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끝낼 수 없는 이야기를 끝내면서
브런치에 방 하나 얻은 후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것이 민지와 관련된 글들을 한 곳에 모으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읽게 될는지 알 수는 없지만 혹시라도 그런 날이 온다면 쉽게 찾아 읽을 수 있도록 정리하고 싶었다. 일단은 민지를 보낸 후에 썼던 글들만 모아서 브런치 북으로 묶었다. 민지가 아프기 전에 썼던 육아 일기는 어떻게 해야 할지 좀 더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다.
믿을 수 없는 아이의 죽음 앞에서 매일 슬픔의 무덤 속으로 가라앉고 있던 나는 글을 쓰면서 애도기간을 보냈던 것 같다. 아이가 편안히 잠들었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도, 갑자기 떠나야 했던 아이가 불쌍하고 억울해서 큰소리로 엉엉 울면서도, 나는 뭐라도 쓰고 싶었다.
머릿속에 맴도는 수많은 말들을 문장으로 나열하지 않으면 슬픔이 엉켜서 나를 더 숨 막히게 할 것 같았다. 그런 나를 숨 쉬게 한 것이 글쓰기였고, 슬퍼하는 나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힘들까 봐 속으로 눈물을 삼키면서 깊은 우울감에 빠져 들던 나를 세상으로 꺼내준 것도 글쓰기였다.
밑도 끝도 없이 반복되는 그리움의 단어를 매일밤 두 손으로 토해내면서 상실의 슬픔과 마주할 수 있었고, 혹시라도 나 때문에 분위기가 어색해질까 봐 억지웃음을 보일 필요도 없이 슬픔, 원망, 아쉬움, 자책감과 후회, 그리움을 후련하게 두들기고 나면 다음날 또 하루를 살아갈 수 있었다.
키보드에 의지하며 보낸 날들이 쌓이면서 아이가 떠났음을 서서히 인정할 수 있었고 남은 사람들을 위해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랬다. 그때 나의 글은 눈물이었다. 나는 글로 마음껏 울면서 나만의 애도기간을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민지를 떠올릴 때마다 여전히 가슴 한편이 저릿해진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고 슬픔과 그리움이 옅어지지는 않는다. 솟구치는 그 감정을 내 안에서 누르는 것에 익숙해졌을 뿐이다. '겉으로는 웃고 속으로는 운다'는 표현이 딱 맞다.
민지의 스물두 번째 기일이 지났고 아이들은 서른 살 그리고 스무 살이 되었다. 내가 다시 힘을 내야 할 이유였고, 살면서 행복이라는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게 해 준 아이들이다. 하지만 마음 한 편에는 늘 민지가 있고 행복을 느낄 때마다 슬픔도 느낀다. 그러니까 나에게 행복은 곧 슬픔이다. 행복과 슬픔을 동시에 느끼는 심장으로 평생 살아가는 것이 내 운명이고 아이를 가슴에 묻은 엄마의 의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브런치에 글을 옮기면서 그날들을 글로 남겨두길 잘했다는 생각을 또 한다. 그때의 감정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순간들을 읽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덕분에 민지를 다시 또렷하게 기억해 낼 수 있게 되어 감사하고, 자책감을 가슴 한편에 짊어지고 살아왔던 젊은 날의 나를 연민하게 되어 더 이상 나를 미워하지는 않을 것 같아 다행이다.
서나, 후나 먼저 떠난 너의 동생과 누나를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남긴다.
늘 기억해 주렴 참 예쁜 동생이 있었음을, 그리고 누나 덕분에 후니가 있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