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지에게 보내는 편지 모음 12
<2002-09-04-수>
아가... 긴 시간 너에게 편지를 못썼구나... 하지만 늘 함께였음은 우리가 알잖아 그지?
이곳에 온 지 어느새 한 달하고도 일주일이나 지났구나.
늘 가슴 구석 너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담아두었는데 막상 이렇게 글로 널 만나려니 어떤 말로 시작을 해야 하는지...
한꺼번에 너무나 많은 말들이 떠오르지만 정리가 되지 않은 채 어지럽구나...
아가... 늘 엄마 가슴에 둥지를 풀고 있는 내 아가야.
눈앞에 빈 정원에 네가 뛰어놀고 있는 것 같아 한번 더 쳐다보게 된다.
잔디를 뒹굴면서 하하 거리는 너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그런데 아가... 정말 네가 저곳에서 놀고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엄마는 얼마나 행복할까...
큰 집도 넓은 정원도 엄마는 한껏 기쁘지가 않구나.
너만 있다면 너만 함께였다면... 어딘들 기쁘고 행복하지 않을까...
아가... 아직도 엄만 눈물 없인 널 떠올릴 수가 없구나...
아빠는 한국에 가셨단다.
기약 있는 이별도 슬프기만 했는데...
너와의 이별을 어떻게 견뎌내었나, 어떻게 견디나...
아가... 보고 싶어...
<2002-09-09-월>
엄마 마음을 너무나 애타게 하는 우리 아가 민지야
어제는 절에 다녀왔단다.
더 이상은 울지 말고 희망을 기도하자고 결심 또 결심했건만 옆 사람이 쳐다볼 정도로 들썩이는 어깨를 진정시킬 수가 없었단다.
엄마는 왜 이렇게 바보인지...
부디 우리 민지와의 새 인연을 허락해 주세요.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단다.
빌고 또 빌면 우리 아가가 다시 엄마 곁으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그런 기적이 꼭 일어날 거라는 믿음이 하루하루 커져 가는구나.
아가...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는 우리 아가...
말없이 문득 엄마 품에 안겨 이 못난 엄마를 숨이 막히도록 기쁘게 해 주려고 기다리고 있는 거니?
그럼 아가...
아빠 마음도 엄마처럼 널 만날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생기도록 해줄래?
엄마에게 "우리 민지를 다시 만나자."라고 말하게 해 줄래?
아가...
눈부신 햇살이 창가에 머물고 있구나.
우리 아가의 미소만큼이나 아름다운 햇빛을 받고 있는 작은 들꽃이 엄마 시선을 붙든다.
'힘내세요 엄마...'라는 너의 목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 같구나.
사랑해 아가.
엄마의 사랑을 꼭 기억해 주렴... 내 아가....
<2002-09-12-금>
민지야. 민지야. 민지야...
부를 때마다 엄마 가슴을 설레게 하는 내 아가야.
오늘은 밝은 인사를 나누고 싶구나.
정원 가득 밝은 햇살이 활짝 웃으며 안녕하듯이...
민지야, 너도 알겠지만 언니는 엄마 아빠 기대 이상으로 잘 지낸단다.
학교 생활도 너무나 즐거워하고 언제나 그랬듯이 자신감과 적극적인 모습을 잃지 않고 있단다.
언어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힘들 수업시간을 저렇게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으니
엄마는 이 모두가 민지의 말 없는 응원이 있어서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구나.
언니에게 엄마에게 이렇게 용기를 주어서 정말 고마워. 아가.
널 그리워하면서도 이렇게 하루하루 힘차게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주어 정말 고마워...
오늘은 언니가 학교에서 발표를 하고 싶다고 했단다.
추억이 담긴 물건을 가져가서 그걸 소개하고, 그 물건에 얽힌 이야길 해주는 거란다.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손을 들어 발표하고 싶다는 언니의 용기 속에 네가 함께 있음을 느꼈단다.
우리 민지 몫까지 언니가 엄마를 기쁘게 해주고 있단다...
어제는 그 추억거리를 찾으려 사진을 뒤적였단다.
함께 보려는 언니를 쫓아냈어.
민지를 보며 함께 울게 될까 봐.
그러면 지금까지 잘 참아내고 있는 언니, 엄마 모두 한 번에 무너질까 봐...
그럴까 봐 언니에게 너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단다.
민지야. 이런 엄마를 용서하렴. 널 지우려는 건 아니야.
이다음... 언니가 좀 더 자라고, 엄마도 웃으며 너의 사진을 바라볼 수 있을 때
그때 함께 널 이야기하며 너의 추억을 새길 거야...
지금은 아직은... 쏟아지는 눈물을 참기 힘드니까...
그런 엄마 모습 보면, 언니도 너무 슬퍼질 테니까.
그러면 아빠도 더욱 보고 싶어 질 테니까...
지금은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아가...
이런 엄마를 이해해 주렴... 널 너무나 사랑하니까... 이럴 수밖에 없어...
민지야.
얼마 전에 언니 발레 하러 갔을 때 어떤 엄마가 5살 난 동생도 함께 데리고 왔더라.
그 꼬마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널 떠올리게 하더구나.
쑥스러워하는 모습, 슬쩍슬쩍 장난하는 모습, 빙긋 웃는 모습.
우리 민지 지금은 많이 컸을 텐데, 엄마는 언제나 5살 우리 민지만 떠올리게 되는구나.
세월이 흘러도 우리 민지는 영원히 아가로 엄마 곁에 있겠지...
훌쩍 자란 너의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아. 그게 좋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해...
이만큼 컸을 텐데... 이만큼 컸을 텐데...
아가...
영원한 내 아가...
웃는 모습이 너무나 예뻤던 내 아가...
보고 싶다...
우리 아가도 피아노도 하고 발레도 하고 학교도 다닐 수 있다면...
밝은 인사를 하자면서 또 이렇게 눈물 자국 보이고 말았네.
어쩌면 좋으니 이 못난 엄마를...
사랑해... 민지야...
언제나 우릴 지켜보고 있지?
늘 그렇게 엄마 곁에 있어주렴...
<2002-09-17-화 >
민지야 어제 엄마가 담근 김치를 꺼냈단다.
부끄럽지만 엄마가 이 나이가 되도록 김치란 걸 처음 담갔다는 거 아니니 ^^
항상 할머니나 외할머니께서 부족함이 없도록 냉장고를 채워주셨으니.
그래서 이렇게 김치를 담가야 할 날이 오리란 건 생각도 못했었어.
무를 채칼로 썰고 양파와 파를 다듬어 썰고
고춧가루와 젓갈의 비율을 맞추려고 인터넷에서 뽑아 놓은 레시피를 몇 번씩 확인하고 연필로 계산해 가면서 계량컵으로 조심조심 젓갈을 붓고
한 치의 오차도 있으면 큰일 나는 것처럼 뽑아놓은 레시피가 고추물이 들도록 만지작 거리며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그렇게 만든 첫 작품을 밤새 내놓은 정원 구석에 햇볕이 든다는 걸 까맣게 잊은 채 두었다가
뜨겁게 달구어진 김치통을 몇 번이고 열어보면서 엄마의 건망증에 혀를 둘렀었지.
비율을 맞춘다고 계량컵까지 동원한 김치이건만 왠지 젓갈 냄새가 너무 많이 나는 것 같더라.
영 못 먹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면서 냉장고에 넣어두었었어.
그 김치를 드디어 어제 첫 시식을 했단다. 궁금하지? ^^
음... 깍두기는 그런대로 괜찮은데 말이야...
포기김치는 좀 아닌 것 같다 ^^
걱정했던 젓갈 냄새는 그렇게 많이 나지 않는데 맛이 뭔가 빠진 듯해.
어제 겨리네 조금 가져다 드렸는데 겨리 엄마 말씀이 김치가 덜 절여져서 약간 싱거운 거란다 ^^
절이는 것도 계량컵으로 레시피에 나온 그대로 했건만.
역시... 김치 담그는 것은 계량컵보다는 경력이 더 필요한 듯하구나.
할머니들께서는 쓰윽쓱 대충 하시는 것 같지만 그 김치 맛은 얼마나 좋으니.
그래도 첫 작품치곤 아주 잘했다고 그 겨리 엄마가 그러시더라 ^^
한 번 두 번 엄마도 경력이 쌓이면 더 이상 김치 담그는 일이 이렇게 특별한 얘깃거리도 안 되겠지?
언니는 엄마가 담근 김치라고
매워서 물을 평상시보다 두 배는 마시면서도 먹어주더라.
우리 민지도 그랬을 텐데... 그지?
"이거 엄마가 했어?" 하면서..."매워"... 하면서...
"난 깍두기도 먹어~" 하며 느닷없이 으쓱거리면서 자랑하던 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구나.
그것이 너에게는 언니가 된다는 의미였지. 더 이상 나는 아가가 아니라는.
하지만 민지는 이제 엄마의 영원한 아가인 것을...
아가...
웃는 모습이 너무나 예뻤던 아가야. 오늘은 진짜 진짜 웃으면서 안녕할게.
사랑해...
우리 민지를 엄마는 아주 많이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