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기뇽 요양원에서 먹는 것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단연코 베이커리류라고 할 수 있다. 처음으로 요양원의 식당에 내려가서 아침을 먹던 날, 한 입이라도 더 먹었다가는 가득 찬 위장이 모든 내용물을 위로 역류해 낼 것 같은 위태위태한 상태에서도 따뜻하고 버터향이 고소한 크루아상은 그 위험을 감내하고도 계속해서 집어먹었던 기억이 있다. 오븐에서 구워져 나오는 노릇노릇한 마약. 그만큼 중독성이 강한 빵이었다.
한 번은 늦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점심 준비까지 여유 시간이 생긴 주방 직원들과 잠깐 대화를 나눠본 적이 있었다. 요양원의 주방 종사자들과 처음 이야기해 보는 날이었다.
"음식 너무 잘 먹고 있어요."
"그게 바로 저희 요리하는 사람들의 기쁨입니다. 잘 드셔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게 다 저희 주방장님 솜씨가 워낙 출중하시기 때문이죠."
"와, 주방장님이 유명하신 분인가 봐요?"
"네! 예전에 리옹에서 직접 미슐랭 스타를 거머쥔 분이세요. 물론 지금은 그 레스토랑을 닫고 조용히 여기에 와 계시긴 하지만."
"리옹도 미식으로 유명한 곳으로 알고 있는데 대단하네요!"
직원과 나와의 대화를 가만히 엿듣던 수셰프 사브리나도 끼어들었다.
"저도 셰프님을 직접 본 것은 여기에서 처음 뵙기는 했지만 리옹에서 가게를 하실 때 손님으로 찾아가고는 했어요. 정말 대단했죠. 리옹이라는 도시가 주는 분위기 하며, 레스토랑이 선사하는 즐거움까지도요."
"리옹이라…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네요. 그나저나 제가 가장 좋아하는 건 빵 종류거든요! 제빵도 셰프님 지휘 아래 진행되나요? 아니면 전문 파티셰가 있나요?"
남직원과 사브리나는 갑자기 난감한 질문을 들었다는 표정을 굳혔다. 사브리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먼저 입을 열었다.
"원래는 직접 제빵 쪽까지 하셨어요."
"'원래는'이라면?"
"네, 지금은 관여를 안 하고 계시죠."
"무슨 사건이 있었나요?"
"사건이라 할 건 아니고, 단지 자신이 만든 빵보다 더 좋은 빵을 만드는 빵집을 찾으셨기 때문이죠."
"아, 그렇다면 제가 먹고 있는 빵은 그쪽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건가요?"
"네,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죠. 그런데 완전히 그쪽에서 만들어진다고 하기에는 식사 때 드시는 것들은 저희 주방 오븐에서 만들어지고 있어요."
"아하, 그러면 여기 주방에 파티셰를 영입하신 건가요?"
"그런 셈이죠."
"그분도 엄청난 명성을 가진 분이겠네요? 부르기뇽이 아무나 데려올 일은 없을 거고 여러분들처럼 훌륭한 경력을 가지고 있을 거잖아요. '르 꼬르동 블루'의 강사였다든지? 어쩌면 창립자일지도?"
그들을 띄워주는 내 찬사를 겸한 질문에도 다시 곤란한 표정을 짓는 그들. 그 시선교환에 난처함이 가득했다. 사브리나가 대표로 다시 입을 열었지만 제대로 끝을 맺지 못했다.
"뭐랄까…"
왜 이렇게 곤란해하는 느낌일까? 대체 뭐길래? 설마 이렇게 내가 극찬을 한 빵의 정체가 그냥 공장에서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는 공산품 빵이기라도 한 걸까?
이른 새벽, 주방은 아침 조리를 준비하는 단계로 분주하다. 가장 막내 요리사가 일주일 전에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생산되었다가 어제저녁 트럭을 타고 배송된 빵의 박스를 하나 개봉한다. 그리고 개별 포장된 투명한 비닐 포장을 벗겨 크루아상을 꺼낸 다음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트레이에 내어놓는 상상을 했다.
그때 한 푸근하게 생긴 아저씨가 사브리나에게 멀리서 소리쳤다. 흰색 제빵모에 그 아래에는 살이 덕지덕지 붙은 붉은 얼굴이 있었다. 풍성한 갈색 콧수염이 어딘가 만화 캐릭터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어쩌면 프링글스 과자통에서 본 것 같기도 했다.
"오늘치 빵은 모두 완성했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집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빵에 이상이 있으면 연락해주십쇼!"
그는 양손의 똥똥한 소시지 같은 손가락을 비비며 우리를 지나쳐 사라졌다.
"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온다더니. 저분이군요?"
"네, 맞아요. 저희의 파티세라고 할 수 있죠."
"인상은 뭐랄까, 굉장히 친근하시네요?"
"네, 저희 고향집 아파트 1층에 빵집을 하시는 아저씨가 꼭 저렇게 생기셨었죠."
나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저분은 어떤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이신가요?"
"그게… 없어요."
"없다고요? 뭐가 없어요?"
"경력이요."
"경력이요?"
"네, 경력이 없어요."
"어떻게요?"
"셰프님이 주변 마을에 잠시 들르셨다가 발견한 빵집에서 찾은 분이거든요. 그것도 이 주변에서 그나마 크다는 '그르노블'도 아니고 '몽멜리앙'이라는 작은 산골마을에서요."
"그렇다면 소설 속에 나오는 재야의 천재 같은 인물 아니에요? 알라딘 같은 진흙 속의 보석?"
"뭐 요리 학교나 학원을 다닌 것이 아니라 직접 할머니에게서 전수받은 제빵 기술이라고 하니까 어떻게 보면 그럴지도요? 비전 제빵술이랄까. 그래서 그들이 그 아저씨를 조금 내외하는 느낌이 들었던 걸까요?"
알렉시스는 감자튀김을 먹으면서 흥미진진한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은 느낌으로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내가 느끼기에도 확실히 드라마가 있는 스토리이기는 했다. 초일류 셰프를 인정하게 만든 산골의 평범한 빵집의 제빵사라니.
그녀는 한 손을 머리에 가져대고 한탄했다.
"내가 그 빵을 아직 한 번도 안 먹어 봤다는 게 정말 비극적이에요! 여기 일 하는 동안 먹은 빵은 기숙사에서 나오는 빵이 다였거든요. 아마 거기서는 분명 요양원 레스토랑의 빵과 다른 빵을 쓰는 것 같으니까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몇 번은 모르고 먹어보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몇 번 주문해서 먹은 햄버거나 샌드위치에도 빵은 들어가잖아요."
"그 빵이 그분이 만든 건지는 모르죠! 그리고 그 빵이 그 빵이었다고 해도 이 스토리를 알고 먹는 것이랑 모르고 아무 생각 없이 먹는 거랑은 완전히 딴판일 거라고요! 하, 지금 먹으면 제대로 음미할 수 있을 텐데."
"일리가 있네요. 예술 작품도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잖아요? 어떻게 보면 바른말만 한다니까."
"안 되겠어요. 내일 당장 아침에 그 빵을 먹으러 가자고요."
"내일요? 수영장 오픈은 어쩌고요?"
"아뿔싸!"
그녀는 한 대 맞은 얼굴로 단말마를 외쳤다.
정말 같이 있으면 심심하지는 않다니까.
나는 좌절하는 그녀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진정시켰다. 우리는 이 정도 스킨십은 자연스러운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제가 내일 아침에 빵을 좀 받아놓을게요."
내 제안에 알렉시스는 구원이라도 받은 듯 내 손을 양손으로 덥석 잡았다.
"살려주셔서 감사해요!"
"알면 앞으로 잘하세요."
"성심성의껏 모실게요…!"
다음 날 오전 10시. 아침에 주방에 부탁해 미리 받아놓은 빵 봉투를 들고 수영장으로 갔다. 시간이 시간인 만큼 오븐을 떠나온 빵들은 뜨거운 온기는 이미 잃었지만 그 매혹적인 향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분명 내가 주문한 것은 빵뿐이었지만 준비된 봉투에는 센스 있게 빵뿐만 아니라 함께 곁들일 잼과 버터, 오렌지로 만든 생과일주스까지 들어있었다. 고객이 요청한 것 이상을 고려하는 섬세함. 이래서 내가 여기 식당을 좋아한다니까. 이것이 럭셔리 서비스의 디테일이다.
수영장에 가까워지자 특유의 염소가 섞인 소독약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여름을 떠올리게 만드는 청량함과 피부와 모발에는 좋지 않을 것 같은 은은한 냄새. 오늘은 수영장 이용객이 적기를 바랐다. 그간 지켜본 경험으로 보면 어르신들은 아침부터 오후까지 부지런히도 수영장을 이용했다. 아무래도 사람이 적어야 딴짓을 하기에 알렉시스도 눈치가 덜 보일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다행히 도착한 수영장에는 두 명의 손님만 있었다.
"저 왔어요."
"빵 왔어요?"
"아니, 빵 말고 제가 왔다고요."
"전 그쪽 말고 빵이 필요한데요?"
"빵을 들고 제가 왔어요."
"그렇다면 그쪽도 반갑네요."
"저 서운할 뻔했어요. 서운하면 빵 들고 돌아가 버립니다."
"헤헤, 농담인 거 알잖아요."
투닥거리는 인사를 마치고 그녀는 나를 라이프가드 데스크 뒤로 끌고 들어갔다.
"여기 숨어요!"
나와 그녀는 데스크 뒤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아래가 막힌 데스크가 우리를 숨겨주었다. 아무래도 일터에서 그냥 당당히 먹고 떠들기에는 손님들의 눈치가 보인다는 것이었다. 만약 너그러운 손님들뿐이라면 별일 없겠지만, 깐깐한 손님을 만나면 요양원에 컴플레인이 들어올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나야 직원의 처지가 아니었기에, 운이 나쁘면 발생할지도 모르는 피해의 당사자인 그녀의 말을 고분고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조용히 봉투를 개봉했다. 입구를 벌려 그녀에게 보란 듯이 자랑했다.
"구성이 알차죠?"
"와, 엄청나네요? 이거 들고 바로 피크닉 가도 되겠어요."
"그거 좋은 생각인데! 아쉽네요 지금 자리를 못 벗어나서."
"대신에 긍정적으로 수영장 피크닉을 왔다고 생각하면 되잖아요!"
"그거 묘수네요."
나는 바닥에 철퍼덕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그러자 알렉시스도 헤실헤실 웃으며 완전히 주저앉았다. 바닥에 접시 대신 빵 봉투를 찢어서 넓게 폈다. 커다란 봉투는 좋은 식탁보가 되어 주었다.
봉투 식탁보 위에 내용물들을 다시 이쁘게 정리해 올렸다. 유리병에 담긴 오렌지 주스 두 병과 엄지손가락 만한 유리 단지에 담긴 잼들을 먼저 가장자리로 뺐다. 빵류는 총 네 종류의 빵이 담겨있었는데, 바게트 반덩이를 빼면 종류마다 두 개씩 포함되어 있었다. 크루아상, 뺑 오 쇼콜라, 블루베리 데니쉬. 나는 늘 먹던 빵이라 별다른 감흥이 없었지만 알렉시스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조심히 크루아상을 집어 들었다. 먼저 향을 맡은 다음 손으로 한 조각 찢어서 입에 넣었다.
"맙소사, 정말 맛있어요!"
나는 그녀의 호들갑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았다.
"얼마나 맛있어요?"
"파리에 있을 때 '슈발 블랑'에 간 적이 있었거든요. 거기서 두 종류의 크루아상을 모두 먹어봤었는데 그것보다 이게 훨씬 맛있어요."
슈발 블랑이라면… 파리의 최고급 호텔이었던가? 언젠가 그 점잖던 프란시스가 이를 갈면서 그들을 저주한 적이 있었다. 요양원 인근 지방에 자꾸 고급 리조트가 생기는 것 같다고 말이다. '아만'이니 '벨몬드'니 '슈발 블랑'이니 부르기뇽의 입장에서는 자신들과 카테고리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어서 강력한 경쟁자의 진입으로 느끼는 것 같았다. 특히나 그는 'LVMH’ 그룹에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냈는데, 해당 그룹과 과거 요양원의 합병 관련한 갈등을 빚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문제는 유럽의 럭셔리에 관한 모든 것들을 먹어 치우고 있는 LVMH 그룹이 럭셔리 호텔 숙박업에도 손을 뻗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는데, 그들은 기존의 럭셔리 리조트 브랜드인 벨몬드를 흡수하고 슈발 블랑이라는 독자 브랜드를 출시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어 업계 모두가 주목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런 움직임 전에 부르기뇽 요양원에 대한 인수 시도가 있지 않았을까? 프란시스는 그르노블 근처의 꾸흐슈벨에 있는 슈발 블랑의 지점에 관한 뉴스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특급 호텔의 베이커리보다 맛있다는 거죠?"
"명백히요. 사실 어떻게 보면 여기도 특급 호텔이라고 볼 수 있기는 하지만, 파티셰의 신이한 출신을 알고 먹으니 정말 맛을 차별화시켜주는 것 같아요."
"하긴 빵이야 어딜 가나 맛있는 것은 다 맛있으니까요. 차별점이 될 수 있는 특별함은 스토리에서 나오는군요."
"그 마을이 어디랬죠?'
"그 빵아저씨가 산다는 곳이요? ‘몽’ 뭐더라… ‘몽멜리앙’이었나?"
"거기 가 본 적 없죠?"
"당연히 없죠. 사실 아직 요양원 밖을 벗어난 적이 없어요."
"우리 거기에 한번 가볼래요? 저도 가본 적 없어요."
"좋아요!"
"그렇다면 그때는 진짜 피크닉이겠네요?"
"제대로 된 피크닉이겠죠."
그때 데스크 앞으로 사람이 지나가는 발소리가 들려 알렉시스가 불쑥 일어났다. 다행히 큰 일은 아니었다. 그냥 수영을 마치고 지나가는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인자하게 웃으며 알렉시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마 땅에서 갑자기 사람이 솟아나는 모양새였을 텐데 놀라지 않는 것에서부터 연륜이 느껴졌다. 나도 그녀를 따라 일어나려고 했지만 알렉시스가 발로 나를 제지하며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탄탄한 하체를 보며 빵을 음미할 뿐이었다.
그 주 일요일. 알렉시스가 비번인 날. 우리는 몽멜리에로 나섰다. 나의 첫나들이. 그것도 알렉시스와 함께 하는. 하늘도 내 마음을 아는지 날씨도 맑았다.
요양원에서 제공하는 쇼퍼 서비스로 마을로 찾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벤츠 S클래스 롱바디 모델의 뒷좌석은 구름에 올라탄 듯한 승차감을 선사했다. 요양원에서 마을까지는 차로 30분 걸리는 거리로 가벼운 드라이브 끝에 우리는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언제든지 요양원으로 돌아오고 싶을 때 이걸로 연락을 주세요."
마을의 기차역에서 우리를 내려준 기사는 개인 전화기가 없는 나를 위해 특별히 따로 준비한 통신기를 연락 수단으로 건네고 떠났다.
"오는 길은 편했죠?"
"네, 덕분에 편하게 왔어요. 이렇게 편도로 이동하는 데에 얼마나 들어요?"
"음, 사실 몰라요 얼마인지."
"와, 그런데 그냥 막 타는 거예요?"
"이게 좀 복잡한 사정이 있긴 한데, 대답하자면 그렇죠 뭐."
"당신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에요? 요즘 세상에 휴대폰도 없어, 그런데 돈은 무서운 줄 모르고 펑펑 쓰고, 거기다가 아무나 묵지도 못하는 부르기뇽 요양원에서 무기한 투숙 중?"
"그냥 지구 어딘가에 존재하는 이상한 사람 하나라고 생각해 주세요."
"저 지금 진지해요. 피하지 말고 대답해 봐요."
그냥 웃으면서 넘어가려 했지만 지금의 그녀는 분위기가 달랐다. 그녀의 말마따나 얼굴에서 그녀가 완전 진심임을 느낄 수 있었다. 덩달아 따지는 말투도 조금 날카로웠다.
이건 좀 많이 곤란한데. 하지만 그녀의 입장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알아가고 싶은 사람이 자신이 뭘 하는 사람인지, 어떤 사람인지 꽁꽁 감춘다면? 그리고 그것의 범주가 평범한 일반인의 그것을 넘어 이렇게 특수한 환경 속이라면?
"빨리 알려줘요. 혹시 범죄자예요? 돈 걱정을 안 하는 걸 보면 경제사범? 우리 요양원에 관한 이상한 소문도 돌던데."
"아니에요! 잠시 진정해요. 정말 미안한데 지금은 말해줄 수 없어요. 극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제가 여기 머물고 있는 거거든요."
일단은 프로젝트라는 명목으로 둘러대었다. 사실 모르싸의 극비 프로젝트 때문에 이곳에 피신 온 것이 맞긴 하니까. 알렉시스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가 말해주지 않는 비밀들. 호기심은 의심이 되고, 의심은 언젠가 관계를 망치겠지. 나도 마음만은 그녀에게 모두 알려줘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 독이 될 수도 있는 내용이었다. 만약 안젤리카가 건재하다면 지금 알렉시스의 존재마저 거슬려할 것이다. 절대로 그녀가 카타리나의 뒤를 따라가게 만들 수 없었다.
"하지만 약속할게요. 모든 일이 끝나면 알려주겠다고. 조금만 기다려줘요."
초조했다. 알렉시스가 ‘그럼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요?’라고 묻는다면 그녀에게 들려줄 답은 ‘모르지만 제발 기다려줘요’뿐이었으니까. 그러나 내 진심을 담아 전한 부탁이 받아들여졌는지 그녀도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도 고마웠다. 모처럼 이렇게 단둘이 밖으로 나왔는데 사이가 어색해지거나 파국으로 치달으면 얼마나 아쉽겠는가. 그렇게 망쳐 버리기에는 오늘 날씨가 너무 아름다웠다.
"자, 그럼 마을 탐방 겸 빵집 구경을 떠나볼까요?"
"그래볼까요?"
그녀는 의심의 마음은 제쳐두고 관련된 부정적 기운을 모두 정리했는지 다시 해맑은 대답으로 내 불안을 씻어주었다. 감정을 컨트롤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대단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마을인 몽멜리앙은 이제르 강을 끼고 있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국경의 알프스 산속 호수에서부터 뻗어져 나온 이제르 강은 구불구불 알프스 산맥을 지나 론강으로 합류한다. 강이 몽멜리앙 옆을 지날 때에는 넓고 얕게 흐르는 시골의 재미없는 개천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몽멜리앙이 마냥 내가 상상한 것처럼 깊은 산속, 강 옆에 위치한 한적한 산골 마을의 모습인 것은 아니었다.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에 울창한 숲 속의 마을을 그렸다면 너무나 동화적인 기대였던 걸까. 마을에는 기차역도 있었고 중심부에는 콘크리트로 건축된 작은 빌딩들도 몇 있었다. 그래도 이곳은 도시가 아닌 작은 마을이었고 인구 밀도도 높지 않은 것 같았다. 마을의 북쪽에는 높은 산이 끝없는 벽처럼 서 있었는데 그쪽 앞에도 목초지와 전원적인 주택들이 있는 것이 보였다. 저쪽은 내가 그렸던 이미지와 조금 부합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빵집을 어떻게 찾아가죠?”
“정확히 저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차에서 내려 마을을 산책하고 둘러보는 것까지는 아주 좋았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우리가 몽멜리앙을 방문한 첫 번째 목적은 산책이 아니었다. 물론 오늘 이대로 허탕을 치고 돌아간다고 해도, 긍정적인 우리 둘에게 오늘이 만족스러운 소풍을 했던 하루로 남을 것이었지만, 그녀에게 허술한 남자의 이미지가 남을 것 같아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빵집이 어딘지도 모르고 무작정 먼 길을 나왔다고 생각하니 엄청나게 대책 없는 사람으로 보였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약간의 위기감이 들었다. 가뜩이나 방금 허무맹랑하고 요상한 내 출신 배경으로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나였다. 평생을 허술하게 살아왔다 하더라도 그녀 앞에서는 멋진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나는 태평한 척 연기를 했다. 걱정하지 마요.
“이건 어때요? 같이 보물찾기 하듯이 찾으면 재미있지 않을까요? 조사관이 사건을 해결하는 것처럼 물어물어 탐문하는 거죠.”
“그거 재밌겠는걸요? 이 마을을 알아가는 좋은 방법이 될 것 같아요!”
“크지 않은 마을인 데다 빵집이라는 확실한 키워드도 있으니까 엄청나게 어렵지는 않을 거예요.”
“뭔가, 취재하러 나온 잡지사의 에디터가 된 기분도 들어요!”
그녀는 벌써 우리의 상황극에 몰입하고 있었다. 싫다고 하는 법이 없는 여자였다. 고마운 마음에 눈물이 핑 도는 기분이었다. 내가 적절한 방법을 제시한 것도 있지만 사실은 모두 그녀의 긍정적인 마음가짐과 이해심 덕분이겠지. 그만큼 그녀가 좋은 사람이라는 방증이었다.
울타리 옆길을 걸으며 나직이 말했다.
“고마워요.”
들었으려나? 읊조리듯 던진 혼잣말에 가까운 말이었다. 한 발 앞서 걷던 알렉시스는 휙 나를 돌아보며 뒤로 걷기 시작했다.
“저도 오늘 데리고 나와줘서 고마워요.”
아까 겨우 억눌렀던 찡한 감정이 다시 몰아쳤다. 마음의 안식처를 찾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가 내 쉴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