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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한진 Oct 09. 2024

챕터 20. 첫 출근


    20. 첫 출근




    “그래서 내일부터 의무실에서 일한다고요? 멋있는데요?”

    

    알렉시스의 반응은 'That’s pretty cool’이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니 간호 보조로 일하게 된 것이 어쩐지 더 괜찮게 느껴졌다. 마침 스스로도 긍정 회로가 막 작동하여 ‘억지로 하기 싫은 간호사 업무를 돕게 되었다’라는 명제를 ‘자발적으로 보람찬 일을 하기로 했다’로 다듬고 있던 차였다.


    “생각해보니까 그렇게 나쁘지는 않겠더라고요. 당시에는 강압적인 권유 방식에 거부감이 들었는데, 방에 돌아와서 아침밥을 먹으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호기심이 생겼어요. 일을 하면 새로운 사람들도 더 만날 수 있을 것 같고, 어쩌면 보람도 찾을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어차피 당분간 수영도 못하게 되었으니.”


    엉망인 내 손을 들어 보였다. 그녀의 시선이 좌우로 흔드는 내 손을 따라 움직였다. 그 모습은 레이저 포인터를 쫓는 고양이 같았다. 아직은 마음 편하게 쓰다듬을 수 없는 고양이.


    "많이 아팠어요? 만져봐도 돼요?"


    알렉시스는 안타깝다는 표정 다음에 바로 호기심 가득한 얼굴이 되어 물었다.


    "살살 다뤄주세요."

    "얍!"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거짓말 같이 화상 부위 중에 가장 아픈 부분을 콕 찔렀다. 손 전체를 감싸고 있는 붕대에는 그녀가 건드려 볼 부위가 넓고도 넓었지만 하필 거기를 찌른 것이다! 그 절묘한 타점에 그녀가 정말로 모르싸에 보낸 고도로 훈련된 살수가 아닐까하는 낭설도 합리적인 의심으로 느껴졌다.


    "악!"

    "어머, 미안해요!"


    내 과민한 반응에 따라 나온 그녀의 빠른 사과. 그러나 반쯤 웃고 있는 알렉시스의 표정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아이 같은 면이 있는 여자였다. 정말이지 카타리나와 정반대되는 성격의 사람이었다. 카타리나가 유럽의 유복한 집에서 태어나 문제없이 자란 다중 우주가 있다면 이런 모습으로 살고 있을 것 같았다. 씁쓸했다. 카타리나는 음지에서 살았고, 끝내 음지에서 죽었다.


    "방금 그쪽이 수포 하나를 터트린 거 같아요."


    반은 농담으로 반은 진지하게 엄살을 부려보았다. 내가 연기를 잘 했던지 그녀의 얼굴에 장난기가 사라지고 그녀에게서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조금 촉촉해진 그녀의 연한 파란색 눈이 반짝였다.


    "정말 미안해요! 그냥 작은 장난을 친다는 것이 그만…"

    "미안하면 다음 수영 수업 때에는 살살 해주면 안 돼요?"

    “설마 제 수영 수업이 힘들어서 일부러 다친 건 아니죠? 좀 쉬고 싶어서? 다치는 것보다 힘들다고 말로 하는 게 더 합리적인 생각인 건 알죠?”

    “하하, 설마 그랬겠어요? 그리고 힘들긴 했지만 뜨거운 물을 손에 일부러 부어버릴 정도로 힘들지는 않았어요.”

    "알겠어요, 조금 더 상냥한 선생님이 되어줄게요."

    "그렇다면 저는 최고의 학생이 되어줄게요."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뭘요?"


    그녀의 여전히 자상한 표정에서 두 눈만은 돌변하여 의미심장하게 빛을 냈다. 그녀의 눈빛이 향하는 곳을 따라가니 붕대 감긴 내 손이었다.


    “지금 뭘 봐요?”


    그녀는 대답 대신 다시금 내 환부를 노렸다.


    "얍!"

    "아악!"



    다음 날 오후 1시. 나는 의무실로 향하고 있었다. 첫 출근 길이었다. 긴장되냐고? 당연히 긴장되었다. 반강제로 시작한 일터에서 어떤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을 알고? 그래도 나는 그들에게 처음부터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약한 모습은 내가 정말로 감당할 수 없을 때나 보여주자고. 예를 들면 안젤리카가 카타리나의 목을 잘라 내 눈앞에 들고 나타났을 때처럼 말이야.

    의무실 입구에 다다랐을 때 잠깐 멈춰서서 전신의 모세혈관에서부터 자신감을 짜내었다. 두 주먹을 꽉 쥐고 입꼬리를 최대한 올려보았다. 얼굴에 그렇게 완성된 억지 여유를 장착하고 의무실에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일부러 인사하는 목소리를 크게 했다. 카운터에는 리차드와 그때의 여자 간호사가 있었다. 리차드가 내 쩌렁쩌렁한 인사 소리에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아, 어서 와요."


    뭐야, 기분 좋아 보이는데?

    그래도 저 밝은 표정 뒤에 숨어있는 차가운 얼굴, 내 목을 뒤로 꺾어버릴 것 같던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주으라고’, 그의 살벌한 목소리가 자동으로 머릿속에서 한 번 재생되었다.) 그는 태연하게 옆의 동료 간호사에게 나를 소개했다. 지금까지는 아주 평범한 직장의 모습이었다.


    "제시카, 인사해요. 여기는 오늘부터 우리 일을 간단히 도와줄 정진입니다."


    주황색 중 단발 머리의 간호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반겼다. 중년에 들어서는 나이로 보이는 그녀의 미소와 함께 짙어지는 입가의 팔자 주름에 눈이 갔다. 그 다음 그녀의 머리색에 눈이 갔는데, 너무 강한 색감에 자연 머리색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반가워요, 제시카예요. 저희 일을 조금 도와주신다고 들었어요. 마침 저희가 일손이 조금 필요하던 차였거든요. 환영합니다."

    "정진입니다. 저도 좋은 경험이 되리라 믿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나는 말을 하며 리차드를 흘겨봤다. 그는 내 시선의 의미를 아는 지 모르는 지 여전히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를 보고 있었다. 소개가 끝나자 리차드는 내 억지 미소가 정말로 기분이 좋아 보였는지, 아니면 불편한 내 속을 다 알면서 능욕하려는 것인지 호쾌하게 말을 걸어왔다.


    "정진씨,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

    "그럼요! 제 인생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경험을 하러 왔는데 제가 지금 기분 안 좋을 일이 뭐가 있겠어요?"

    “하하하, 좋은 기회를 제공한 것 같아 저도 보람찹니다.”


    리차드는 비꼼 가득한 내 답변에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받아쳤다. 확실하다. 내 등까지 팡팡 쳐대는 것이 이 아저씨 다 알고 이러는 거야.

    그때 닥터 쿠퍼가 화장실을 다녀오는 길인지 덜 마른 손을 비비면서 의무실 로비로 들어왔다. 그는 나를 발견하더니 방긋 웃었다.


    "어이구, 얘기는 들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희를 도와주시는데 자원하셨다고요. 부디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는 좋은 경험되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는 남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휙 인사 하나를 던지고는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게 다야? 총책임자는 당신 아니야? 거기다가 나는 당신 환자이기도 하잖아!

    나는 손가락으로 닥터 쿠퍼의 사무실을 가리키며 물었다.

    

    "혹시 제가 여기서 일하게 된 게 닥터의 지시인가요?"


    리차드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가요! 닥터는 의료반의 업무에 지장이 없으면 자신의 업무 외에는 일절 터치하지 않아요."

    "그렇게 보이기는 하네요. 담당 의사라는 양반이 저렇게 관심 없어 보일 수가 있나? 잠깐만, 그렇다는 건 온전히 그쪽의 판단으로 나를 데려온 거라는 건가요?"

    "그렇죠. 부디 많은 울림을 얻어가시길 바랍니다."


    마음의 울림은 고사하고 여기서 울 일만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마음의 넋두리를 외면하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의료실에 입장하는 순간부터 시작된 억지 미소에 안면근육 일부가 떨리기 시작했다.


    "자, 그래서 오리엔테이션은 진행 안 하나요?"

    "어머, 열정이 넘치시는 분이네!"

    

    제시카가 감동받은 듯한 목소리로 감탄했다. 리차드가 한쪽 팔을 카운터에 기대며 그녀에게 으스댔다.


    "내가 사람 참 잘 골랐지?"


    옘병. 지금 당장 도망치라고 허락만 떨어지면 전속력으로 도망갈 자신이 있었다. 리차드는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사근사근 근무조건을 설명했다.

    

    "아주 어렵거나 하지도 않고 일이 많지도 않아요. 당연히 전문지식이나 업무경험이 전무한 정진씨가 충분히 할 수 있고 가볍게, 힘들지 않은 정도로의 일만 하게 될 겁니다. 그냥 말 그대로 우리 보조입니다. 대개는 닥터가 요양원 내에서 왕진을 돌 때 나와 함께 그를 따라다닐 거예요. 근무 시간은 매일 다릅니다."

    "그게 다인가요?"

    "아, 물론 시급은 '0'입니다. 봉사에 자원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아하, 파트타임도 아니고 무급봉사에 제가 지원했었군요?”

    “예, 분명히 그러셨죠. 그 부분만 잠깐 기억이 안 나셨나 봅니다.”


    뻔뻔하다, 뻔뻔해. 세상에는 왜 이렇게 나쁜 놈들이 많은 거지?


    다행인 것은 내가 지금 돈이 아쉬운 것도 아니었기에 무급으로 일하게 되는 것이 크게 거슬리는 조건은 아니었다. 요양원 생활을 하면서 돈이 부족할 일은 아직 없었다. 500달러짜리 탐 포드 선글라스도 주문만 넣으면 안젤리카의 디파짓에서 자동으로 계산되었다. 결제는 거부되지 않고 즉시 승인되었다. 그녀의 예치금은 당최 떨어질 줄을 몰랐다.


    "하, 하하… 좋은 일 하려고 왔으니까요. 이 정도는 기본이죠."


  

    의무실에서 일하는 직원은 의상인 닥터 쿠퍼를 제외하면 총 5명이었다. 먼저 수간호사인 리차드. 그는 유일한 남자 간호사이자 그들의 리더였다. 나는 소개를 듣기도 전부터 그가 리더일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그가 빌빌 기어다니는 말단 간호사라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어려웠다. 닥터 쿠퍼가 의사가 필요한 업무를 제외한 의무실 운영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걸로 보아 리차드가 실질적인 이곳의 대장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일종의 입헌군주정이랄까.

    그렇다고 리차드가 닥터 쿠퍼를 자신보다 낮게 보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는데, 오히려 닥터를 천외천의 존재로 여겨 그의 영역은 절대 건드리지 않았다. 닥터를 향하는 그의 언사는 고분고분했고, 닥터도 리차드를 존중하고 있는 걸로 보아 둘 사이에 딱히 트러블이 발생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들은 이미 이곳에서 7년을 함께 일해오고 있었다.

    그 다음 일반 간호사들인 제시카, 안토넬라, 리타, 그웬. 주전 근무자인 리차드와 그웬을 제외한 제시카, 안토넬라, 리타가 3교대 근무로 24시간 당직 시스템이 돌아간다. 소수의 인력으로 돌아가는 만큼 그들은 모두 의료실의 행정, 진료, 치료, 수술까지 모든 간호 업무를 할 수 있는 일당백의 용사들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그웬이 전력에서 이탈하게 되면서 근무체계에 변화가 생긴 듯했다. 새로운 대체자가 올 때까지 내가 그 사이에서 그들을 돕게 되는 것이었다.


    "대체자는 뽑았나요? 면접을 벌써 몇 명 봤다던가."

    "아니에요. 아직 찾고 있어요."


    더 묻지 않아도 제시카가 알아서 내 궁금증을 해소해줬다.


    "여기는 공개적으로 채용 공고를 내지 않아요. 알음알음으로 헤드헌팅 하는 거라 시간은 좀 걸릴 거예요. 저희는 아무나 뽑지 않거든요. 어중이떠중이 아무나 올 수 있는 곳도 아니고."

    "그웬은 왜 일을 그만둔 건가요?"

    "개인 사정이죠."


    제시카는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지만 리차드가 옆에서 거들었다. 나를 향한 그의 말은 짧아져 있었다.


    "집안일이지. 고향에서 온천이 터졌다나? 고향으로 돌아와 일손을 거들고 거기 정착하라고 했다더군."

    "생각 외로 퇴사가 자유롭나 보네요?"

    "당연하지, 안 그럴 이유가 뭐 있어? 여기가 군대나 갱단 아니고 나가려면 나가는 거지."


    그럼 나한테는 왜 그런 거야? 따지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올랐지만 억눌러 삼켰다. 이미 멕시코에서 말조심하는 법을 경지의 수준까지 끌어올린 나였다. 사람의 감정은 정말 짧은 말 한마디에도 상할 수 있는 것으로, 감정이 이성보다 먼저 몸을 지배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납작 엎드릴 때에는 이 혓바닥을 관리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간의 경험으로 상대방(정확히는 나보다 먹이사슬 위의 사람들)에게 거슬릴 말과 해도 되는 말은 직감적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그럼 오늘 업무 스케줄은 어떻게 되나요?"


    제시카가 PC로 캘린더를 조회했다.


    "오늘은 사실 정진 씨가 투입될 별다른 일이 없어요. 갑작스러운 상황이 터지면 저희가 대응을 해야겠지만. 그럼 오늘은 의무실에 익숙해지는 시간을 가져볼까요?"

    "일이 없으면 퇴근하면 안 될까요?"

    "그럴 수야 있나요! 다음 근무자인 안토넬라는 보고 가야죠! 인사도 하고요. 그리고 신입 때에 배울 게 가장 많은 거 모르시나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아…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리차드가 옆에서 껄껄 웃으며 또 내 등을 쳤다.


    "뭘 한숨을 쉬고 그러나? 자네는 정식으로 출근한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조금 더 있어보게. 그럼, 잘 배워 보라고."


    이 양반, 나를 대하는 것이 완전히 편해졌네? 어감에서 그가 나를 더 이상 존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말로도, 마음으로도.


    "호칭은 뭐라고 부르죠?"

    "편하게 수간호사님이라고 불러. 자네는 막내지만 일이 끝나면 곧 다시 보통의 고객님으로 돌아갈 테니 다른 간호사들은 편하게 대하게. 이래 뵈도 우린 수평적이거든."

    "그래요, 편하게 지내요. 제시카라고 불러요."


    거참, 퍽이나 수평적이겠다. 옆에서 해맑게 거드는 제시카가 괜히 얄미웠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밉다더니. 나 빼고는 다 한패로 보인단 말이야. 나중에 제시카는 어디까지 알고 무엇을 들었는지 따로 조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내 대답은 이것이었다. 만면에 웃음을 한껏 머금고.


    "잘 부탁해요, 제시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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