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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한진 Oct 11. 2024

챕터 22. 향기로운 꽃에는

    22. 향기로운 꽃에는



    기숙사 정문을 통과하자 바로 로비가 나타났다. 기숙사는 요양원 본관의 양식과는 확실히 다른 컨셉으로 현대적이고 실용적인 무드의 인테리어를 가지고 있었다. 좁지 않은 로비에는 소파와 큰 테이블, 그리고 작은 테이블과 의자들이 한쪽에 있었고, 반대쪽에는 게시판이 있어 여러 포스터와 안내 문구, 공지사항들이 붙어 있었다. 로비 홀을 지나면 바로 중앙 계단이 있었고, 계단 앞에서 좌우로 갈라지는 복도가 바로 기숙사의 메인 복도였다. 좌우로 나뉜 복도는 후문 쪽 반대편에서 다시 만나는 직사각형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그 직사각형의 복도를 따라서는 생활에 필요한 시설들이 있었다. 세탁소, 취미실, 독서실, 주방 시설 등등… 확실히 호텔보다는 기숙사형 레지던스라는 느낌이 강했다. 다행히 내부에 사람은 거의 없어 신경 쓰지 않고 구경할 수 있었다.

    알렉시스가 들뜬 목소리로 소감을 물었다.


    “어때요?”

    “좋은데요? 학교로 돌아온 것 같아요.”

    “학교라면 서울의 것이요? 아니면 미국?”

    “굳이 따지자면 미국에 가까운 것 같아요. 한국 학교는 조금 다른 느낌이거든요.”

    “한국 한번 가보고 싶어요.”

    “반드시 와야 해요! 어서 빨리 초대하고 싶네요.”


    그렇게 말하는 나는 정작 한국에 들어간 지가 너무 까마득했고, 이제까지 별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지만, 그녀에게 초대 비슷한 것을 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한국을 사랑하는 애국자였다. 몇 년 동안 얼굴을 보지 못한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언젠가는 집으로 찾아갈 수 있겠지.

    알렉시스는 나를 데리고 여기저기 공용시설들을 구경시켜 주었다. 요양원 본관처럼 부대시설들은 주로 건물 하부에 배치한 것 같았다. 그녀 뒤를 따라 쫄쫄쫄 돌아다니는데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구조나 시설들이 그 시절의 모습과 큰 차이가 없었다. 사람 사는 것은 다 비슷한가 보다. 

    기다란 직사각형의 순환구조를 갖춘 1층의 복도를 한 바퀴 돌았을 때였다.



    “안녕, 알렉시스!”


    누군가가 알렉시스에게 아는 체를 해왔다. 목소리부터 상당히 거슬리는 남자의 것이었다. 중앙 계단에서 내려오고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샛노란 금발을 모조리 뒤로 넘긴 느끼하게 생긴 녀석이었다. 활짝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잔뜩 올라간 광대가 그의 각진 얼굴을 더욱 각지게 만들고 있었고, 미백이라도 한 듯 빛을 뿜어대는 것 같은 흰색의 가지런한 치아는 유독 내 시선을 끌었다. 녀석이 입고 있는 옷도 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운동을 전문적으로 한 것 같은 그의 우락부락한 몸에는 지금 입고 있는 청바지와 티셔츠가 너무 꽉 끼어 터질 것만 같았다.

    아니, 저렇게 입으면 안 불편해?

    마지막으로 건물을 나가기 직전에 입을 계획인 듯 아직 팔에 걸려있는 선명한 빨간색의 외투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냥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녕, 로이! 오늘도 미소가 참 밝네.”

    “넌 오늘도 아름답네.”

    “이제 이 미모에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어?”

    “그럴 리가! 매번 새로워!”


    계단을 다 내려온 녀석이 계단 난간에 한 팔을 걸치고 기대어 섰다. 그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라도 되는 양 다시금 느끼한 미소를 발사했다. 다시 하얀 건치들이 반짝였다.

    얼씨구, 가까이서 보니 보조개도 가지고 있네?

    괜히 의식이 되어 나도 조용히 입꼬리를 올려서 보조개를 만들어 보았다. 내 것은 녀석의 것보다 선명하고 깊지 않은 것 같았다.


    “이제 퇴근하는 길이야?”

    “응, 너는 출근하는 길?”

    “맞아, 오늘 그룹 레슨이 있어서.”

    “그래, 수고해.”


    여기까지는 평범하고 아무런 깊이 없는 대화였다. 생각보다 둘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단서를 던져주는 대화 내용에 나는 내심 안심했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었다. 녀석은 인사를 마치고 먼저 계단을 올라가려던 알렉시스를 멈춰 세웠다. 


    “잠깐만, 오늘 저녁에 뭐 해?”

    “어…”


    알렉시스의 대답이 늘어졌다. 나도 덩달아 초조해졌다. 다행히 알렉시스는 최대한 개연성 있는 일정을 만들어 내는 중인 것 같았다. 그래도 문장의 완성에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오늘 저녁에는 약속이 있어.”

    “누구랑?”

    “여기랑이지.”


    그녀는 두 손바닥을 펴 나를 가리켰다. 로이는 그제서야 나의 존재를 발견한 사람처럼 과장된 표정으로 놀란 척을 했다. 처음부터 알렉시스의 바로 옆에 있었는데 존재조차 몰랐다는 몸짓은 확실히 연기하는 것이 분명했다.


    “오, 안녕하세요!”

    “아, 네. 반가워요.”

    “못 보던 얼굴 같은데 오늘 처음 입사하시는 건가요?”


    정말로 사람들 눈에는 내가 부유한 투숙객이 아닌 요양원 직원처럼 보이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여기에 편하게 들락거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저는…”


    처음에는 요양원의 투숙객이라고 사실대로 말할까 했지만 감추는 편이 우선은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중간에 말을 틀었다. 그렇게 해야 직원이 아닌 사람을 마음대로 숙소에 들인 알렉시스가 곤란해지지 않을 거라는 계산도 있었다. 둘러댈 거짓 아닌 적절한 핑계는 이미 준비되어 있으니까.


    “의료실에 새로 왔어요.”


    그는 내가 중간에 말을 한 번 멈추자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덜떨어진 사람이라고 판단했는지 안쓰러움과 업신여김 중간의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뒤따라온 의료실이라는 대답에는 조금 의외라는 표정이 되었다. 바보는 의료실에서 근무하기 힘들 테니 말이다.


    “반갑습니다. 환영해요, 로이라고 합니다.”


    그는 손을 들어 내게 친절히 악수를 먼저 청했다. 어쩐지 내가 저 손을 잡으면 남자는 할리우드 하이틴 영화 초반에 흔히 나오는 장면처럼 있는 힘껏 내 손을 쥐어짜 버릴 것 같았다. 지금 펼쳐진 상황이나 남자의 겉으로 보이는 캐릭터성이 딱 그런 장면에 부합했다. 뻔히 보이는 수에 악수를 무시할까도 했지만 그의 캐릭터를 확인하고 싶은 호기심이 들어 그 손을 잡았다. 역시는 역시일까?


    “알렉시스가 안내를 맡았나 봐?”


    그가 질문하며 악수를 나누는 손에 힘을 주었다. 물어보는 말투에도 존대의 느낌은 사라져 있었다.

    역시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군! 아주 전형적인 인물이었어!

    비정상적인 압력을 받자 내 손에도 반사적인 힘이 들어갔다. 상대를 이겨 먹기 위해 힘을 줬다기보다는 최소한 손의 모양을 유지하기 위한 방어적인 웅크림이었다.

    이이익!

    생각보다 이 강렬한 악수가 길게 이어졌다. 내 섬섬옥수는 우락부락한 그의 손아귀 속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고개를 든 마음속 자존심이 끝내 버텨내어 겉으로 아픈 티는 절대로 내지 않았다.


    “네, 덕분에 잘 구경하고 있어요. 천사 같은 얼굴만큼 마음씨도 천사 같더라고요.”

    “그래, 그러니 운 좋은 줄 알라고. 남자 기숙사는 4, 5층인 거 잊지 마. 아, 혹시 여자 기숙사로 가야 하는 건 아니지? 그렇다면 사과할게, 하하하.”


    기분 나쁜 악수가 끝나고 그는 기분 나쁜 작별 인사를 남긴 채 룰루랄라 기숙사를 나갔다. 알렉시스는 그의 뒷모습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보았다. 나는 그녀의 감정을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고통 가득한 악수의 순간에는 남자의 자존심으로 아픈 것을 밖으로 표출하지 않고 버텼었지만, 지금은 재빨리 노선을 변경하기로 했다. 주인에게 걷어 차인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아직도 얼얼한 오른손을 알렉시스에게 들어 보였다.

    흑흑, 어서 이것 좀 봐요.


    “어머나! 정말 유치하게 진짜!”


    그녀는 온통 빨개진 채로 축 늘어진 내 손을 보더니 다시 한번 로이가 나간 쪽을 째려보았다. 다행히 그녀의 반응이 내가 기대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로이를 향한 알렉시스의 마음은 확실히 부정적이었다.

    딱 봐도 그녀를 한번 꼬셔보려는 것 같은데, 쉽지 않을 거다, 요놈아.

    나는 비록 아플지라도 덤덤히 참아내겠다는 감정이 표현될 수 있도록 아련한 표정 연기를 했다.


    “괜찮아요. 세상엔 저런 사람도 있는 법이죠.”

    “대신 사과할게요. 여기 요양원 피트니스에서 일하는 트레이너인데 자꾸 귀찮게 하네요.”

    “왜 그쪽이 사과해요. 저는 정말 괜찮아요. 그나저나 아까 저랑 약속이 있다고요?”

    “아, 미안해요. 제 마음대로 그렇게 말했죠? 그냥 상황 모면용으로 잠깐 당신을 빌렸어요. 그럼 이만 거짓말을 끝내고 반납할게요.”

    “그러지 말고, 말 나온 김에 우리 거짓을 진실로 바꿔보는 것은 어때요?”


    그녀는 바로 내 말의 속뜻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표정이 미소로 바뀌며 그녀의 눈꼬리가 조금 내려갔다.


    “흐음, 하긴 저도 거짓말쟁이가 되기는 싫으니까요.”

    “그렇죠, 거짓말은 나쁘니까요. 초등학교 다닐 때 배우잖아요?”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에 또 모범생이었지요. 그럼 대여료로 제가 오늘 저녁 살게요. 여기 식당에 배식되는 메뉴 말고 따로 파는 케밥 도너가 정말 끝내주거든요?”

    “당연히 음료도 콤보로 사주시는 거겠죠?”

    “어유, 말해 뭐해요!”



    알렉시스의 말대로 케밥은 정말 맛있었다. 숙소 2층에 위치한 직원 식당의 정규 식사 시간은 하루 총 4번 제공으로 조식, 중식, 석식, 야식의 구성이었다. 아무래도 24시간 교대 근무가 많다 보니 야간 근무자들을 위한 편성인 것 같았다. 식당 한편에는 정규 식사 시간 외에 언제든지 식사가 가능한 즉석음식 코너가 따로 유료 운영되고 있었다.

    해당 코너에는 메뉴가 가끔 바뀐다고 하는데 한 시즌에 메뉴가 정해지면 그대로 쭉 유지되는 것 같았다. 이번 시즌의 메뉴는 케밥과 핫도그, 신기하게도 면 요리로 동양의 음식인 우동이 있었다. 룸서비스 메뉴에도 우동이 없었는데, 가끔 뜨끈한 국물과 면요리가 생각나면 여기에 들러서 먹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케밥 콤보를 한 박스씩 들고 숙소에서 가장 높은 층인 6층으로 갔다. 6층에는 나름 쓸만한 넓이의 테라스가 숨어 있었다. 숨어 있다고 표현한 이유는 테라스가 요양원에서 보이지 않는 반대 방향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그래서 내가 처음 요양원 복도에서 이 샬레 형태의 숙소를 발견했을 때 이런 테라스 공간이 있으라고는 미처 예상 못한 것이었다.

    테라스의 경치는 일반적인 시선으로 보면 요양원에서 즐길 수 있는 경치와 달리 절경이라고 표현하기는 애매한 수준이었다. 앞에 요양원 부지의 끝을 알리는 울타리가 있고 그 너머로는 관리되지 않은 목초지였다. 조금 황량하지만 자연상태 그대로의 느낌이 있어 싫지는 않았다. 알렉시스의 말에 따르면 가끔 요양원에서 직접 운영하는 축사에서 소들과 양들이 저 들판에서 풀을 뜯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요양원 본관의 테라스에 있는 것들과 같은 모델의 의자가 있어 거기에 몸을 기대어 누워 식사했다. 그래도 직원 복지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식사와 숙소 제공에 이런 편의시설까지 완비되어 있다니.


    “조금 더 추워지면 쉬는 날에 스키도 타러 가요. 사실 그게 제가 여기에 오는 이유기도 하고요. 이곳 스키 코스들이 정말 숨은 보석이거든요.”

    “스키 좋아해요?”

    “사랑하죠. 스키 좋아해요?”

    “스노보드만 몇 번 타본 정도예요. 안 탄지 오래되어서 몸이 아직 기억하려나 모르겠어요.”

    “그거면 충분해요! 조금 더 추워지면 우리 같이 타러 가요!”

    “좋아요. 대신에 저한테 조금 맞춰줘요. 혼자 너무 쌩쌩 달리지 말고요. 영 가망 없다 싶으면 그때는 버려도 됩니다.”

    “제가 이번에 머무는 동안은 수영도, 스키도 싹 다 알려주고 갈게요!”

    “두 과목 수강이라… 그 정도면 수업료를 안 주기가 조금 그런데요?”


    그녀는 시원하게 웃었다.


    “괜찮아요, 여기에 돈 벌러 오는 게 아니니까요. 요양원에서 좋은 일도 하고 정말로 쉬는 시간에 스키를 타러 오는 거거든요.”


    집이 정말로 잘 사나? 그녀에게서는 여유가 느껴졌다. 물질적인 배경에서 오는 여유든 마음의 안정에서 오는 여유든 그녀의 여유로움이 보기 좋은 것은 확실했다. 모르싸에 잡히기 전의 나도 마음에서 나오는 여유가 있었다.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어도 마음의 여유가 나오다 못해 넘쳐흐르는 한량이었지.


    “파리의 집에는 안 가고 싶어요?”

    “뭐 파리에는 충분히 있었는걸요.”

    “그래도 집을 오래 비우면 조금 걱정되고 신경 쓰이는 게 있지 않아요? 오랜만에 돌아갔더니 바퀴벌레가 주인행세를 하고 있다든지? 아니면 노숙자가 집을 점거하고 있다든지?”

    “그건 걱정 안 해도 돼요. 관리인이 일주일에 한 번은 들러서 돌봐주기로 했거든요.”


    관리인? 가정부 같은 건가? 그녀가 알려주지도 않았지만 나는 제멋대로 파리의 고급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 근처에 위치한 고급 아파트 7층 창가. 그곳에 서서 오후의 햇살을 받는 알렉시스. 그녀의 하루는 언제나 우아한 브이로그에 나올 것 같은 모습이다. 유려한 금발 머리칼이 그녀의 하얀 실크 로브 위로 흘러내리고, 손에 든 에스프레소 잔에서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케냐 원두의 짙은 향이 피어오른다. 갑자기 들려오는 노크 소리. 어제 주문한 샤넬 가방이 택배로 도착해 관리인이 집 앞으로 옮겨다 놓았다는 신호일 것이다.

    기욤 뮈소 소설에 나오는 장면 같은데?


    “저도 한번 가고 싶네요.”

    “아, 그럴래요? 언제라도 놀러 와요!”


    무사히 안젤리카가 나를 놓아준다면요. 그녀에게 내 비밀을 말할 수는 없었다. 설사 말한다 해도 믿지 않을 이야기이기도 했다. 망상증 환자 취급을 당할 수도 있다. 마침 머물고 있는 장소도 요양원이니 개연성도 있는 추측이렸다.


    “그나저나 닥터 쿠퍼도 그쪽한테 관심 있는 것 같던데. 혹시 알고 있어요?”


    알렉시스와 함께 있을 때면 닥터 쿠퍼가 그녀에게 신경을 쓰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예쁘게 태어난 것도 피곤한 일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남자, 저 남자, 그 남자 모두 가만히 두질 않으니 말이다. 나는 ‘그 남자’의 입장으로 그녀에게 질문했다. 그녀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닥터 쿠퍼는 제가 아는 사람이에요.”

    “네?”


    이게 무슨 소리야? 아는 사람이라니? 요양원 밖에서부터 아는 사이라는 뜻인가?


    “아,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를 통해 이야기를 들었어요. 개인적인 친분은 없어요. 아버지가 프랑스 의사 협회의 협회장이시거든요.”

    “그것 또한 놀라운데요?”


    나는 문자 그대로 놀랐다. 프랑스 의사 협회장의 딸이라면 내가 상상했던 샹젤리제 거리 7층의 고급 아파트가 실존하는 장소일 확률이 갑자기 올라간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머리를 적당한 정도로 흩날리게 만들었다. 이런저런 여러 가지 요소(물질적인 것을 포함하여)의 조화로 갑자기 사람이 더 멋있어 보였다. 그녀의 따뜻한 마음씨를 유지시켜 주는 여유. 그것은 물질과 마음, 두 곳에서 오는 여유였다.

    알렉시스는 이런 내 경외를 아는지 모르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는 말해선 안 될 것을 말해준다는 뉘앙스로 내게 속삭였다.


    “이건 정말 비밀인데요. 예전에 닥터 쿠퍼가 프랑스 의사 협회에서 제명당했었거든요. 그래서인지 아버지에게 잘 보이려고 제게 접근하고 싶은가 봐요.”

    “아니면 그냥 이성으로 접근하는 걸 수도 있죠.”

    “흠, 그럴 수도 있긴 한데.”

    “그나저나 왜 제명당했다나요?”

    “너무 똑똑한 것이 문제였죠. 그는 모든 전공을 섭렵하려고 했어요. 그리고 거의 해냈죠. 법적인 허가가 나기 전에 자신의 능력을 너무 과신한 덕분에 너무 성급히 실제 환자를 진료하다가 적발이 되었지 뭐예요? 덕분에 여기 외딴곳에 적합한 인재로 스카우트되어서 무사히 일은 계속하고 있지만요. 이 사실은 아마 요양원 내에서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거예요. 저는 관련된 사람이 아버지니까 아는 거고요.”

    “흥미롭네요. 물론 비밀은 절대로 지킬게요.”

    “신뢰의 증표로 건배해요. 의료실에서 일하면서 닥터를 마주쳐도 절대로 티 내면 안 되는 거예요!”


    우리는 아쉬운 대로 케밥 밀 메뉴에 포함된 콜라 잔으로 건배했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아름다웠다. 내 방에서 보이는 알프스의 절경은 아닐지라도 어딘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부분이 있는 시골의 경치였다. 아니면 함께 하는 사람 때문일지도 모르지.


    “오늘 좀 더 가까워진 것 같아서 좋았어요.”

    “저도 그렇게 느꼈어요! 그나저나 빨리 손부터 나아요. 그럼 수영 레슨으로 우리가 더 가까워질 수 있으니까요.”

    “최선을 다할게요.”


    공기마저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은 콜라 때문일까? 그녀 때문일까? 그녀와 그 자리에서 하늘이 어두워질 때까지 시간을 보내다가 헤어졌다. 숙소를 나오는 길에 직원 몇을 지나갔지만 다행히 로이를 마주치지 않아 편하게 나올 수 있었다.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나름 요양원에서 지낸 지 시간이 제법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안면식도 없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니! 요양원에서 지내는 동안 내 인상이 그렇게 희미했었던 걸까?

    그녀가 했던 말 하나가 내 귀를 맴돌았다.


    ‘그럼 우리가 더 가까워질 수 있으니까요.’


    헤헤, 얼마나 더 가까워지려고 그러지?

    자꾸 나오는 웃음을 실실 흘리며 밤길을 걸어 요양원으로 돌아갔다. 큼직한 자갈들로 포장된 길의 표면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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