말합니다. 주춤거릴 시간 없으니까 나에게 없는 것들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라고. 옆을 보라고. 다들 달려나가는 걸 보면 불안하지 않냐고. 위를 보라고. 내가 바라는 걸 다 가진 자들이 얼마나 행복하게 사는지 보면 부럽지 않냐고. 아래를 보라고. 저 한심한 사람들처럼 도태되고 싶냐고. 그렇게 마음이 속삭이는 대로 의심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채워도 채워도 행복에 닿지 않는 나를 보게 됩니다. 마음은 그런 나에게 나약하다고 말합니다. 그 정도 채워서 행복에 닿길 바라는 게 가당키나 해? 내 노력이 부족한 걸 핑계 대지 마. 하지만 한 번 피어난 의심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반대로 마음에게 물음을 던져 봅니다. 이걸 다 채우면 행복해지는 거 맞아? 이게 정말 내가 원하는 게 맞아? 그럼 이게 내 존재의 이유인 거야? 수많은 물음 끝에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나에게 속삭이던 마음의 소리는 사실 진짜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주변에서 공명하고 있던 사회의 메아리라는 것을요.
내가 당연하게 필요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 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의 것이 아니기에 채워도 채워도 공허했던 것이죠. 생각해 보면 나의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나의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삶은 이어나가야 했기에 마음을 쏟아야 할 무언가가 필요했고, 그때 주변에 만연하게 울려 퍼지고 있는 사회의 메아리를 내 것으로 삼았습니다. 그럼 난 잘하고 있다고 위안 삼을 수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그럼 쉬우니까요. 삶의 중간중간 나의 것을 쫓고 있지 않음을 어렴풋이 느끼는 순간이 있었지만 애써 무시했습니다. 그걸 인정하는 순간 그동안 쏟아부은 나의 노력이 통째로 부정 당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나의 것이 무엇인지 찾아 나설 용기도 없습니다. 나의 것을 찾기 위해 고민해 본 적이 없으니 찾는 방법 또한 모릅니다. '적어도 이렇게 살면 큰일은 안 나겠지.' '남들도 다 이렇게 사는데.' 등의 말로 스스로를 위안 삼으며 계속해서 가짜 삶을 이어나갑니다.
가짜 삶을 살아낸 대가는 무력감입니다. 원한다고 믿었던 것을 쥔 찰나의 순간에 충만함을 느끼지만 이내 아득한 공허함이 찾아옵니다. 끝나지 않는 술래잡기 속에서 먼저 지치는 건 항상 술래입니다. 결국 스스로를 '행복할 수 없는 사람'이라 단정 짓습니다. 무력감을 이해라도 해보기 위해 이유를 붙여봅니다. 완벽한 삶을 위해선 이것이 필요한데, 내가 타고난 혹은 놓인 환경은 이 정도뿐이야. 애초에 내가 바랄 수 없었던 걸 꿈꿨던 거야. 무력감을 합리화합니다. 어느새 무력감은 나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됩니다. 나는 어떠한 긍정적인 영향도 주변에 줄 수 없고, 나의 의지로는 세상이나 나를 변화 시킬 수 없다고 굳게 믿어버립니다. 사실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지 않았으면서,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 뛰어 들어본 적도 없으면서, 내 삶은 이루어질 수 없기에 지루하고 무미건조하며 우울하고 공허하고 아무 의욕도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내가 무의미한 삶을 살고 있음'에 그 뿌리가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대신 강박, 공포증, 중독, 신경증적 행동 등 정신적 질환을 호소합니다. '인생의 무의미함'은 지금 가장 많은 사람을 고통받게 하는 세기의 질병입니다.
가짜 삶에서 벗어나 진짜 나의 삶을 되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는 끝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렇기에 쏟을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 또한 한정적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일에 나의 한정적인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 무력감에서 벗어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평생을 남의 이야기만 들어온 우리는 스스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일에 서툽니다. 너무 많은 메아리에 둘러싸여 살다 보니 어느 것이 메아리이고, 어느 것이 내 마음의 목소리인지 구분해 내기 어렵습니다. 처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다시 맨 처음으로. 그 시작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나는 무엇으로, 어떻게 존재해야 할까?'
이 질문의 답은 찾거나 구하는 게 아닙니다. 이미 답은 내 마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먹구름 낀 하늘과 같습니다. 우리는 먹구름 낀 하늘을 보며 '푸른 하늘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먹구름에 가려졌을 뿐, 푸른 하늘은 분명하게 먹구름 뒤에 존재합니다. 마음에 낀 먹구름을 치워내고 푸른 하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제대로 보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볼 때 진정한 의미로 보지 않습니다. 이 사람과의 관계가 유용할지 따지며 보거나, 과거의 감정을 끌어와서 보거나, 내 마음대로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며 봅니다. 우리의 탐욕이 원하는 대로, 우리의 분노가 강요하는 대로, 우리의 어리석음이 상상하는 대로 대상을 왜곡하여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라는 렌즈를 빼고 맨눈으로 내 마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린아이의 눈이 되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무엇을 시작할 때 크게 고민하지 않습니다. 따르는 것은 단 하나, '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마음을 억누릅니다. 이성이 마음을 억압할 때 주로 이런 말을 합니다. 그건 불가능해, 남들이 이상하게 봐, 아무 의미가 없어. 그럼 반대로 남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상태에서 바라본 쓸모없고, 불가능해 보이는 것에 아마 나의 답이 있을 것입니다.
특히 그동안 내가 불가능하다고 믿어왔던 것들을 자세히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인간이란 원래 끝없이 모순을 마주하며 완성으로 나아가는, 불가능 속을 헤엄치며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룰 수 없지만 이룰 만한 가치가 있는 일에 도전하는 것, 그 일에 내 에너지를 쏟아부으며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 사람마다 진짜 삶의 모습은 다르겠지만 전체적인 윤곽은 이와 같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삶의 의미를 타고나지 않습니다. 이유 없이 태어났고, 각자 나름대로의 삶의 이유를 붙이며 사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삶의 의미' 자체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삶에 의미를 붙이는 이유는 그럼 내가 더 강해지고, 안전해지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삶의 이유 붙이는 것 또한 내가 행복하게 살기 위한 하나의 수단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허나 분명한 건 삶의 의미를 뚜렷하게 붙일수록 우리는 더 자발적인 삶을 살게 되고, 자발적인 만큼 더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이렇게 쟁취 됩니다. 자유란 어떤 것으로부터 해방된다는 작은 의미가 아닙니다. 진정한 자유는 나를 가두는 한계를 넘어 성숙한 나로 이르는 불가능해 보이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퇴보에 빠지지 않고 전진하고, 진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그만큼 자유로울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