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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한진 Oct 10. 2024

챕터 21. 신입 보조

    21. 신입 보조




    "그리하야 이 론 알프 지방은 말이지…"


    화제를 전환하는 톤의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졸음이 쏟아지는 것을 간신히 틀어막고 있었지만 나도 모르게 잠깐 동안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때문에 아저씨의 말을 중간 어디에서부터 인가 놓쳐버렸지만, 최대한 그 티를 내지 않으려 자연스럽게 맞장구를 쳐보기로 했다.


    "어우, 대단하네요."

    "뭐가 대단해? 자네 지금 그 정치인 놈들이 대단하다는 말인가?"


    토마 아저씨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내게 반문했다. 이크, '대단하네요' 정도면 어느 대화에서라도 끼워서 맞출 수 있는 마법의 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완전히 잘못짚은 것 같았다. 나는 재빨리 수정을 감행했다. 아저씨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가 특정 정치인에 관해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대단함’의 방향만 반대로 틀어주면 된다. 애초에 ‘대단하네요’를 반어법으로 활용했던 것처럼 말이지.


    "안 좋은 쪽으로 대단하다는 말이었어요."

    "엥? 그 얼마나 훌륭한 사람들인데?"


    아니, 이 아저씨야! 이럴 거면 왜 따지듯이 반문한 건데?

    도대체 이 사람은 무슨 말을 하고 있었던 거지? 몇 초 동안만 졸았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대화의 흐름은 많이 지나가 있었나 보다. 회심의 수정이 성공적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번에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내야 했다. 아무래도 '대단하다'의 대상을 바꿔야겠어.


    "아뇨, 제 말은 그 바로 전에 것 말이에요."

    "아, 염소젖 말이지?”

    “저, 젖이요? 그래요! 다, 당연히 염소젖을 말한 거죠! 저도 젖을 참 좋아하는데, 염소 젖은 안 좋아하거든요. 그러니까 제 말은 저는 우유를 좋아한다는 거죠.”

    “아니야, 아니야. 그 지역의 염소젖이 얼마나 맛이 좋은데? 아주 훌륭하지, 아주 대단하고말고. 다시 염소젖 이야기를 하니까 말이지, 내가 한 번은 가족들과 ‘레 쁘헤 심비오즈’ 농장에…"


    후, 의도한 대로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이번에는 성공이었다. 토마 아저씨가 다시 자신의 이야기에 푹 빠져버린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여기 자신의 방을 떠나 남의 병실에서 장단을 맞춰주느라 진땀을 빼고 있는 나는, 부르기뇽 요양원의 VIP 손님이자 의무실의 부족한 일손을 돕기 위해 자원으로 의무실 보조를 맡고 있는 신입. 리차드의 말도 안 되는 공갈에 시작한 일이었지만 확실히 규칙적이고 제대로 된 일과가 생기자 내 삶에 다시 활기가 생겼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역시 어른들이 하는 말에 다 큰 사람은 놀기만 해서는 멀쩡한 생활을 하기가 힘들다는 명제는 사실로 드러났다. 확실히 자율성에 맡겨진 한두 시간 남짓의 수영 자습보다 건강한 일상을 보내는 것에는 이렇게 의무실의 일을 돕는 것이 효과가 더 좋은 듯했다.

    내가 맡은 일은 어렵지 않았다. 대개는 이렇게 그들을 따라다니며 잔심부름이나 요양을 위해 투숙 중인 환자들의 왕진을 따라다니는 것이었다. 내 우려 사항이기도 했고 기대가 되었던 부분이기도 했던 직접적인 의료업무는 처음의 예상과 달리 거의 없다시피 했다. 사실 의료사고를 내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요양원의 입장에서도 이 방향이 당연한 처사였다. 실제로 내가 없어도 의무실 운영에 딱히 문제는 없어 보였기에 애초에 ‘리차드가 왜 나를 이 일로 끌어들이려 했는가’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덕분에 일하는데 사고를 낼 수도 있다는 부담은 없었지만 일을 하면서 나중에 의료 처치 쪽으로 살면서 도움 되는 기술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는데 지금까지는 그럴 낌새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따로 의료적인 것들을 알려달라고 부탁해야지. 내 손으로 간단한 소독 처치라든지 더 나아가서는 창상을 바늘과 실로 봉합하는 정도를 할 수 있으면 앞으로 나 자신이나 내 반려자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요양원에는 생각보다 진짜 환자들이 많았다. 그저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싶은 돈 많은 부르주아들을 위한 호텔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요양을 취하러 오는 사람들도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다(물론 그 환자들도 보통의 환자가 아니라 돈이 많은 부르주아 환자이기는 했다.) 그들은 주로 왼쪽 윙의 객실에 투숙하고 있었다. 의료반이 왼쪽 윙에 위치한 까닭에 왼쪽 윙의 끝에 있는 화물 엘리베이터를 통해 우측 윙보다는 편하게 의료반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 그 까닭이리라.

    불현듯 밤의 로비에서 마주친 미친 노인네가 왼쪽 윙에 거주 중이라는 것을 강조하던 것이 생각이 났다. 한껏 치켜 올라갔던 노인의 눈썹과 미간의 주름. 그 이후로 한 번도 그를 본 적이 없었다.

    잘 살고 있나? 통 보이지 않는 것이 그사이에 체크 아웃이라도 한 건가? 왼쪽 윙이면 어딘가 아픈 환자일 것 같은데 완쾌하셨으려나? 혹시나 알츠하이머가 심해져서 어디 치매 전문 보호소로 옮기신 건 아닐지. 그렇다면 내 마음도 괜히 불편해진다.

    노인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언성을 다시 높이는 토마 아저씨 때문에 내 집중을 괴노인에게서 다시 아저씨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론 알프’ 지방이 ‘오베르뉴 론 알프’ 지방으로 통합되어 버린 거야. 그 빌어먹을 정치인 놈들 때문에!”


    뭐야, 정치인 싫어하는 거 맞았네! 아까는 왜 나한테 뭐라고 한 거야!

    그러나 내가 따질 새도 없이 그는 다음 말로 바로 이해시켜 주었다.


    “그래서 내가 돈을 좀 만졌지. 그게 내가 이런 곳에서 쉴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고.”

    “아하, 그러니까 그 짜증 나는 정치인 놈들이지만, 행정구역 개편을 해버리면서 어째 저째 아저씨가 떼돈을 벌게 되었다. 그래서 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놈들이다?”

    “바로 그거야! 자네, 이야기를 아주 열심히 들어주는구먼.”

    “제가 뭘요. 아저씨가 워낙 이야기를 맛있게 하셔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려니 말끝을 나도 모르게 흐렸다. 그래도 아저씨는 내가 어떤 마음인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이 아저씨는 아무래도 그냥 자신이 이야기할 상대가 있기만 하면 만사 오케이인 모양이었다.

이걸로 괜찮은 걸라나? 어떻게 보면 행복한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외로운 것 같기도 했다. 상대방이 나와의 대화를 즐기거나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알아도 모르는 척할 수 있을 정도로 상대의 반응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일까? 나라면 상대방이 나를 이해해주지 않아도 내가 떠들고 싶은 만큼 떠드는 것에 만족할 수 있을까? 나라면 고통스러울 것 같다. 벽을 보고 떠드는 것이 더 낫지.


    “그나저나 저 아리따운 아가씨는 자네를 보러 온 건가?”

    “아가씨요?”


    아저씨의 맥락 없이 이어지는 말에 뒤를 돌아보니 병실 입구에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는 알렉시스가 보였다. 금발을 비스듬히 늘어뜨리고 있는 그녀의 동그란 얼굴. 그녀는 내가 자신을 발견하자 작게 손을 펴 흔들었다. 귀엽기는.


    “네, 제 친구예요. 어우, 이제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네요. 아저씨,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오늘 하루 잘 보내게. 부럽구먼. 저렇게 예쁜 아가씨가 찾아오기도 하고. 나는 가족들도 잘 오질 않아…”


    좋게 작별하는 마당에 갑자기 우울한 멘트가 날아왔다. 이것은 마무리되려는 대화를 다시 붙잡아 연결해 버릴 수도 있는 말. 덕분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중간에 나는 어정쩡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외로움에 공감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우연한 기회로 한순간에 벼락부자가 되어도 건강을 잃고 가족들과도 서먹한 사이가 되어버린 그에게 필요한 것은 호화스러운 요양원에서의 생활이 아니라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닐까.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그 역할을 온전히 수행할 마음이 없었다. 물론 지금처럼 적당히 짐을 덜어드릴 수는 있겠지만.

    더욱이 지금은 퇴근 시간이라고!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잽싸게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도 저희가 있잖아요. 그럼 좋은 저녁 되세요!”

    “고맙네…”


    외로운 가장의 인사를 뒤로하고 얼른 복도로 나갔다. 복도에는 알렉시스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뭐야, 어디 갔어?

    설마 토마 아저씨가 갑자기 우울한 얘기를 꺼내는 모습을 보고 내가 더 붙잡혀 있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그래서 빠르게 도망간 건가?


    “왁!”


    갑자기 알렉시스가 뒤에서 튀어나오며 나를 놀라게 했다. 내가 이 깜짝 이벤트를 예상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게 놀라지도 않았다. 그녀는 시큰둥한 내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정말로 안 놀란 걸 어떻게 합니까?

    보통이라면 상대방을 위해 놀란 척이라도 해주겠지만 지금은 그 타이밍도 놓쳐 버린 것 같았다.

    에라, 모르겠다! 시간이 조금 지나긴 했지만…


    “와, 깜짝이야! 어디에 숨어있었어요?”


    나는 과장된 몸짓과 표정으로 놀란 척을 해주었다. 그제야 알렉시스는 배시시 웃었다. 그녀의 천진한 매력이 묻어 나왔다.


    “바로 옆에 보이는 커다란 화분에 몸을 숨겼죠. 오늘 일은 할 만했어요?”

    “네, 그다지 어려운 건 없어서. 그럼 걸으면서 이야기할까요?”


    우리는 복도를 따라 걸어 엘리베이터 앞으로 갔다. 벽에는 고풍스러운 그림들이 걸려 있었고, 곳곳에 놓인 화분들은 묵직한 녹색으로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복도는 넓고 깨끗했으며, 창문 너머로 보이는 정원은 잘 가꾸어진 꽃들과 나무들로 가득했다. 고급스러운 카페트는 우리의 짧은 여정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첫 목적지는 의료실. 리차드에게서 하달된 오늘의 근무는 토마 아저씨를 돌보는 것으로 끝이었다. 의료실은 내 외투를 두고 왔기에 가지러 가는 길이었다. 가서 동료들을 만나면 작별 인사도 할 겸이다. 외투를 챙기려는 이유는 최종 목적지가 야외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우리는 요양원 밖을 산책하는 것에 재미를 붙였다.


    “오늘 수영장은 어땠어요?”

    “별일 없죠. 그쪽이 물에 빠진 것 이후로는 다시 평화의 시대가 왔답니다.”

    “하긴, 실내 수영장에서 사고가 흔히 나지는 않죠? 바다도 아니고.”

    “맞아요. 그래도 언제라도 발생할 수 있으니 너무 방심해서도 안 되죠.”

    “옳습니다. 프로의식이 아직 살아있네요.”


    의무실 로비에는 다른 교대 근무자 리타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발견하고는 형식적인 인사를 건넸다.


    “아, 고생했어요. 바로 퇴근이죠?”

    “넵.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하하.”


    나와의 인사를 나누고 그녀는 바로 고개를 내려 모니터를 바라봤다. 고개의 각도가 아래로 더 꺾인 것을 보면 모니터 아래에 숨겨둔 휴대폰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뭐랄까… 어렸다. 다른 근무자들이 중년에 접어드는 나이에 가까웠다면 리타는 혼자 20대 초반인 것 같았다. 동료들의 나이를 굳이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추측에 불과했지만 어느 정도 신빙성을 가져도 될 것 같았다. 리타는 스타일도 자유분방했는데 보라색으로 염색한 어두운 머리에 코에는 은으로 된 피어싱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 모습에 ‘이런 고급 시설에서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뭐, 이래도 되니까 저러고 있는 거겠지.


    “그런데 저분 어딘가가 좀 리차드를 닮지 않았어요?”


    의무실을 빠져나가며 알렉시스가 속삭였다. 나도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맞아요! 특히 턱 끝이 갈라진 것이.”

    “그런데 유럽에는 턱 끝이 갈라진 사람이 많기는 해요.”

    “흠, 그렇다면 혈연관계로 단정하기에는 아직 이르군요.”


    오늘은 알렉시스의 퇴근길을 같이 걸어가기로 했다. 알렉시스는 여기에서 일하는 동안 직원 숙소에 머물고 있었다. 직원 숙소는 내가 복도 창문으로 보았던 신축 파빌리온 뒤편에 있는 목조 샬레형의 건물로 요양원에서 일하는 직원의 대부분이 생활하고 있는 곳이었다. 근처에 연고가 있는 사람들은 직접 출퇴근하기도 했지만, 알렉시스처럼 멀리서 온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저곳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하면 편했다.

    우리는 1층에서 직원용 출입구를 통해 밖으로 빠져나왔다. ‘Staff only’라고 적힌 문을 열었을 뿐인데 비상구 하나를 지나서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이 늘상 손님의 입장이었던 내게 흥미롭게 다가왔다. 요양원 생활을 하며 얼마나 많은 Staff only 문들을 보았던가. 모처럼 호기심과 탐험심이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바로 숙소로 가기는 아쉬워 가볍게 요양원을 한 바퀴 돌고 샬레로 가는 길에 오르기로 했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라는 핑계였다. 요양원 주변을 모두 둘러 싼 정원은 잘 정돈된 길과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했다. 아직은 녹음이 느껴지는 길을 따라 우리는 천천히 산책을 즐겼다. 꽃밭 사이로는 작은 분수대와 벤치가 있었고, 직원들과 몇 없는 방문객들이 쉬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날씨는 맑고 따뜻해서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그나저나 알렉시스는 나 말고는 친구 없어요? 왜 자꾸 나랑만 놀아요? 기숙사 생활도 하면 인기 많을 거 같은데. 기숙사면 커뮤니티도 형성되어 있을 것 같은데. 파티라던지, 동아리라던지.”

    “친구요? 당연히 있죠. 적당히. 새 친구를 사귀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그리고 그쪽이 친구가 없어 보여서 제가 놀아주는 그런 착한 마음인 것도 있죠.”


    그녀의 ‘친구’라는 말이 조금 거슬렸지만 아직 우리 사이를 정의하는 데에 그것 말고 쓸만한 다른 단어가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남도 아니고, 연인도 아니고, 원수도 아니고.


    “아아, 친구는 좀 있으시구나. 그럼 남편이나 남자친구는 있어요?”

    “네? 남편이요? 저 유부녀처럼 보여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는 그녀를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당연히 농담이죠. 그리고 혹시 또 모르잖아요? ‘전’ 남편까지 있을 수도 있고.”

    “억울해요! 남자친구도 없다고요.”

    “연애 많이 해봤을 거 같은데.”

    “이래 봬도 학구파여서 상상하시는 만큼 많이 만나고 다니진 않았어요.”

    “제 상상력의 한계를 너무 얕잡아 보시는 것 같은데. 아, 수의학 공부가 많이 힘들어요?”


    그녀는 파리에서 수의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의 이미지와 퍽 어울리는 것 같았다. 말, 양, 강아지, 고양이, 라마, 기린, 코끼리. 사파리 복장에 사파리 모자까지 쓰고 동물들 사이에 앉아 해맑게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그려졌다. 화룡점정으로 그녀의 품에 안겨 있는 갈색 푸들 한 마리.


    “기숙사에서 집적대는 남자들 없어요?”

    “뭐 어디를 가도 인기가 없는 편은 아니죠?”


    예전부터 느껴진 밉지 않은 자존심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택도 없는 사람이 저렇게 말하고 다닌다면 꼴값 떠는 것이지만 근거 있는 자신감이라면 인정받으리라. 그리고 그 말을 하는 저 입술은 왜 이렇게 아름다운 걸까?


    “그 점은 저랑 비슷하네요.”


    알렉시스는 까르르 웃으며 내 어깨를 툭 쳤다. 나는 씨익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니면 요즘 관심 가는 남자는 있어요?”

    “관심 가는 남자요? 글쎄요… 누굴까요?”


    그녀는 그렇게 말을 마치고 나를 흘끗 바라봤다. 그녀를 줄곧 바라보고 있는 내 눈과 자연스레 마주쳤다. 그 찰나, 눈과 눈을 통하며 마음이 이어졌다. 우리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각자 다른 방향의 먼 산을 바라봤다. 내 방에서 보이는 라메주 산맥이 그림 같이 펼쳐져 있었지만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두근거리는 어색함이 우리 둘 사이를 채웠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느꼈지만 이건 확실히 연애의 기류였다. 내가 느낀 감정을 그녀도 나에게 비슷하게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녀에게도 나는 그냥 ‘친구’가 아닐지도 몰랐다. 물론, 아직 확신하기에는 일렀지만. 이런 두근두근하는 감정을 느낀 것이 얼마 만인가!

    그 이후로 다시 정적을 거둔 우리는 경치 감상과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금방 그녀의 숙소에 도착했다. 가까이서 본 숙소는 생각보다 거대했다.

    고등학교 때 체육관이 이만했었나?

    그렇다고 학교 강당처럼 낡고 재미없는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산속의 별장 같은 느낌이라 얼른 들어가 보고 싶은 쪽이었다.


    “나도 들어갈 수 있어요?”


    알렉시스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 안 되겠어요? 따라와요!”

    “네, 대장님!”


    샬레의 중앙 입구는 딱히 잠겨 있거나 하지 않았다. 그녀는 먼저 문을 조금 열어 내부를 확인하더니 뒤돌아 내게 말했다. 들어가도 좋은 상태인 것 같았다.


    “자, 당당하게 어깨 펴요. 지금 뭐랄까, 여기 직원 같이 보이기도 하니까요.”


    하긴, 나이도 그렇고 지금 내 차림새도 그렇고 도저히 저기 부티나는 요양원의 손님으로는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의무실에서 일을 시작하기도 했으니까. 그녀에게 엄지를 올려 알겠다는 사인을 보냈다.


    “그럼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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