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향단 May 05. 2024

누구를 위해서 그래야 하는데

 민지에게 보내는 편지 모음 13

<2002-11-05-화> 


아가...
얼마 전 할로윈데이였단다.
그날 우리 민지 또래의 아가들이 예쁘고 귀여운 복장을 하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엄마는 너 생각이 나서 속으로 많이 울었단다.
우리 민지에게도 저렇게 귀여운 옷을 입힐 수 있었다면...

그리고 함께 손을 잡고 즐겁게 이 날을 즐길 수 있었다면 얼마나 기뻤을까.
모두들 우리 민지 이쁘다고 칭찬하고 쳐다봤을 텐데...
한 가지 한 가지... 시간이 갈수록 네가 경험하지 못했던 일들이 안타깝고 미안하기만 하구나.
아가... 너와의 인연이 이렇게 짧은 것이 지금 우리의 운명이었다면

훗날 다시 만났을 땐 영원히 함께할 수 있는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믿는다.
아가...
언제나 엄마의 사랑하는 아가.
영원히 사랑한다...



<2002-11-06-수> 


민지야 지금 엄마가 좀 속상해
아빠랑 엄마가 열심히 **언니네 홈피를 만들었는데 지금 잘 안되고 있어.
아빠가 열심히 이것저것 만지면서 고치고 있는데
정작 **아빠는 이것이 힘든 작업이란 걸 알까 하는 생각이 드니까 화도 나.
괜히 시작해서 아빠만 힘들게 만들었다 싶고.
휴... 엄마 자신한테 화가 나는 거야.
받는 사람은 아쉬운 거만 생각하는 것 같고.
정말 고마운 생각은 하는 걸까 싶기도 하고.
괜히 아빠만 불쌍하게 생각되고.
왜 이렇게 아이처럼 마음이 좁은 건지 모르겠구나.
민지야 엄마 너무 우습지?
그래도 흉보지 말어. 이제부터 우리 민지에게 투정도 막 할 거니까.
민지가 다 들어줘야 하는 거야 ^^
아가...
사랑하는 아가...
안녕...



<2002-11-10-일> 


아래글 아빠가 아직 안 보셨나 봐.
우리 민지 서운하겠다. 하지만 아빠도 언제나 우리 아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건 알지?
오늘 절에 다녀왔다. 후불탱화라고... 부처님 상 뒤에 그리는 그림을 후불탱화라고 한대.
그걸 3년 만에 동안스님께서 그리셨다는구나. 오늘 그 기념예불을 드렸단다.

아가.
어떤 법회든 어떤 기념이든... 그건 아직 엄마에겐 상관없는 것처럼 생각된다.
법당에서 두 손 모으고 있으면 오직 너 생각에 눈물만 날 뿐...
제발 다시 만날 기회를 한 번만 허락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지만 그걸 들어주실까...
엄마의 기도가 너무 부족해서 부처님께서 들어주실까 불안하기만 하구나.
우리 민지를 생전에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을 없을 텐데...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신다면 무엇인들 못하겠니.

아가...
널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정말 너무 보고 싶어...

곧 생일도 다가오고 네가 떠난 날도 다가오는데... 그날들을 어찌 보낼지...

아가... 사랑하는 민지야. 엄마 보고 싶지 않니?
엄마는 민지가 이렇게 보고 싶은데...
민지야. 보고 싶은 우리 아가야...



<2002-11-12-화> 누구를 위해서 그래야 하는 건데


언니 꿈속에 왔었다고?
까만 망토와 빨간 치마를 입고 통통한 볼에 여전히 장난기 많은 웃음으로 하하 웃었다고?
지독히 무서운 꿈이었다지만 그래도 민지를 만났으니 엄마는 참 부럽다고 그랬어.
언니가 널 꿈에서 만난 후 동생을 갖고 싶다고 그러더라.
언니 꿈속에 왔을 즈음 어쩌면 엄마도 널 만난 것 같지만 전혀 기억이 없구나.
언니는 너의 옷차림까지도 저렇게 정확히 기억해 내는데 말이야.

아가
요즘은 부쩍 네가 더욱 보고 싶어. 그립고...
그래서 좀 울었더니 할머니가 힘들어한다.
마음대로 울지도 못하는 지금 시간들이 너무 싫다.
어서 가셨으면 좋겠어.
엄마 마음만큼 널 그리워하고 가슴 아파해주시길 바라진 않지만

널 그리워하며 눈물짓는 엄마 모습 보면서 함께 화를 내는 할머니가 너무 밉다. 지금은...
이것만큼 밖에 서로의 감정을 나타내지 못하는 이 상황도 싫고.
정말 이젠 그만 가셨으면 좋겠어.
온전히 엄마 혼자 널 맘껏 그리워하고, 맘껏 울고, 맘껏 울적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기분 좋게 웃어주지 못하니까 그런 엄마를 눈치 보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신경 써야 하는 것이 너무 힘들고 싫구나...

왜 모두들 네가 떠난 지 몇 년이나 흐른 것처럼 생각하는 걸까.
이제 겨우 1년이 돼 가는데 말이야.
이 상황에서 엄마가 어떻게 해야 옳은 거니.
널 다 잊었다고 헤헤거리며 즐겁게 살아야 하니.
누구를 위해서 그래야 하는 건데.
엄마 마음 하나 추스리기도 힘든데 왜 할머니 할아버지 마음까지 헤아리며 살아야 하는데. 왜!
정말 화가 나... 엄마가 너무 화가 나...
민지야. 이런 엄마가 잘못인 거니?
정말 모두가 밉고 싫다.
엄마 혼자 그냥 내버려 두면 좋겠어...

아가...
널 그리워하며 엉엉 소리 내 울어도 되는 거 아니니?
아가... 보고 싶은 아가... 뭐가 잘못된 거니...



<2002-11-13-수> 아빠가 쓴 편지


두렵고 슬프고...
아빤 글을 쓴다는 자체가 정말 두렵고 슬프고 어렵다...

언제나 아빠~ 하면 우후~ 하고 외치던 소리가 귓전에 계속 들린다.
차를 혼자 타고 가다 보면 아빠딸 민지가 뒤에서 숨곤 했는데...

아빤 정말 여기에 글쓰기가 싫어...
아빤 항상 우리 민지를 생각하지만 글을 쓰기란 아빠맘이 너무 힘들어서...

엄마가 저리 슬퍼하고 생각하고 하는 걸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난 민지엄마가 감정을 잘 다스리고 잘살았으면 하는데...
말도 잘 못하는 아빠가 어찌 설명을 할 수가 없구나...

우리 민지는 이제 아빠보다도 훨씬 똑똑하고 현명한 천사가 됐는데...
그래도 아빠는 우리 민지가 보고 싶네...
민지야 엄마가 힘을 좀 내게 네가 기운을 좀 부어주렴...

아빤 힘들어하는 엄말 보면 아빤 넘 더 힘이 든단다.
엄마는 울기라도 하고 하지만 아빠는 참아야 하는데...

곁에 없지만 내 속에 항상 우리 민지가 있다는 걸 생각하며 아빠는 오늘도 하루를 보낸다.



<2002-11-14-목> 돌아서면 다 털어내고... 더 힘들어하면 안 되는데


민지야.
엄마가 자꾸만 민지 때문에 힘들어하고, 그래서 주위 사람들을 또 힘들게 하면

우리 민지가 나쁘다고 할까 봐 문득 겁이 나...
그래서 이젠 정말 엄마 가슴으로만 슬퍼해야겠다고 밤새 다짐하고 또 다짐했단다.


착한 우리 아가,

천사가 되어서도 엄마 아빠에게 좋은 일만 생기도록 도와준다고,

그러니 역시 착한 민지라고,,,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게 해야 한다고 다짐했어.

못난 엄마 때문에 우리 아가가 나쁜 소리 듣는 건 정말 참을 수 없단다.
엄마 이제 정말 많이 노력할게.
보고 싶으면 이곳에서 슬픔을 토해놓고, 돌아서면 다 털어내고...

그래서 주위 사람들 전혀 눈치 못 채도록 노력할게.
이런 엄마 모습을 민지도 바라지?


아가...
아빠가 힘들게 너에게 편지를 쓴 걸 보니 가슴이 너무 아파...
아빠 말처럼 아빠는 울지도 못하는데 얼마나 가슴 저리면서 너와 이야길 했을까 생각하니까 너무너무 가슴 아파... 못난 엄마 때문에 아빠가 더 힘들어하면 안 되는데...


민지야.
항상 엄마 곁에 있는 아가야...
엄마 힘내게 도와주렴...



<2002-11-16-일> 평화롭게 가슴에 담고 살아가자는 의미일 거야


민지야 할머니께서 100일 기도를 시작하셨다는구나.
이걸 마지막으로 널 완전히 떠나보내라고 하시네.
그래야 하니? 그래야 너도 정말 좋은 곳에서 행복할 수 있는 거니?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할머니도 역시 널 완전히 잊을 수 없다는 걸 엄마는 안다.
그건 널 잊으려는 노력이 아니고 평화롭게 가슴에 담고 살아가자는 의미일 거야.
자꾸만 자꾸만 억울한 생각이 떠나지 않지만 어떻게 하겠니 이제...
운명이라니, 운명으로 접을 수밖에...

민지야
정말 좋은 곳에서 아주 행복하게 잘 있다는 걸 엄마에게 보여주지 않을래?
그걸 보고 나면 엄마도 웃으면서 널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오늘 밤 널 만나고 싶구나...  



이전 17화 평화롭게 가슴에 담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