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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한진 Oct 07. 2024

챕터 18. 상담

    18. 상담




    호흡이 한 번 꼬이자 생존본능이 다급함을 불러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알렉시스는 혹독한 강사였다.

    수영 강사란 것들은 모두 다 이런 거야?

    어릴 적에 나를 물과 멀어지게 만든 수영 강사와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우악스러운 그녀처럼 알렉시스는 나를 물에 집어던지거나 억지로 머리를 수면 아래로 밀어 넣지는 않았지만 우리 엄마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한마디로 스파르타식 교육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다리 쉬지 마요! 스트로크 점점 느려진다!"


    윽

    나는 그녀의 말처럼 힘이 빠져 느려진 다리의 움직임에 다시 집중했다. 근육이 지쳤는지 다리를 위아래로 휘젓는 동작이 느려지고 움직임의 폭도 작아져 있었다.

    저도 느려지기 싫은데 몸이 내 말을 안 듣는 걸 어떻게 해요!

    내 귀는 정신없이 수면 위와 아래를 들락날락하며 소리를 온전히 들을만한 상태가 아니었지만, 어째서인지 그녀의 코칭은 물속에서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전신의 근육들이 멈춰달라고 부르짖었지만 내 한계에 도전한다는 마음으로 레인 중간에 멈추고 싶은 걸 억지로 참고 끝까지 완주했다. 그리고 온몸에 스트레스가 번졌을 때 도착할 수 있었다.

    해냈다!

    나는 착한 일을 한 아이의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녀는 내가 바로 뒤돌아 출발하기를 바랐다. 레인의 끝에서 끝으로 겨우 도착한 내가 바로 또 한 번의 횡단을 성공할 것 같지 않았다. 차마 몸이 움직여지지 않아 나는 소심한 반항을 선택했다.


    "조금만 더 부드럽게 해 줄 수 없어요?"

    "원래 배울 때는 엄하게 배워야 하는 거예요. 특히나 스포츠는요. 한국은 그렇지 않아요?"

    “글쎄요, 딱히 한국에서 스포츠를 전문적으로 배울 일이 없어서.”


    내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학교 체육 시간의 체육 선생님들을 제외하면 경험해 본 체육 강사라고는 어릴 적 수영강사가 유일했다. 보통의 남학교 학교 체육 선생님들이란 수업 시작할 때 보통 공 하나를 던져주며 자유시간을 주는 것과 수업이 끝날 때 다친 사람이 없는 것을 점검하는 것이 수업의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체육계에 몸 담지 않더라도 선후배, 선수와 지도자 간의 위계질서 같은 것들이 엄격하고 폭력적이라는 소문은 상식 수준으로 많이 알려져 있었다. 우리 고등학교의 축구부 친구들이 저녁 시간에 얼차려 받는 모습을 종종 보기도 했었다.

    분명히 그녀에게서 수영강습을 받기로 했을 때만 해도, 서로 가벼운 물장난을 치면서 알렉시스와 단둘만의 달콤하고도 꿀이 떨어지는 강습을 기대했었는데…!

    꺄르르 꺄르르

    상상 속에서만 들었던 우리의 깨 떨어지는 웃음소리가 환청이 되어 점점 멀어졌다. 나는 고개를 털며 귀에 들어간 물을 빼냈다. 그에 따라 귓속에 남아있던 우리의 웃음소리도 탈탈 털려 나갔다.

나는 조금이라도 더 쉬기 위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는 걸 느꼈다. 이러고 있다가는 바로 반대쪽 끝을 향해 출발해야 할 것 같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그나저나 제 자유형은 어떻게 보시나요, 선생님."

    "음… 아주 엉망이에요. 평영보다 먼저 자유형을 좀 배워야겠는데요?"


    아무래도 독학으로 흉내만 내는 수준의 자유형은 역시나 제대로 된 수영이라고 볼 수 없는 수준이었던 것 같았다. 그녀는 강습의 시작으로 내게 우선 자유형을 시켜보았다. 일종의 레벨 테스트랄까? 그리고 그녀는 내가 심각한 수준이라고 판단을 내린 것 같았다.


    "그럼 커리큘럼이 어떻게 되나요?"

    "흠, 일단 물에 뜨는 법은 알고 있는 것 같으니 일단 자유형 동작을 교정하는 거부터 시작해요!"


    일단 확실히 그녀가 나를 튜터링 하는 것에 엄청나게 열정적이란 것은 알겠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임하는 알렉시스의 모습에 감사하면서도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래도 확실한 것은 지겨운 일상과는 확실히 멀어졌다는 것. 그리고 확실히 그녀와 가까워질 수 있다는 점 정도가 있겠다.


    "몸 확실히 푼다고 생각하고 자유형 왕복 한 번 더 실시합니다!"

    "..."


    덤으로 체력도 확실히 좋아질 것 같았다.



    첫날 수업은 간단히 30분 정도로 마무리되었다. 알렉시스 선생님은 30분의 시간을 알차게 사용했는데, 처음 5분은 독학한 자유형으로 레인을 왕복하며 몸을 풀게 한 다음 나를 관찰했다. 그런 다음 파악한 문제점을 분석하여 물 밖에서 동작을 하나하나 짚어주며 내 자세를 교정해 주었다.

    교정을 하니 몸이 물을 밀고 나아간다는 느낌이 확실히 들었다. 하체와 상체의 동작 모두 신경을 써야 했는데 무언가에 열중한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오래간만이었다. 수영 연습에 혼자 임한 지난 1주일의 시간은 사실 물장난과 휴양일 뿐 수영 연습이라고 하기엔 확실히 부족했었다.

    알렉시스도 물에 들어와 함께 하면 좋을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정규 수영 강습인 것도 아니었고 그녀는 여전히 라이프가드 신분이었기에 그럴 수는 없었다. 다른 손님들도 있는데 라이프가드가 자신의 본분을 잊고 물속에서 수영을 가르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녀가 제공해야 할 서비스의 의무를 나 때문에 소홀히 하게 되는 것은 나도 불편했다. 그래서 그녀는 물 밖에서 내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코칭을 했다. 알렉시스는 보통 때처럼 헤실헤실 웃는 모습도 아름다웠지만 심각한 표정을 지을 때도 매력적이었다.

    다행히 수영장을 이용하는 다른 고객들도 별 불만이 없었는데, 오히려 그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수영장에 활기를 불어넣는 우리들을 응원하는 쪽이었다(수영에 이미 도가 튼 그들은 딱히 라이프 가드가 필요할 일이 많이 없었다.) 우리의 강습이 시작된 이후로 수영장에 전에 없던 젊은 에너지가 돈 것은 사실이었다. 거기다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마음의 여유도 넉넉했다. 여유가 마음의 여유를 부르고, 부족은 마음의 부족을 부른다.

    나는 선베드로 돌아와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처음엔 잘못 걸렸나 싶었지만 30분이란 시간이 정말 훌쩍 지나갈 정도로 집중해서 임했다. ‘벌써 끝났어?’라는 마음에 조금 아쉬운 느낌도 들었다. 얼른 정리를 마치고 라이프가드 자리로 돌아간 알렉시스에게 갔다.


    "오늘 퇴근 언제예요?"

    "오후 두 시예요. 제가 오전 근무를 보는 기간이라."

    "아, 교대 시스템이 있군요?"

    "네, 저희가 6시부터 22시까지 여니까요. 두 명이서 8시간씩 나눠서 보고 있어요."

    "8시간이면… 쉽지 않겠는데요?"

    "그래도 중간중간에 쉬는 시간도 있고 식사 시간도 있어서 괜찮아요."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고 나머지 말을 했다.


    "그리고 이 정도면 상당히 편한 축에 속하거든요. 나름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답니다."

    "그거 좋은 소식이네요."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은 오후 1시. 그녀의 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늘의 만남을 벌써 마무리하기에는 아쉬운 마음이 컸다. 그렇다면 추파를 더 던져봐야겠지?


    "그나저나 곧 퇴근이네요?"

    "그렇죠?"

    "강습료로 제가 점심 대접하고 싶은데, 어때요?"


    그녀는 눈을 새초롬 뜨면서 말했다.


    "흠, 하긴 제가 강습이라는 서비스를 제공했으니 소정의 대가를 받아도 정당한 거겠죠?"

    "나름 합리적이고 공정한 거래죠. 감사를 당한다고 해도 걸릴 것도 없을 걸요?"

    "좋아요! 그런데 두 시까지 기다리려면 배고프지 않겠어요?"

    "괜찮아요, 저 배고픔 잘 참거든요. 다른 사람처럼 배고프다고 막 예민해지지 않아요."

    "어머, 제가 그런 사람인데. 저는 배가 고프면 엄청나게 예민해져요. 그래서 지금도 슬슬 예민해지려고 해요."

    "어떡해, 그럼 저 이만 도망갈까요? 더 예민해져서 날카로워지기 전에?"

    "아마 그 편이 신상에 이로울지도 몰라요! 잘 숨어있다가 두 시에 다시 나타나세요."

    "좋아요, 그럼 퇴근하고 봐요!"



    1시간 뒤, 나는 알렉시스에게 석고대죄를 하고 있었다.


    "정말 미안해요! 진짜 요즘 기억력이 어떻게 됐나 봐요."

    "괜찮아요, 헤헤. 저도 그럴 때가 있는걸요."


    두 시에 정신과 상담을 예약해 놓고 그걸 잊고 말다니! 첫 약속부터 정말 최악이었다. 정신을 잃고 난 뒤 재발 방지를 위해 잡아두었던 병원 예약 건은 까마득히 잊혀 있었다. 예약이 오늘이었다는 사실은 수영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서야 알게 되었다. 그것도 스스로 기억해 낸 것이 아니라 예약을 알려주는 객실 전화를 받고서 말이다.


    "정진 고객님 오늘 오후 두 시 반에 의무실 예약이 있습니다."


    낭랑한 목소리의 안내 전화에 머리가 새하얘졌다. 차라리 어제 수영장에서처럼 기절이나 해버렸으면! 나는 외출 준비를 서둘러 마무리하고 바로 수영장으로 달려갔다. 알렉시스는 내가 머리도 덜 말린 상태로 헐레벌떡 뛰어오자 놀란 눈치였다.


    "무, 무슨 일 있어요?"


    다행히 그녀는 너그럽게 이해해 주었다. 외모만 고운 게 아니라 마음씨도 고운 여자였다. 나는 그녀가 더 마음에 들었다.


    "흠, 그럼 우리 점심은 어쩌죠?"

    "윽, 미안해요. 뭐, 내일도, 다음 주도 시간은 많으니까요. 계속해서 여기 머무를 예정이라."


    그녀가 손바닥을 탁 치고 한 가지 제안을 떠올려냈다.


    "아니면 오늘 제가 병원에 따라가 봐도 될까요? 그런 종류의 상담받는 거, 늘 궁금했거든요."

    "그럴래요? 그럼 점심은 간단히 샌드위치 포장해서 먹으면 되겠다."

    "두 시 삼십 분 예약 이랬죠? 저 퇴근하고 만나면 샌드위치 간단히 먹을 시간도 딱 맞을 거 같아요."

    "네, 어서 준비하고 나와요. 저는 그럼 전화로 샌드위치 준비시켜 둘게요."



    그녀는 준비를 금방 마치고 나왔다. 유니폼을 벗고 사복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하얀 나이키 운동화에 회색의 트레이닝복 셋업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머리는 여전히 길게 한 갈래의 포니테일 스타일로 묶여 있었는데 세련된 분위기가 풍겨 마치 나이키의 광고에 나올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럼 식당에 샌드위치 찾으러 갈까요?"


    나는 그녀와 복도를 걸었다. 그녀는 모험이라도 떠나는 듯 설레어했다.


    "저 사실 이쪽으로는 거의 안 와봤어요. 직원들은 직원 전용 엘리베이터랑 통로를 쓰거든요?"

    "그런 사실은 처음 알았어요. 그러고 보니 정말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을 제외하고 일반 사복을 입은 직원들을 못 본 거 같더니 그런 비밀이 있었군요?" 

    "그렇죠. 우아하신 귀빈님들과 천한 직원들이 한 공간을 쓸 수 없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아주 영광입니다. 절 받으시지요."


    그녀는 장난스럽게 내게 궁정식 인사를 올렸다. 물론 치마가 아니었기에 치마 끝자락 대신 펑퍼짐한 트레이닝복 바지의 옆단을 잡고 사뿐히 앉았다 일어났다. 그녀의 짓궂은 농담에 조금 민망해졌다. 귀빈과 천한 직원이라니. 그러나 천하기로 따지면 나도 만만치 않았다.

    이래 봬도 범죄 집단 여수장의 애완견 출신입니다만...

    하지만 그저 당하고 있을 내가 아니었다.


    "이거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공주마마."


    나도 한 팔을 접으며 그녀에게 과장된 인사를 했다.


    "푸흐흡, 공주요? 제가 또 초등학교 때 디즈니 프린세스 연극 출신인 걸 어떻게 아시고."


    띵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문이 열렸다.


    "타시지요, 마침 마차가 도착했네요."


    내가 내민 손에 자기 손을 살짝 올리며 알렉시스가 물었다. 물음 뒤에는 범인들이라면 조금 부담스럽게 느낄 수도 있는 연극이 이어졌다.


    "어머, 우리 어디로 가는 건가요? 어딘가에 화려한 무도회가 열리고 있나요? 그곳엔 저를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음식들과 현악 사중주의 공연도 준비되어 있겠지요? 하, 오늘은 또 얼마나 많은 남자에게 시달리려나."


    그녀는 반대손의 손등으로 이마를 가볍게 짚으며 대사를 쳤다. 하지만 나는 범인이 아니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이끌며 리드했다. 그녀는 왈츠라도 추듯이 사뿐한 스텝으로 따라 들어왔다. 1층으로 가는 버튼을 누르며 답했다. 연극을 적당히 받아주면서 끝을 맺는 멘트로 마무리했다.


    "정신병동으로 갑니다. 우리 둘 다 중증인 거 같아서요."



    우리는 1층 식당에서 포장된 샌드위치를 집어 들고 어디서 먹을지 잠시 고민했다. 마음 같아서는 차가운 공기에도 오후의 햇살이 따사하게 우리를 비춰 줄 밖의 정원에서 먹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조금 부족했다. 상담 예약 시간이 곧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의무실 앞 복도에 쪼그려 앉아서 먹기로 했다.

아예 바닥에 편하게 앉은 우리는 서로를 더 알아갔다.


    "영어는 어떻게 그렇게 잘해요? 프랑스에서 영어를 잘 가르치나 봐요?"

    "아, 저 어릴 때는 스위스의 국제학교에 다녔었거든요. 거기에서는 외국어 수업 빼고는 다 영어로 하니까요. 그렇게 치면 당신도 영어가 너무 유창한데요?"

    "저는 미국에 오래 살았었거든요. 제 십 대를 미국에서 보냈죠."

    "다행이에요, 우리가 영어를 할 줄 알아서."

    "그러니까요. 영어를 전 세계로 퍼트린 미국과 영국에게 감사하네요. 다른 언어는 할 줄 아는 게 있어요?"

    "독일어를 조금 할 줄 알고, 스페인어는 아주 조금 알아요."

    "멋진데요? ‘구텐탁’ 말고 다른 독어 좀 알려줘 봐요."

    "흠, 뭐가 좋을까… 그런데 프랑스인한테는 독일어보다 프랑스어를 알려달라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요? 꼭 독일어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건 아니죠?"

    "날카로운 지적인데요? 당연히 프랑스어도 상관없어요."


    그때 낮게 울리는 방해꾼의 목소리가 우리의 대화를 멈추었다. 저음의 목소리는 복도에 퍼져 우리에게 닿았다.


    "정진 환자분 계신가요?"


    저런 대사를 할 사람은 간호사뿐이겠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일단 대답했다.


    "저희 이만 들어가야겠어요. 네, 저 여기 있어요!"


    다 먹은 샌드위치 포장지를 한 주먹에 구겨 버리기 쉽게 만들고 의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거구의 남자였다. 그를 보자마자 나는 말문이 막혔는데, WWE 프로레슬러 '언더테이커'를 연상시키는 남자가 긴 머리를 '스티븐 시걸' 스타일로 깔끔하게 묶은 다음 분홍색 간호복을 입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압도되어 말을 더듬었다.


    "제, 제가 정진입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차트와 나를 번갈아 봤다. 차트에 뭐라도 하나 잘못 기입되어 있다가는 변명의 여지도 안 주고 차트 모서리로 내 머리를 찍어 버릴 것 같았다.

    지금 보고 있는 거, 의료용 차트가 맞기는 한 거지?

    어쩐지 내가 살면서 지은 죄들이 적혀 있는 저승사자의 서류처럼 보이는 건 왜일까.


    "반갑습니다. 저는 부르기뇽 의무실의 수간호사 리차드입니다."

    "바, 반갑습니다."


    짧은 문장 하나도 걸쭉한 욕설로 시작해 욕설로 끝날 것 같은 그의 말은 내 예상을 깨고 정중하고 간결했다. 분위기에 압도되어 그가 건네는 악수를 나도 모르게 받았다. 작지 않은 편인 내 손이 그의 거대한 손바닥 안으로 폭 들어갔다. 모르싸의 인상 험한 거구들 많이 봐왔지만 여기서 지내는 동안 많이 무뎌진 것인지, 아니면 그때의 생각이 다시 나서 문제인지, 나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다.

    긴장 풀자고. 나는 여기 손님이야.

    그렇게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스스로 걸었던 자기 최면이 효과가 있었던지 상담실로 안내받을 때쯤엔 다시 편안함을 되찾은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갑자기 수간호사가 나를 따라오는 알렉시스를 막아섰다.


    "차트에 따르면 보호자가 없는 환자분인데, 함께 동행하시는 건가요?"

    "예, 제 친구예요"

    "상담실로는 본인만 출입 가능 합니다. 혹은 환자 요청하에 정식 등록된 보호자까지만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방해에 알렉시스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보호자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제가 이 사람 목숨을 한 번 구했거든요."


    저게 또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 생명을 한번 구했으니까. 나는 옆에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말을 긍정했다. 리차드가 그런 내 반응을 살폈다.


    "그럼 환자분만 동의하시면 보호자 자격으로 같이 입실할 수 있습니다. 원하시나요, 환자분?"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가볍게 승낙하려 했지만 이렇게 되니 나를 다시 한번 고민하게 만들었다. 물론 아까까지는 상담실에 그녀와 함께 들어가기로 했었지만 너무 가벼운 판단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한 번도 정신과 상담이나 심리상담 비슷한 어떠한 것도 해보지 않았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는데 막상 문 앞에 서게 되니 여러 가지 걱정이 들었다.

    이번 상담을 진행하는 이유는 바로 내가 기절한 원인을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원인을 알고 있다. 상담이 시작되면 나는 그들 앞에서 내 과거들을 다 털어놔야 할지도 몰랐다. 그녀가 듣고 있는 앞에서 '제가 순식간에 사랑에 빠져버린 여자가 어느 날 내 앞에서 목이 썰려서 돌아온 적이 있습니다. 아직도 그때의 피 냄새가 가시질 않는 것 같아요. 그리고 목이 뎅겅 썰려 죽은 그녀가 알렉시스를 똑 닮았지요.’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알렉시스는 돌려보내는 것이 맞았다.


    "미안해요.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저 혼자 들어가는 게 맞을 것 같아요."

    "아아, 알겠어요. 제 걱정하지 말고 편하게 다녀오세요."

    "안에 들어가면 제 속 이야기를 털어놓게 될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시작부터 제 모든 걸 알려주면 재미없잖아요?"


    다행히 그녀는 실망의 기색이나 기분 나빠하지 않고 내 생각을 헤아려주었다. 그녀도 막상 남의 상담실에 들어가려니 부담이 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리차드가 조성한 진지한 분위기가 그녀의 마음을 바꾸었던지는 모르겠으나 무난히 내 농담을 받아쳐 주었다.


    "아무래도 조금 재미없긴 하죠? 영화도 미리 결말을 알고 보면 재미없잖아요. 그럼 서로 차차 알아가는 것으로 해요! 이만 전 퇴근해 볼게요."

    "네, 오늘 고생 많았어요."


    그녀가 사라지고 리차드가 물었다.


    "이제 준비되신 건가요?"

    "네, 가시죠."


    리차드는 상담실의 문을 주먹으로 두드려 노크했다.

    쾅쾅쾅!

    제 딴에는 가볍게 노크를 하는 건지, 문을 때려 부심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건지 알 수 없는 굉음이 났다.

    문 부서지는 거 아냐?

    다행히 문은 부서지지 않았고 안에서 대답 소리가 들렸다. 닥터 쿠퍼였다.




    상담실은 밖의 대기실과 사뭇 다른 분위기로 꾸며져 있었다. 상담을 위한 전용공간이라기보다는 닥터 쿠퍼의 개인 사무실로, 사무실 한쪽에 영화에서 보던 편안한 라운저와 작은 테이블이 구비된 곳이었다.


    "반갑습니다. 밖에서 무슨 문제가 있었나요? 들어오기 직전에 대화 소리가 좀 들리던 것 같던데."

    "아뇨, 별문제 아니었어요. 어떻게 저기 앉으면 될까요?"

    ''네, 편하게 앉아서 진정하고 계시면 되겠습니다. 곧 그리로 가겠습니다."


    나는 닥터가 시키는 대로 갈색의 소파에 몸을 뉘었다. 소파는 굉장히 편안해 뭐라도 덮을 것이 있으면 잠이 솔솔 올 것 같았다. 나는 그대로 늘어져 닥터가 뭘 하고 있나 살폈다.

    뭐야, 별거 안 하고 있는데?

    그는 딱히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내 생각이 들리기라도 했는지 그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로 왔다. 손에는 간단한 차트와 펜을 들고 있었다.


    "자, 첫 시간입니다. 일단 오늘 환자분에게 할당된 시간은 30분입니다. 첫 시간인 만큼 가볍게 시작하죠. 이야기를 들어보고 정신과 상담으로 갈지 아니면 종목을 심리상담으로 변경할지 결정하는 겁니다."


    내 이야기…

    나는 우물쭈물 아무 말할 수 없었다. 어느 정도 이런 시간이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솔직히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여기에 머무는 동안, 모르싸의 마수에 있는 동안, 혹은 기적적으로 벗어난 이후로도 그들과 관련된 이야기를 절대로 하기 싫었다.

    닥터는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에 큰 어려움을 겪는 나를 능숙하게 리드했다. 이전부터 돌팔이처럼 보이던 사람이 갑자기 전문가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잘 이해합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건 쉽지 않지요. 특히나 잘 모르는 남에게는 더욱 그렇고요. 그럼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시작점을 짚어드릴게요. 저희가 여기에 있는 이유를 알고 계시나요?"

    "수영장에서 정신을 잃었던 것 때문이죠."

    "맞습니다. 그때의 기억들, 감정들을 편하게 말해주세요. 저희 상담 내용은 철저히 비밀로 관리되니까요. 믿으셔도 좋습니다."


    정말 말해도 될까? 그의 상담 제안에 응해서 여기까지 온 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싸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안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직 그들의 마수 안에 있었다. 아무런 걱정 없이 지내고 있기는 하지만 내가 지금 정확히 어떤 상태에 있고, 그들의 작전은 또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거기다 안젤리카는 이 요양원의 단골처럼 보였다. 그런 그녀의 눈과 귀가 과연 요양원에 하나도 없을까? 당장에 눈앞의 이 자칭 전문의도 지난 안젤리카의 휴가 때 열심히 그녀의 발가락을 마사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모두가 의심되기 시작했다. 여기 내 앞의 의사 놈은 과연 정말 나를 치료하기 위해 상담을 하자고 한 것일까? 아니면 내가 모르싸의 비밀을 털어놓는지 아닌지를 구분하기 위한 심판관일까? 내가 그에게 비밀을 털어놓자마자 ‘실수’로 안정제를 죽음에 이를 정도의 과량을 투약해 버리는 의료사고가 발생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밖의 수간호사 쪽인가? 하긴 무슨 요양원의 간호사가 저렇게 생겼어? 당장 모르싸 한 지부의 행동대장으로 뛰고 있을 것 같은 남자가 이런 시골 구석에 있을 이유는 전혀 없어 보였다. 만약 저 덩치가 정말로 그냥 간호사라면 그것은 재능 낭비임이 분명했다. 당장 파리의 뒷골목으로 보내서 검은돈을 축적하는 데에 힘쓰게 만들어야 할 것인데. 거기다 그가 하는 말에 욕설이 하나도 섞여 있지 않고 신사적인 것도 너무 수상해! 개연성이 없는 얼굴과 말투가 한 데 묶여 있었다. 지금 내가 비밀을 발설하는지 안 하는지 알기 위해 상담실의 문에 귀를 바짝 대고 우리의 대화를 엿듣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럼 알렉시스는 안전해? 내가 요양원에 들어간 다음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요양원에 투입된 그녀의 과거를 다 믿을 수 있을까?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만남이 성사된 것이 아닌가? 거기다 그녀는 카타리나를 쏙 빼닮았다. 모르싸는 안젤리카의 대타로 여러 명의 카타리나를 양성하는 비밀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야말로 모르싸의 살수가 아닐까? 모르싸가 키우는 암살자와 고용하는 암살자는 남녀 성별 구분이 없었다. 오히려 암살에는 의심을 적게 받고 미인계를 사용할 수 있는 여자가 유리한 케이스도 있을 것이었다.

    어쩌면 세 명이 모두 한 패일지도 모른다. 끝없는 불신이 시작되었다. 정신병을 고치러 왔다가 정신병을 더 얻어 가는 것 같았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닥터 쿠퍼는 더 추궁하지 않고 가만히 나를 보며 기다려주었다. 내 눈에 그 모습은 갑자기 나를 찾아온 중세의 종교심판관 같은 모습이었다.

    그냥 다 털어놔…

    그가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침묵이 너무 길었다. 뭐라도 말해야 했다. 한순간을 모면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기억이 안 나요."

    "흠, 그때 응급실에서 혈액 트라우마를 언급하셨었는데 그것은 기억나시나요?"

    "아뇨, 그것도 기억 안 나요."


    단호한 내 대답에 닥터는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히 기억이 안 날 리가 없는데 기억이 안 난다고 말을 하는 환자. 이 한 마디로 그는 이미 내 스탠스를 확인한 것 같았다.


    "긴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당장에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장기 투숙하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시간은 많으니까요. 차차 나아질 겁니다."

    "네…"

    "오늘 하루는 비슷한 증세가 없으셨지요?" 

    "네, 그 이후로는 지금까지 쭉 괜찮았어요."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다음 약속은 언제로 잡아드릴까요?"

    "다음 약속은… 한번 생각해 보고 따로 전화로 예약할게요."

    "네, 물론 그러셔도 됩니다. 허나 이대로 묻어두지 마시고 상담을 이어가는 걸 추천해 드립니다. 마음의 병은 곰팡이 같아서 괜찮다 싶은 정도였다가도 순식간에 퍼져나갈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것을 확인했을 때에는 조치가 많이 힘들어질 겁니다."

    "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누워있던 라운저에서 일어나 신발을 신었다. 닥터는 뒤도 안 돌아보고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가서 차트를 정리했다.


    "아, 그런데 아까 밖에 함께 오신 분은 누군가요? 일행이 있었던 것 같던데."

    "수영장의 알렉시스예요."


    그녀의 이름을 말하자 갑자기 닥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이고, 그랬군요! 그럼 같이 들어오시지 그랬어요, 하하하."

    "그, 그래도 되나요?"


    내 반문에 닥터는 몇 초 말이 없더니 답했다.


    "아뇨, 그러면 안 되죠."


    이 돌팔이가 진짜!

    알렉시스를 어떻게 한번 꼬셔보려는 건가? 헉, 아니면 정말로 세 놈들이 다 같은 모르싸의 첩자라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


    "예약은, 생각을 잘해봐야겠네요."


    나는 그의 사무실을 나서며 불신 가득한 목소리로 마무리했다.


    "물론 농담입니다, 하하!"


    뒤늦게 수습하려는 닥터의 목소리가 닫히는 문 사이로 줄어들었다.


    의무실의 대기실로 나오자 리차드와 아까는 안 보였던 다른 의무실 직원이 보였다. 그녀도 간호사인지 리차드와 같은 종류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리차드가 상담실 문을 닫고 나오는 나를 불러 말했다.


    "오늘은 약 처방이 따로 없습니다. 혹시 다음 예약을 지금 잡으시겠습니까? 아니면 닥터와 안에서 다음 상담을 미리 예약하고 나오셨나요?"


    리차드를 지나쳐 바로 의무실을 나가고 싶었지만 상황이 허락하지 않았다. 저 험악한 인간의 말을 무시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물론 여전히 그의 말에는 욕설이 섞여 있지 않았다. 그러나 상담실 안에서 발현된 의심병에 그의 행동이 모두 첩자스러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급히 둘러대며 자리를 빠져나왔다.


    "천천히 생각 좀 해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도망치듯 나오는 나를 그들은 조금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다음부터는 정말로 정신이 아픈 사람으로 여겨질 것 같았다. 설마 이미 내 차트에 ‘정신질환 있음’이라는 표시를 해 놓은 건 아니겠지?


    방으로 돌아오는 내내 주변을 살폈다. 지나가는 직원들, 투숙객들 모두 나를 관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방으로 돌아와서는 혹시나 모를 관찰 카메라를 찾기 위해 방을 구석구석 뒤졌다. 물론 나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일단 안심인가? 하지만 정말 프로 레벨이 작정하고 숨겨놨다면 장비 없이 맨눈으로 카메라를 찾기 힘들 것이다.

    침대에 누워 이마를 감싸 쥐었다.

    이러다 없던 편집증이 생기겠어!

    이번에는 편집증으로 닥터를 다시 찾아가 상담받는 우스운 장면이 그려졌다. 그럴 순 없었다. 나는 아무 음악을 틀고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다. 마침 세계적인 라틴 디바 샤키라의 'Try Everything’이 재생되며 나를 응원해 주었다.


    ‘실패할지라도 도전할 거야. 포기하지 않을 거야. 나는 포기 안 해.’


    지금 상황에 적절한 가사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은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어 꽤 도움이 되었다. 음악 덕분에 곧 헛생각을 떨쳐내 버리고 일상으로 돌아가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불안감은 내 무의식 깊게 자리를 잡았는지 그날 밤에는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닥터 쿠퍼, 리차드, 알렉시스로 구성된 첩자 삼각편대에 둘러싸여 사정없이 압박당하는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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