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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단 May 05. 2024

단죄의 화살이었을까

민지에게 보내는 편지 모음 4

<2002-03-27-수> 
 

엄마 궁디, 아빠 궁디... 우리 궁딩아......

아파트 앞 화단에 목련과 벚꽃이 활짝 피었단다. 우리 민지가 그걸 보면 좋아라 하면서 따달라고 했을 텐데.....
이렇게 봄이 왔단다. 엄마는 아직 민지가 편안한 모습으로 미소를 띤 채 떠난 그날을 살고 있는데 시간은 이렇게 소리 없이 무심히 흐르고 있구나.

우리 민지가 좋아했던 어린이집에 한 번은 가야 할 텐데 용기가 안나. 민지야~ 하고 부르면 달려 나올 것 같은 그곳에 가는 것이 아직 겁이 나...

이미 다른 아이의 신발이 놓여 있을 너의 자리를 봐야 하는 것도, 널 좋아하던 친구들을 봐야 하는 것도 모두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어떡하니......

하지만 한 번은 꼭 가야 할 텐데...

우리 민지 마지막 가는 길 배웅해 주신 선생님들께 인사도 해야 하고, 우리 민지 좋은 곳으로 가라고 빌어 주신 엄마들에게 고마움도 전해 달라고 말씀드려야 하고...

무엇보다 우리 민지를 영원히 잊지 않을 작은 선물도 해야 하는데... 그 선물을 꼭 하고 싶은데 아직 갈 용기가 안 나는구나...

아빠도 같은 마음이실 거야. 그래서 엄마 아빠는 누가 먼저 다녀오자는 말을 꺼내주길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라.

조금 더 있다가 가도 되겠지? 그래도 우리 민지 잊지 않고 계실 테니까?

그래, 민지야. 엄마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다녀올게. 그때 우리 민지도 엄마랑 함께 가자꾸나.

민지야. 오늘 친할머니가 전화를 하셨어. 며칠 만의 통화인지... 순간 엄마는 모든 서운함이 사라졌단다.

그리고 먼저 말을 걸어 주신 친할머니께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들었어. 이제 엄마 마음이 좀 놓이는구나.

그동안 친할머니께서 엄마에게 노여움을 가지고 계실 거란 생각에 힘들었거든... 참 다행이야 그지?

봄 햇살을 맞으니 우리 민지 생각이 더 많이 난다. 따뜻한 햇살을 온몸에 맞으며 함께 바깥놀이를 하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지난겨울보다 조금 더 컸을 텐데... 그래서 자전거도 더 잘 탈 수도 있을 텐데...

민지야 잘 자... 그리고 내일 또 만나.....

사랑해 우리 아가야.....



<2002-03-31-일> 우리 민지 어디선들 사랑받지 않겠니


민지야 오늘 친할머니랑 한증막에 다녀왔단다. 이제 언니랑 캐나다로 가기로 한 걸 완전히 승낙하신 거야. 서운한 마음이야 어떻게 사라지시겠냐 만은 그래도 일단은 우리의 선택을 지켜봐 주시기로 하셨단다. 그래서 오늘은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할머니랑 이야길 나눌 수 있었어. 잠시나마 할머니께 서운한 마음 가졌던 것이 죄송하기만 했단다.

그래, 아직 엄마는 친할머니, 외할머니 두 분의 마음 백분의 일도 못 따라갈 거야. 항상 내가 옳다고 생각하지만 돌아보면 늘 그분들이 더욱 현명하셨지. 이번에도 틀리지 않았구나. 언제쯤이면 엄마가 완전히 철이 들까...

항상 그랬듯이 할머니랑 이야길 하면 엄마는 많이 위로가 된단다. 내 앞에 벌어진 일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지혜롭게 이겨 나가는 방법을 말씀해 주시지.

오늘도 우리 민지가 하늘나라 어느 곳에서 편안히 잘 있을 거라고 하시면서 너무 그리워하지 말자고 하시더라.

꿈속에서라도 만났으면 좋으련만 엄마 꿈에도 할머니 꿈에도 오지 않는 넌 그곳에서 너무나 신나게 지내느라 우리 모두를 다 잊고 지내는 거라고... 그래서 우리 꿈속에 조차 나타나지 않는 거라고...

그래, 어디선들 사랑받지 않겠느냐고... 부처님 사랑 듬뿍 받으면서 신나게 지내고 있을 거라고....

그래, 엄마도 그렇게 생각할게. 우리 민지 정말 너무 신나게 지내고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 다 잊고 있는 거라고... 민지는 지금 참 행복할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엄마도 슬픈 마음 조금씩 추슬러 볼게...

사랑해 민지야.
문득문득 네가 곁에 없음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지만, 더 좋은 곳에서 더 좋은 사람들과 더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엄마 마음 다스려볼게...

민지야.........

그래도 그래도 네가 보고 싶은 건 어쩔 수가 없구나...



<2002-04-03-수> 단죄의 화살이었을까
 

민지야 오늘은 무엇을 하면서 놀았니?
그곳 날씨는 언제나 따뜻하겠지?
민지가 좋아하는 비도 가끔 오니?
우리 아파트 화단에 핀 목련이 어느새 시들어가고 있구나.
요즘 낮 온도는 초여름처럼 후덥지근하단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언니는 항상 "더워. 더워" 하며 호들갑이지. 알지? 언니는 참을성이 없다는 거.
우리 민지는 참기도 잘했는데... 그래서 그렇게 아파 숨이 차던 마지막까지도 "네..."하고 이쁘게 대답했었는데... 그래서 엄마 가슴이 더 아팠었지...

엄마가 오늘 읽은 책에 이런 구절이 있었단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외면할 때, 어쩌면 우리의 불행이 시작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민지가 그렇게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엄마의 이기적인 삶 때문이었을까?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만 있었지 선뜻 도움을 준 적이 없었으니...

그래서 우리 민지가 엄마에게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알려 주기 위해 그렇게 간 것일까...

또 이런 구절도 있었단다.
<착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아픔 속으로 기적은 기어이 다가온다. 그리고 사악한 이들의 마음속으로 단죄의 화살은 날아가 박힌다.

기적이나 단죄의 화살은 우연처럼 보이지만,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관여하는 하늘의 섭리인 것이다>

민지야 엄마는 착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

하지만 사악하지는 않은데...

착하지는 못했다고 해도 절대 사악하지는 않았는데 엄마에게 쏘아진 단죄의 화살은 너무나 잔인하구나.

하지만 이것이 정말 하늘의 섭리라면 받아들여야겠지. 그리고 다시 살아야지. 하늘이 버리지 않을 그런 삶을...
그러면 엄마에게도 기적의 화살이 날아오겠지?

우리 민지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기적...

반드시 그런 기적을 받을 수 있도록 엄마 더욱 착하게 살게.

약속할게. 내가 아닌 모두를 위한 삶을 살면서 우리 민지 다시 만날 수 있는 기적이 꼭 나타나도록 할게.

민지야 그날까지 엄마 잊지 말고 꼭 기다려 주어야 해 알았지?
사랑해 민지야...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저물었구나.



<2002-04-04-목> 추억은 남겨주렴


어제부터 아빠는 퇴근 후 영어 학원에 가신단다. **시내에 있는 어학원이야. 토요일엔 강남에 있는 학원에 다니시고. 지금 아빠는 우리 가족의 다른 삶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단다.
4에서 3으로 바뀐 것 말고는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오늘 저녁 아빠 학원 근처에 가서 저녁을 먹고 왔어. 수업 끝날 시간이 한 10분 정도 남아서 언니랑 서점에 갔었어. 분명히 우리 민지와 한 번쯤은 이곳에 왔었을 텐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생각이 나지 않는 거야.

덜컹 겁이 났어. 시간이 흐르고 흘러, 10년, 20년 후에 우리 예쁜 민지와의 추억이 모두 사라져 버리면 어쩌나. 지금처럼 아무리 기억하려고 애써도 머릿속은 텅 빈 백지처럼 아무 그림도 그려지지 않으면 어쩌나...

민지야,
언제나 엄마 가슴에, 엄마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거라고 약속해 줘.
엄마가 민지 곁에 갈 때까지, 변함없이 지금 그대로 엄마 기억 속에서 도망가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제발 우리 민지와 함께 했던 행복한 추억만큼은 가져가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그래줄 거지? 착한 우리 아가야 그래줄 거지?...



 <2002-04-05-금> 


민지야 오늘은 식목일이란다. 나무를 심는 날이라는 뜻이야. 하지만 우리는 오늘 나무 대신 여러 가지 씨앗을 뿌리고 왔단다.
친할아버지께서 얼마 전에 주말 농장을 분양받으셨거든. 그래서 오늘 온 가족이 그곳에 간 거야. 작은 고모네 가족이랑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언니, 아빠.

우리들 밭은 고속도로가 바로 보이는 제일 구석진 곳이었어. 고속도로 건너로 보이는 산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무를 심고 있더구나. 분양받은 땅의 상태는 썩 좋지 않았지만, 위치는 모두의 마음에 들었단다. 가까이에 햇빛을 피해 쉴 수 있는 곳도 있어서, 다음엔 거기서 고기를 구워 먹기로 했단다.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많이 좋아하셨어. 밭 가꾸는 거,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거... 이런 걸 무척 좋아하시잖아.

할아버지와 고모부는 능숙한 솜씨로 밭을 갈으셨고, 아빠는 여전히 요령보다는 힘이 먼저. 밭일이 서툰 고모와 엄마는 그저 돌과 잡초를 골라내고, 우리의 주말 농장 대장님이신 할머니는 씨앗을 뿌리시고. 마지막으로 밭 주변에 말뚝을 박은 후 흰 줄을 돌린 사각땅 모퉁이에 할아버지 성함이 적힌 팻말을 꽂으면서 우리들의 밭 만들기는 끝이 났단다.

비료를 섞으며 밭을 갈고, 돌과 잡초를 골라내고, 밭고랑 이랑을 만든 후 씨앗을 뿌리는 과정이 쉽지는 않더라. 적어도 엄마에겐. 난생처음 밭 일을 해 본 엄마는 오늘 별로 쓸모가 없었지. ^^
하지만 할머니랑 이야길 하면서 밭을 일굴 때 느꼈던 정다운 감정은 큰 수확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아. 그냥 일상에서의 대화와는 다른 느낌이었단다.

언니랑 현정이는 종이컵에 씨앗을 심는다고 분주하게 뛰어다니더니 집으로 돌아올 때 그 종이컵 속에는 씨앗 대신 진달래 꽃이 가득 꽂혀 있더라. ^^

초 여름의 한 낮처럼 뜨거운 봄 볕 아래서도,

문득문득 온몸에 소름이 끼치고 가슴이 차가워지는 건...
엄마뿐이겠니. 모두들 서로가 말로 확인을 안 했을 뿐 민지 생각을 참 많이 했을 거야. 언니와 현정이가 놀고 있는 저 모습 가운데에 우리 민지가 있어야 하는데... 그럴 수 있었다면 오늘은 정말 즐거운 하루가 되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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