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지에게 보내는 편지 모음 9
<2002-05-28-화> 외할머니께서 오셨어
또 잔뜩 음식 꾸러미를 들고 오셨지. 죄송하고 고마운 마음을 잘 먹는 걸로 보답해야 하는데 많이 먹지 못했어. 너희들 잘 먹는 거 보면 흐뭇하고 엄마 배가 부른 것 같은 거 그대로 할머니도 엄마한테 같은 마음이실 텐데... 알면서도 맛나게 먹는 모습 보여 드리지 못해 참 죄송해. 내일은 억지로라도 맛있게 많이 많이 먹어야겠다.
외삼촌, 외숙모, 예언니도 왔었단다. 곧 떠날 우리들이 안쓰러웠겠지. 잘 지내는 모습 보고 싶었겠지. 그 마음 알아서 고마운데, 친정식구라고 편한 맘에 엄마의 거짓 웃음을 많이 보여주지 못했단다. 엄마는 왜 이리 못났을까... 돌아서면 후회하면서.....
민지야. the others라는 영화를 보았어.
어떤 엄마와 아들, 딸이 세상을 달리 했으면서도 현실처럼 살아가다가 자신들이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란 걸 알게 되는 이야기였단다.
눈을 감고 상상했어.
나중에 우리 민지 다시 만나 영화에서 처럼 살 수 있다면...
그럼 정말 좋은 엄마가 되어, 아주 많이 많이 안아 주고 뽀뽀해 주고 그럴 거라고...
그럴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고...
그리고 지금 우리 민지도 우리 곁에서 함께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 본다.
그렇다면 널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이 엄마를 얼마나 애타게 부르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숨 죽여 너의 목소리를 찾아본다...
민지야 만약 지금 엄마 곁에 있다면 엄마 얼굴에 뽀뽀 한번 해 주렴. 그 입맞춤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렴...
아가... 사랑하는 아가야.
엄마가 이렇게 너에게 집착하는 것이 널 더 불행하게 하는 것은 아니지?
그럼 안되는데...
민지야. 잘 자라...
예쁜 꿈 꾸고,
자다가 무서우면 엄마 아빠 곁에 와서 자고 가렴.
언제나 너의 자리는 비어 있단다
아가... 사랑해... 우리 아가 너무너무 사랑해......
<2002-05-29-수> 하루가 또 지났구나
민지야. 민지야... 예쁜 민지야... 엄만 오늘 그리 특별한 하루는 아니었는데, 민지는 어땠어?
그래 조금 특별했다면 외할머니 덕분에 언니 걱정 없이 바깥일을 보고 올 수 있었다는 거라고나 할까.
늘 언니가 학교에서 올 시간이면 부랴부랴 집으로 와서 언니 점심 챙겨주고 언니 학원 가는 시간 맞추어 또 나갔다 오곤 했는데 오늘은 중간에 집에 오지 않아도 되어 편한 하루였지.
어제는 아빠랑 언니의 머리 손질을 했었단다. 미용의자를 샀거든 어제. 중고지만 5만 원이나 하더라. 그래도 새것은 20만 원이 넘으니 5만 원이란 가격에도 만족해야겠지. 미용의자를 장만한 기념으로 당장 머리 손질을 해 주었었어. 높낮이 조절이 되어 전 보다 편하기는 하지만 목욕탕의 흐릿한 불빛과 좁은 공간 때문에 생각만큼이나 편하지는 않더라. 그래도 일반의자에 앉은 아빠의 키에 맞추느라 발 끝을 세우고 끙끙대던 것에 비하면 양반 된 거야 그지?
캐나다에 가면 이 의자 위에 많은 사람들이 앉게 되어 엄마가 적적하지 않게 되도록 도와줄래? 그래서 좋은 사람도 많이 알게 되고 덕분에 언니도 즐거운 타국 생활이 될 수 있도록 우리 민지가 지켜 주렴...
오늘 언니 스케이트장에 외할머니도 함께 다녀오셨어. 멋지게 타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는데, 새 신발에 아직 적응을 못해서 언니 실력을 모두 보여드리지는 못했단다. 또 보여드릴 기회가 있을까?... 왜 이리 모든 게 마지막처럼만 느껴지는지...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몇 번씩 다짐해 봐도 느낌은 마지막으로 다가온다.
아가, 엄마 지갑 속에 고이 끼워 둔 너의 사진을 쓰다듬을 때 민지는 엄마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니?
엄마는 너의 따뜻하고 매끄러운 예쁜 살결이 손 끝에 그대로 느껴진단다.
오랫동안 바라보면 눈물 흘릴 것 같아서 지나치듯 한 번씩 쓰다듬고 황급히 지갑을 닫아야 하지만 그래도 그 몇 초가 얼마나 짜릿한 감동인지...
사랑한다 아가야. 엄마 딸이 돼주어서 정말 고마워. 사랑해 아가.....
<2002-06-01-토>
6월이 되었단다. 어느새 말이야. 이렇게 무심히 흐르는 시간이 참 밉구나.
널 멀리 보낸 날이 하루하루 멀어지면서 엄마 마음도 함께 멀어질까 봐 무서워.
벌써 엄마는 널 향한 그리움과 아픔을 다스리는데 익숙해져 가고 있는데,
또 다른 내일이 오면 기억하려 애써야 너의 모습을 그릴 수 있게 될까 봐 그게 너무 두려워...
아가야, 세월이 흘러 어느 날 마음으로 웃고 있는 엄마를 보게 된다면 우리 아가가 얼마나 슬플까. 얼마나 허전할까... 엄만 그날이 올까 봐 겁이 나는구나. 그래서 새달이 시작된 것이 참 싫구나...
지난 목요일에 엄마 친구가 집에 왔었어. 그 이모는 지금 임신 중 이란다.
그런데 언니가 그 이모 모습을 보면서 엄마도 아가를 가졌으면 했나 봐.
유난히 아가 이야길 많이 하기도 하고,
식당에서 주운 나뭇잎을 색종이에 붙이고 나서는 그 밑에 <배 부른 엄마 친구랑 식당에 간 기념> 이란 글을 써넣고는 코팅을 해달라고 하기도 하고,
엄마 배 속에 쿠션을 집어넣으려고 하고...
그래서 "엄마가 동생 낳아주었으면 좋겠어?"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더구나.
엄마가 슬퍼할까 봐 직접 말은 못 하면서도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자기 마음을 표현한 거야.
그런 언니를 보면서 가여운 생각이 들었단다.
그래서 동생을 낳아 주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러면 우리 민지에게 미안해서 그럴 수 없다는 생각이 더 크구나.
민지야. 엄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언니를 생각하면 민지처럼 귀여운 동생을 갖게 해주고 싶고, 민지를 생각하면 절대 그럴 수 없다는 생각만 들고...
민지야, 엄마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니? 우리 민지가 하라는 대로 하고 싶은데... 민지가 엄마에게 이야기해 줄 수 없니? 민지가 엄마에게 절대 동생을 만들면 안 된다고 이야기해 줄 수 없니?
자꾸만 민지랑 똑같은 아가를 다시 갖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되는 것이 겁이 나고 미안해...
아가... 엄마 좀 잡아주렴. 꼭 잡아주렴... 널 놓지 않게 엄마 손 좀 꼭 잡아주렴...........
아빠는 절대로 민지 아닌 다른 동생은 없다고 확신하는데 엄마는 왜 이리 미련을 못 버리는 걸까...
못난 엄마를 용서해 주렴... 아가... 사랑한다...
민지야, 사랑해.................. 그리고 미안해................ 아가...............
<2002-06-03-월>
오늘 엄마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황폐한 언덕 위에 홀로 서있는 것처럼 외롭고 무섭고 쓸쓸하고...
무엇 때문이라고 꼭 집어 찾을 수 없는 것이 더 힘들게 하는구나.
우리 민지 보내놓고 이런 마음이 드는 건 처음이야.
네가 보고 싶고 네가 그리운 건 이미 엄마의 한 부분이 되었는데 지금 이런 기분은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하는지 모르겠구나.
시작도 끝도 없는 공허한 마음이 한 여름 날씨에도 소름이 돋게 한다.
웃음소리 요란한 대화 속에 끼어 있지만 그 속에 있는 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인 것 같고
바쁘게 집 밖을 오가며 몸을 내둘러도 그 몸은 내 거가 아닌 것 같구나.
이 혼란한 마음으로부터의 탈출을 상상하며 평온을 꿈꾸어 본다.
정말 평화로울까... 우리 민지가 사는 그곳은 정말 평화로울까...
민지야 네가 있는 그곳에 가고 싶구나.
무심으로 살 수 있는 그곳에 정말 가고 싶구나.
오늘은 우리 민지가 보고 싶어서라는 마음보다는 지금 이 허허로운 심정을 잠재울 수 있도록 그곳에 가고 싶구나...
민지야, 엄마 마음이 너무 어지러워... 왜 이럴까... 무엇 때문일까...
어떻게 해야 이 어지러운 마음을 다잡을 수 있을는지...
민지야. 엄마 왜 이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