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막히는 악몽에 시달리며 얕은 잠을 자고 일어난 아침. 짧지 않은 수면 시간에도 피로가 풀리지 않아 무기력이 입혀진 몸을 이끌고 겨우 일어났다. 침대에서 내 다시는 의무실 근처도 가지 않겠다 다짐했건만. 내 굳은 다짐이 무색해지게 나는 오전을 채 넘기지 못하고 의무실 대기실에 다시 나와 앉아 있었다. 물론 정신과 상담을 이어서 진행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모든 것은 순전히 내 실수에서 비롯되었다.
여느 때처럼 아침을 주문했었다. 식당에 직접 내려가서 아침 식사를 풀코스로 즐기기보다는 필요한 것만 방으로 주문해서 먹는 것이 최근에 자리 잡기 시작한 내 아침 루틴의 시작이었다. 오늘도 계란요리를 두 개 선택하고 간단한 토스트와 더운 야채들을 주문했다. 마실 것으로는 향긋한 커피. 식당에서 올라오는 커피 주전자는 방의 캡슐커피머신에서 만들어진 것과는 무언가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어 매일 아침마다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항목이었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것으로 주문을 마치고 침대에 다시 몸을 누인 나는 간단히 몸을 풀었다. 다이빙을 하는 사람처럼 팔다리를 모아서 위아래로 늘렸다. 몸을 뒤집었다가 똑바로 했다가, 또 허리를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굽히며 침대 위를 자유롭게 유영했다. 포식자 없는 바다를 자유롭게 헤엄치는 고등어 한 마리.
스트레칭을 빙자한 한바탕 게으른 몸부림을 마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구를 정리했다. 오늘은 몸풀기가 조금 과했던지 이불 한쪽 자락이 내 등쌀에 밀려 바닥에 닿아 있었다. 이불을 끌어올려 손으로 먼지를 툭툭 털었다. 이부자리 정리를 마치니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여기서 기분을 더욱 상쾌하게 하려면…
발코니로 가는 문을 열었다. 열린 유리문 틈으로 알프스에서 내려오는 아침 찬바람이 커튼을 밀어젖히며 방으로 쏟아졌다. 바람은 쌀쌀했지만 잠깐 서서 버틸 정도는 되었다. 상쾌했지만 그래도 춥기는 했던지 몸이 움츠러들며 경직되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커튼은 크게 펄럭였다. 그 짧고 빠른 펄럭임에 오히려 커튼에 붙어있던 먼지가 더 날리는 것 같아 커튼을 마저 열었다. 끝까지 열린 커튼은 마침내 바람의 장난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그때 여기서 더 기분이 좋아지는 방법이 떠올랐다.
정말이지 나는 아이디어 뱅크라니까!
담요를 몸에 둘둘 두르고 테라스의 찬 바람을 맞으며 따뜻한 차를 마시면 어떨까? 얼굴과 손등으로는 차가움을 느끼고, 손바닥과 입으로는 따뜻함을 느낀다. 마치 캐나다의 큰 호숫가로 캠핑을 하러 가서 맞는 아침의 여유. 북아메리카 북단의 차가운 공기를 느끼면서 잔잔한 호수를 감상할 수 있는 순간. 물론 경치로 따지면 여기 알프스를 바라보는 것도 캐나다 삼림 속 호수 경치에 꿀리지 않는데 왜 굳이 캐나다 호수를 찾느냐고 묻는 이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미 이 알프스 풍경에 익숙해져 버렸다는 것이 그것에 대한 대답이 되겠다. 반면에 북미의 거대 호수들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으니 로망이 있을 수밖에. 익숙함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마침 여기 거실에 캠프파이어의 벤치 역할을 해 줄 적합한 구조의 소파와 테이블도 있었다.
나는 바로 계획을 실행했다. 전기포트를 들고 화장실로 직행해 물을 채웠다. 그간 방에서 포트로 물을 끓일 일이 없었기에 사용 전에 먼지가 쌓였을 내부를 간단히 물세척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이 끓는 동안 미니바에서 티백을 찾아 꺼냈다. 티백은 4종류가 준비되어 있었지만 어렵지 않게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를 수 있었다.
‘Breakfast Tea’
아침에 마실 차로 이보다 더 적절한 차가 있을까?
휴대폰이나 노트북이 없는 관계로 머릿속으로 재생시킨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며 티백 포장을 뜯었다. 미국에서부터 좋아하던 노래였다. 티백의 종이 포장은 손쉽게 찢어졌다.
He was a boy
She was a girl
Can i make it anymore obvious?
나는 티백을 꺼내어 찻잔에 담았다. 티백을 개봉하며 차 가루가 조금 묻어 나와 밖으로 떨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손가락을 비벼 묻어 있던 가루도 마저 털어내었다.
He wanted her
She’d never tell
Secretly she wanted him as well
주전자를 쥐었다. 겨우 차 한두 잔 분량의 물은 이미 완전히 끓어 더 이상 가열되고 있지는 않았다. 안전하게 전원을 차단하고 주전자를 분리했다.
He was a sk8er boy
She said see ya later boy
He wasn’t good enough for her
나는 찻잔에 대고 주전자를 기울여 물을 따르려 했다. 가열된 주전자의 뜨거움이 주전자 주변의 공기를 데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헐겁게 끼워진 주전자의 뚜껑이 물보다 먼저 떨어져 나왔다. 그때부터 모든 것이 슬로우 모션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뚜껑은 찻잔을 쥐고 있던 내 손등에 안착했다.
She had a pretty face
But her head was up in space
She needed to come back down to earth
앗, 뜨거워!
반사적으로 움츠러드는 몸에 주전자가 크게 출렁이며 뜨거운 물이 왈칵 쏟아졌다. 내 눈동자의 움직임은 가득 피어오르는 수증기 사이로 튀어나오는 액체를 쫓았다. 울컥 뿜어져 나온 저 물들이 얌전히 찻잔으로 들어가면 좋았으련만. 끓는 물이 도착한 곳은 애석하게도 찻잔을 지나 잔을 쥐고 있는 내 왼손이었다. 에이브릴 라빈을 세계적 스타로 만들어준 곡을 흥얼거리던 내 입이 다음 곡으로 비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이른 시간부터 의무실에는 리차드가 나와 있었다. 그 외에는 다른 직원이 보이지 않았다. 당직 개념으로 근무하는 건가? 아니면 아침 시간이라 식사 교대를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노련한 그는 단번에 내가 정신 상담 예약을 하러 방문한 것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사실 그다지 노력하지 않아도 쉽게 추리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단순히 예약만을 원하는 사람 중에 편하게 전화로 예약이 가능함에도 직접, 그리고 이런 시간에 찾아올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확실한 정황증거는 내가 부자연스럽게 빨개진 손을 부자연스럽게 들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손이 불편하신가요?”
“네, 뜨거운 물을 쏟아서요. 우선 세면대 물로 조금 식히려고는 해 봤는데 진정되지 않더라고요.”
“화상이군요. 지금 닥터는 자리에 안 계시는데 기다리시겠어요?”
나쁜 소식이었다. 우선은 화상을 입은 피부의 불길한 변화는 멈췄지만 빠르게 진료를 보고 처치를 받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아, 아침이라 그런가요? 오래 걸릴까요?”
“지금 호출하면 짧으면 10분, 길게는 30분이 걸릴 수도 있죠. 아니면 제가 임의로 처치를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정도 화상이면 어떤 치료 오더가 내려질지는 잘 알고 있거든요. 물론 이런 비공식 치료는 저희 둘만의 비밀로 해야겠지요.”
호오, 임의로 판단과 처방을 하시겠다?
병원에서 벌어지는 일치고는 상당히 대범한 일이었지만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제안했다. 한국의 병원에서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접수받는 간호사가 진료 없이 알아서 처리를 해주겠다고 제안을 할 리 없으니까(물론 어딘가에서는 일어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실 가벼운 화상 정도는 일반 가정에서도 상비약으로 처치하는 것이기에 크게 위험할 것 같지도 않았다. 나와 형도 어릴 때 병원에 가본 기억이 많이 없는 편이었다. 집에는 늘 커다란 구급상자가 있었고, 간단한 창상이나 찰과상 등은 엄마의 응급처치로 모두 감당할 수 있었다.
“병원 일은 얼마나 하셨죠?”
“20년은 넘었습니다.”
“좋아요, 부탁드릴게요.”
사람을 20년 넘게 회 떠왔을 것 같은 외모로 20년 넘게 사람을 살려 왔다는 것이 여전히 매칭되지 않았지만, 그가 본능적으로 주는 무게감은 어쩐지 그를 깊게 신뢰하게 만들었다. 아직도 내게 돌팔이로 인식된 닥터 쿠퍼보다 의료적으로 더 믿음이 간다고나 할까. 리차드는 많은 부분에서 모르싸의 안토니를 떠올리게 했다. 이처럼 사람이 외적으로 풍기는 아우라는 그 사람의 삶에 작지만 많은 영향들을 끼친다.
리차드는 나를 내부의 처치실로 데려가 환부를 다시 살펴보고 치료를 시작했다. 간단히 소독하고 약을 바르고 드레싱을 해주었다. 붕대감기로 마무리 된 처치에는 다소간의 통증이 수반되었지만 성인이라면 모두 참을만한 수준의 것들이었다.
“다행히 3도 급의 심각한 화상은 아니라 곪거나 감염의 위험은 크지 않을 것 같습니다. 환부가 넓다면 넓은데 그래도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간중간에 추가적인 수포가 진피로부터 올라오는 부분도 있는데 건드리지 말고 얌전히 둔다면 없어질 겁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소염제를 처방해 줄 테니까 챙겨 먹으세요.”
와, 간호사가 약도 알아서 막 처방해 주는 거야? 외딴곳에 위치한 요양원이라 이렇게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의 일 처리를 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보는 눈이 많은 도심의 병원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바로 기사화되고 구속되겠지.
“가급적 물에 닿지 않게 관리해 주세요. 드레싱이 오염되면 언제든지 의무실로 찾아오세요. 그러니 수영도 당연히 당분간 금지입니다.”
악, 안 돼! 알렉시스와 둘만의 수영 강습 시간이!
“그건 좀 안 되는데! 정말요?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
리차드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다. 내가 왜 이렇게 수영에 목을 매냐는 눈치였다. 이상하게 보일 것 같기는 하지만 나에게는 중요한 부분이었다.
“방법은 있죠.”
“뭔가요, 선생님?”
“한쪽 손을 앞으로 버린다고 생각하고 그냥 수영하시는 겁니다.”
“아...”
“덜 아프게 수영할 수 있게 마약성 진통제도 같이 드릴까요?”
“... 괜찮습니다.”
그제서야 리차드는 후련하다는 듯 약을 준비하러 갔다. 나는 얌전히 그를 기다렸다. 약 봉투를 가져오며 그가 내게 물었다.
“그나저나 심한 화상까지 입은 상태로 수영은 왜 그렇게 하고 싶어 하시는 건가요?”
그게 많이 궁금했나? 다시 생각해 보니 나라도 리차드의 입장이라면 궁금해할 것 같았다. 물론 궁금하다고 다 물어보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대로 ‘여자 때문입니다’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그에게서 약 봉투를 건네받으면서 답했다.
“제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여기에 장기 투숙을 하고 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삶이 너무 단조롭고 지루해지고 있어서요. 그런데 최근에 수영에서 삶의 의미를 조금 찾게 되었어요. 그래서 열심히 해보려고 하는데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다 보니 그만. 너무 과하게 반응했다면 죄송합니다.”
나는 안타깝다는 표정과 함께 붕대가 감긴 왼손을 들어 보였다. 최대한 처량해 보였으면 했다. 그런 만큼 리차드의 안타깝다는 반응을 기대했는데 눈에 들어온 것은 어쩐지 반짝이는 그의 눈이었다. 저 반짝임에 녹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약간의 ‘기대’?
역시 생긴 대로 남의 불행을 즐기는 타입이었나!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삶의 의미라…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어, 어떻게 도와주시려고요?”
뭘 도와준다는 거지? 이미 화상에 대한 처치는 다 받았기 때문에 추가로 받을 것이 남아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혹시나 손이 더 이상 아프지 않게 손을 아예 없애준다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도와준다고 하면 없던 반감과 경계심이 생기지 않나.
“이곳에서의 삶의 의미를 찾는 거요.”
다행히 내 손을 잘라내 버린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의외의 대답인 것은 확실했다. 삶의 의미란 단어는 상당히 철학적인 단어로 정의하기 모호한 것이었다. 리차드가 내게 찾아준다는 삶의 의미는 무엇을 말하는 걸까. 흠씬 후드려 패서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일까? 나는 그냥 알렉시스만 있으면 의미를 찾을 것 같기는 한데…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의미를 찾게 만드시려는 지요?”
나는 공손한 태도로 조심스레 물었다. 리차드가 어떤 것을 제안할지 그닥 알고 싶지는 않았지만 반짝이는 그의 눈빛을 보면 어쩐지 물어는 봐야 할 것 같았다. 여기서 대화의 주제를 갑자기 바꿀 용기는 내게 없었다.
“이곳에서 잠깐 일을 좀 도와주세요.”
“네?”
“여기 의무실에 일손이 잠깐 모자라서요. 수간호사인 제가 이렇게 아침 일찍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기도 하고요.”
“뭐라고요?”
“해외 의료봉사활동 많이들 하잖아요? 그런 거라고 생각하세요. 간단한 봉사활동이니까 전문지식이 없어도 됩니다. 보조만 해주신다고 생각하세요.”
단번에 내키지 않는 제안이었다. 의료봉사? 평생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무엇보다 하루빨리 수영장에 가서 알렉시스의 강습을 받아도 모자랄 판에 칙칙한 의무실에서 시간을 허비하라고? 나는 그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하하, 저랑은 잘 안 맞을 거 같아요. 제안은 감사하지만 죄송합니다.”
리차드는 내 거절에 호탕하게 웃었다. 그 시원한 웃음소리에 나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이렇게 서로 시원하게 웃기만 하면 다행일 텐데 그는 웃으면서 슬쩍 움직이더니 나와 문 사이로 움직여 내 퇴로를 차단했다.
“좀 도와주시죠. 분명 좋은 경험이 될 겁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본다는 것은 환자분 같은 젊은 사람에게 큰 의미로 다가올 거예요.”
“사, 사람을 살려야 하는 중요한 일까지 여기에서 할 것 같지는 않은데… 사실 여기 그냥 호텔처럼 쉬러 오는 곳이잖아요? 그런 위급한 사람이라면 이런 오지가 아니라 파리나 베를린의 대학병원 근처에 있어야지요.”
“정말 치명적인 건강상의 이유로 머물고 계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고 눈에 잘 보이지 않더라도 말이죠.”
그가 점점 내게 다가왔다. 코앞에서 보는 그는 정말로 거구의 사내였다.
“사양할게요.”
“정말요?”
“네, 정말로요.”
“그럼 지금 손에 쥐고 계신 것이 뭔 지 아십니까?”
뭔 소리야? 내가 들고 있는 것은 방금 처방받은 약 밖에 없었다.
“그쪽이 준 약이잖아요?”
“그렇죠, 강한 마약성 진통제가 들어있죠.”
“뭐라고요!”
“지금 당신은 의사가 없을 때 몰래 의무실에 방문해서 마약성 진통제를 받아 가고 계십니다.”
“무슨 소리예요! 그런 말은 없었잖아요!”
“말보다는 행동이죠.”
그게 무슨 개소리야!
“지금 농담이 나와요? 지금 이러는 거 소문나면 이 요양원 자체가 문제에 빠지는 거 아시나요? 그걸 다 감당할 수 있어요? 저는 여기 VIP 고객이라고요!”
“소문이 왜 나죠? 마약쟁이 하나가 하는 말을 누가 믿어줄까요? 그리고 이렇게 폐쇄적인 시설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알려지기 쉽지 않죠.”
“누가 마약쟁이예요!”
“물론 지금은 아니죠.”
“농담하시는 거죠?”
“지금까지는 농담이죠, 하하. 일 같이 도와주실 거죠? 분명히 의미를 찾으실 겁니다.”
나는 최후의 반항을 시도했다. 약봉지를 그에게 돌려주기로 한 것이다. 이 지옥의 약봉지를 받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치료는 감사합니다. 약은 돌려드릴게요. 약 없이 제 자연치유력을 믿어볼게요.”
그러나 그는 미동도 하지 않고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약봉지를 그의 얼굴 앞에 흔들며 절박하게 외쳤다.
“가져가세요!”
여전히 전혀 가져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마지막 한 수를 두었다. 그 자세로 손을 놓아 약봉투를 그대로 바닥에 떨어뜨렸다.
“맞아요, 말보다는 행동이죠. 저 약 안 받은 겁니다. 그럼 이제 저는 이만 돌아갈게요.”
미동도 하지 않던 리차드의 옆으로 돌아나가려는 찰나 그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짧고 굵게 말했다.
“주워요.”
“싫어요!”
그는 비키지 않고 몸을 낮춰 내 얼굴 앞에 자기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었다. 과하게 가까운 아이컨택. 침이 꿀꺽 넘어갔다.
“주으라고.”
“네.”
으아, 가까이서 보니 너무 무섭게 생겼잖아?
한 번 더 거절했다가는 리차드가 내 목을 그대로 180도로 돌려버릴 것 같았다. 스티븐 시걸 머리 스타일을 하고 돌아다니는 것이 어쩌면 자신의 주특기에 대한 복선일지도 몰랐다. 나는 얌전히 약 봉투를 주웠다.
하… 뭔가 이런 폭력적인 위협 앞에 너무나 약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이것도 다 모르싸 놈들 때문이야!
무자비하고 압도적인 폭력을 수없이 목도한 나의 생존본능은 너무나 예민해져 있었다. 안전한 나라에서 살 때는 정말로 끝을 볼 일이 없다는 믿음을 전제로 깔아 두고 용감히 행동하지만, 삶과 죽음이 함께 공존하는 곳에 살다 보면 최악의 상황도 우리에게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된다. 인간은 언제라도 죽을 수 있는 동물이고 고통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을 깨닫게 되면 자연스레 말과 행동이 조심스러워진다. 생존본능의 일환이겠지. 나, 아무래도 정신과 상담을 받기는 해야 할 것 같아.
“언제부터 출근하면 될까요?”
순식간에 고분고분해진 나를 보고 리차드는 다시 온화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보였다. 평생 자신의 험악한 인상으로 이득을 취하며 살아왔겠지.
“일단 내일 오후 1시에 찾아오세요. 더 자세한 사항은 내일 이야기 나눠 봅시다. 잘 선택하셨어요.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이 악마 같은 사람!
“알겠어요.”
나는 약봉투를 주워 열었다. 약봉지에는 3종류의 알약이 잘 포장되어 있었다. 흰색 원형 알약과 타원형 캡슐형 알약, 그리고 파란색 원형 알약.
“이제 말해줘요. 뭐가 마약성 진통제죠?”
“그런 게 거기 들어있을 리가 없잖아요? 처방해 드린 대로 하루 두 번 잘 챙겨 드세요.”
“예?”
얼빠져 있는 나를 두고 리차드는 호탕하게 웃으며 간호사실로 되돌아갔다.
“정말이에요? 빨리 제대로 말해줘요!”
시야에서 사라지는 리차드의 거대한 등에 대고 외쳤지만 그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