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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단 May 05. 2024

셋이 함께 가려고 했는데

민지에게 보내는 편지 모음 3

<2002-03-12-화> 
 

민지야........

냉동실에 놓여 있는 네가 먹다 만 초콜릿이 오늘 또 엄마를 울리는구나.

"그거 민지가 아플 때 먹다가 넣어 둔 거야"라고 언니가 말해 주어서 알았단다. 너의 이빨 자국이 남아 있는 그것을 보자, 마치 우리 민지가 곧 돌아와, 가장 좋아하던 그 초콜릿을 뺏었으며 "내 거야." 할 것 같았어... 그래,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금세 우울해지는 엄마 얼굴을 살피며 "또 울어?" 하는 언니 때문에 차마 눈물을 삼켜야 했지만 엄마 가슴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심하게 울부짖고 있었단다.

우리 가여운 아가, 그때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렇게 좋아하는 초콜릿도 다 못 먹고 남겼을까. 세상에 이 못난 엄마는 그걸 이제야 알았다니... 미안해, 정말 미안해 민지야......

"목요일에 이것도 가져가자..." 하는 말에 언니는 "왜?" 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어. 하지만 속마음은 그것이 아니었는지 엄마 곁에 살며시 오더니

"엄마, 난 저걸 보면 정말 민지가 내 마음속에 살아 있는 것 같아. 왜냐면 민지가 먹다가 남긴 것이니까..." 라면서 자뭇 즐겁게 말을 건네더구나.

그래, 언니는 그것을 계속 냉동실에 넣어두고 싶은 거란다. 가끔 그것을 보면서 너의 숨결을 느끼고 싶은 거야.

엄마도 그대로 두고 싶어. 엄마도 가끔 그것을 손에 얹고 너의 작은 이빨 자국에 뽀뽀해 주고 싶어... 하지만......


아가... 오늘도 수없이 불러 보았지만 여전히 넌 대답이 없구나...

민지야...
보고 싶은 내아가.
사랑해 사랑해 민지야...........
아가.....................

보고 싶은 내 아가... 사랑해...... 사랑해..................



<2002-03-24-일> 널 잊어야 한다는 말이 너무 냉정하게 들린다
 

민지야 가엾은 우리 아가야.
오늘은 유난히 우리 민지가 가여워 엄마 가슴이 미어지는구나...

할아버지, 할머니... 아니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널 잊으라고 너무나 냉정히 이야길 하는구나. 아니, 이미 그들은 널 잊어버린 듯, 연연하는 엄마와 아빠를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차는구나... 이렇게 야속하고 서운할 수가 없단다. 어른들 눈에는 이 엄마 아빠가 한심하게 보이실지 모르지만 아직 엄마는 널 그렇게 쉽게 잊을 수 없어.

그들 사이에서 너의 흔적이 이제 부담으로 느껴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순간 우리 민지가 가여워서 엄마 가슴은 또 찢어지고 있었단다.

아가, 너의 재롱에 그렇게 기뻐하시던 분들이 이제 이렇게 냉정히 너에게 등을 돌리시는구나.

우리 아가 가여운 아가야...

언제까지나 이 엄마 아빠는 널 잊지 않을 거니까 너무 슬퍼하지 말아라. 응?

휴... 요즘 들어 엄마가 더 많이 울게 되는구나. 미안해 정말... 여러 가지로 너무나 미안해서 엄마가 널 부를 용기도 없단다...



 <2002-03-25-월> 
 

민지야. 오늘 아침에 엄마 외출 했었어. 아주 오랜만에 아침공기를 마시며 걷는 기분이 조금은 상쾌했단다. 이틀 동안 몇 시간을 잤더라? 조금 어지럽기는 했지만 방금 내린 모카향 원두커피 몇 모금이 엄마에겐 뽀빠이의 시금치가 되어 주었단다. '우리 민지, 뽀빠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갔구나. 알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것이 이것뿐이겠니. 가여운 내 아가...'

음... 민지야 오늘 외출한 건 말이야. 언니의 유학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기 위해서였어.

그래, 민지야 이렇게 엄마와 언니는 떠나기로 했단다. 우리 민지와 함께 가기로 했던 그곳에 이제 언니와 엄마 단 둘이 가게 되었구나. 우리 아가도 그곳에서 행복하게 자라게 하고 싶었는데... 이제 영원히 이룰 수 없는 소망이 되었구나. 세상에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니 아가야............

다만 언제나 엄마와 언니의 가슴속에서 살아 숨 쉴 너 이기에 어느 곳에 가더라도 항상 함께라는 생각으로 이 슬픔을 이겨내려고 한단다.

아가... 맞지? 민지는 항상 엄마와 함께 있을 거지?...

요즘 캐나다로 가는 문제 때문에 할머니, 할아버지 마음이 많이 상하셨단다. 그래서 엄마 마음도 많이 불편하지만 그것보다 더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그깟 캐나다행이 우리 민지의 빈자리 보다 더 두 분을 우울하게 한다는 거야. 우리 민지가 떠난 것보다 더 크게 두 분을 흔들고 있다는 거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우리야 언제든지 볼 수가 있을 텐데, 언제든지 들을 수 있을 텐데, 어떻게 네가 떠난 그 사실보다 더 슬퍼하실 수가 있냐 말이다.

엄마는 이것이 참을 수 없이 속상하고 야속하고 마음이 아프단다. 벌써 우리 민지를 다 잊으신 것 같아서. 벌써 너의 빈자리를 채워 버리신 것 같아서...

그래서 우리 민지가 너무 가여워서, 벌써 잊히는 우리 민지가 너무 가여워서 엄마는 요즘 눈물이 더 많이 나와............................


아가... 너무나 사랑하는 내 아가...

조금만 더 있었으면 안 되었니? 그렇게 갈 것이었다면 조금만이라도 미리 알려주지 그랬니... 널 많이 안아 주지 못한 것이 얼마나 가슴속에 한으로 남아 있는지... 엄마 마음 알아?

민지야..........

이제 엄만 소리 없이 잘 운단다. 벌써 선수가 되었어. 눈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흐르지만 입 밖으론 신음소리 하나 안 들린다. 아빠랑 언니 몰래몰래 울어야 하기 때문에 엄마는 벌써 소리 없이 우는 선수가 되었어. 그래서 언니가 스케이트를 타는 걸 보면서도 입은 웃고, 눈물은 볼을 타고 내려가고 그런단다... 엄마 웃기지?...

할머니가 엄마에게 전화하시는 것도 끊으셨단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받아들이고 마음도 정리가 되겠지만 그때까지 엄마의 서운한 마음은 가시지 않을 것 같구나...



<2002-03-26-화> 
 

민지야 오늘 네가 있는 그곳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니? 날씨는 따뜻했어? 그곳에도 봄이 왔니?

너와 함께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우리 민지처럼 티 없이 맑은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겠지? 그러니까 모두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겠지? 그래서 우리 민지 하나도 안 외롭고, 안 슬프겠지? 그곳에서도 사랑 많이 받고 있는 거지? 예쁜 우리 아가 씩씩하게 잘 있는 거지?

제발...............................

엄마 꿈속에 한 번만 와주렴.
잘 있다고, 엄마와 함께 했던 날들보다 더 행복하다고, 그리고 엄마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해주렴...

보고 싶은 내 아가...

TV 드라마를 봤어.
민지처럼 떠난 사람들이 이곳과 다름없이 살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었단다. 어린아이들이 예쁜 선생님과 함께 공부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공놀이도 하고...

엄마는 그 속에 너도 있다는 착각으로 화면을 뚫어져라 보고 또 보았단다. 눈에 익은 배우들만이 엄마 눈을 어지럽혔지만, 어쩌면 우리 민지도 저렇게 즐겁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단다.
그래, 또 다른 세상에서 더 행복한 모습으로 엄마를 기다리며 씩씩하게 살고 있을 거야. 엄마랑 아빠랑 다시 만날 그날을 기다리며...

오늘 엄마는 미용 학원에 갔었어.
언니가 태어난 지 백일 되던 날, 엄마는 다시 일을 하고 싶었어. 하지만 그동안 해오던 학원 강사는 밤 12시가 되어야 끝나니까 주부로서는 계속하기가 힘든 일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다른 것을 찾았지. 그런데 문득 미용이 떠오르는 거야. 그 일은 아이를 키우고 주부 역할을 하면서도 충분히 해낼 수 있겠다 싶었지. 그리고 나이가 들어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

친할머니께서는 좋아하지 않으셨어. 여러 가지 이유로 완강히 반대하셨지만 엄마는 결국 허락을 받아내고 바로 학원을 찾아갔었지. 그날 이후 언니는 극성스러운 엄마 덕에 아침이면 가까운 아파트의 한 아줌마 품에 안겨야 했단다.

그렇게 시작한 미용 일은 우리 민지가 엄마 속으로 찾아온 날, 그만두어야 했어. 심한 입덧으로 서있는 것조차 힘들었으니까.

그리고 예쁜 민지는 태어났고, 여전히 미용 일을 싫어하시는 친할머니 마음을 무시할 수가 없었기에 이제 미용은 완전히 접기로 했지. 하지만 엄마는 여전히 일이 하고 싶어서 다시 학원 강사가 되었어.

다행히 친할머니께서 강사 일은 인정해 주셔서 우리 가족이 시드니로 가기 전까지 엄마는 일을 계속할 수 있었지. 엄마가 미용일 할 때는 한 번도 우리 며느리가 일을 한다고 생각해 주신 적이 없었는데 강사 일을 할 때는 며느리가 일을 한다고 많이 배려해 주셨단다. 가끔 어른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며느리 이야기가 나오면 "우리 며느리가 학원 강사를 하느라 바쁘고 힘들잖아요" 하면서 당당히 사회인으로 인정해주시기도 했지. 엄마는 할머니 마음을 알기에 그냥 웃었단다...

우리 아가들은 극성스러운 이 엄마 때문에 돌봐주시는 아줌마들 품에서 더 많이 잠들었지. 미안해 민지야, 엄마가 정말 후회스럽기만 하구나. 너와의 시간이 이렇게 짧을 줄 알았다면 절대 남의 손에 맡기지는 않았을 거야. 절대...

호주에서 돌아온 후 언니는 초등학생이 되었고 우리 민지는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지. 그리고 엄마는 너희가 엄마 손이 더 이상 필요 없을 때까지는 아무 일도 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그제야 너희는 아줌마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거야.

그리고 달랑 1년...

민지는 단 1년만 엄마로서의 역할을 허락했구나...
세상에...... 이렇게 적다 보니까 엄마는 그동안 엄마도 아니었구나... 정말 엄마라고 할 수도 없었어. 미안해서 어쩌면 좋으니... 이젠 돌이킬 수도 없는 시간들인데 미안해서 어쩌면 좋으니 아가야.....

그런데 오늘 5년 만에 다시 미용학원에 갔단다.

캐나다에 가서 틈틈이 쓸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 오랫동안 굳어 있는 손을 풀기 위해 갔단다. 하지만 이번엔 절대 엄마의 꿈을 위해 가위를 든 건 아니야. 캐나다에서 언니를 돌보면서 틈틈이 렌트비라도 벌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꼭 하지는 않더라도 준비는 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이젠 절대로 엄마를 위해 언니를 외롭게 혼자 두지는 않을 거야. 그러지 않을 거야.

민지야, 너에게 못다 한 엄마 역할을 언니에게 두 배로 해 주어도 괜찮은 거지? 우리 민지 샘나서 울지 않을 거지?

혹시나 민지가 왜 나한테는 그렇게 안 해주었냐고 속상해할까 봐 엄마 마음이 아파... 우리 민지는 착하니까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그지?

민지야, 엄마가 언니에게 정성을 쏟는 마음속엔 늘 너도 함께 한다는 걸 믿어주렴. 이제 언니는 언니 혼자가 아니야, 언니와 너는 하나야.
엄마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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