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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단 May 05. 2024

 너와 함께라면

민지에게 보내는 편지 모음 10

<2002-06-04-화> 

 

민지야 기쁨의 환성이 한반도를 흔들고 있단다.

오늘 폴란드와 우리나라의 경기가 48년 만의 첫 승으로 끝났기 때문이야. 직접 경기장에는 못 갔지만 우리 가족은 작은 고모집에서 함께 경기를 보았단다. 엄마도 그 시간만큼은 온통 경기에 집중할 수 있었어. 아슬아슬한 마음에 차라리 결과만 듣고 싶다는 생각도 여러 번이었지.

마침내 승리로 경기가 끝나고 이어지는 뉴스는 온통 첫 승에 대한 감격만 쏟아내고 있구나. 곳곳에 열광하는 붉은 악마의 빨간 물결이 퍼져있고 그 속에는 너와 나가 하나 되어 승리의 기쁨을 나누고 있구나. 우리의 단결된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하루였단다.

'어떤 일에도 이렇게 온 국민이 하나가 된다면 작지만 강한 나라 대한민국이 될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을 해본다.

민지야. 만약 네가 그렇게 가지 않았다면 엄마는 너와 언니 손잡고 어디에서든 응원단의 한 무리가 되어 있었을 거야. 빨간 티에 빨간 목도리를 너의 목에 감겨주고 함께 손뼉 치며 함께 코리아를 외쳤을 텐데... 씩씩한 우리 민지도 열심히 두 손을 흔들며 엄마 따라 목청껏 외쳤을 텐데... 흥분한 우리 민지는 느닷없이 <태! 권! 도!>를 외치며 한 발 높이 찼을지도 모르지? 씩씩한 모습을 보여줄 때 늘 그랬듯이 말이야.

아가... 그래도 오늘은 어제보다 나은 기분으로 너에게 편지를 쓸 수 있는 걸 보면 월드컵의 열기가 대단하긴 하나보다. 그지?

민지야. 매일매일 이렇게 엄마 마음이 쏠릴 수 있는 일들이 생겼으면 참 좋겠다.
욕심이 너무 큰 거니?

TV에서 흘러나오는 달뜬 목소리들이 듣기 좋구나. 오늘은 우리나라의 축제일 임이 틀림없다.

아가, 잘 자... 사랑해... 

내 사랑... 영원한 내 사랑 민지야...

잘 자거라........ 사랑해........

 


<2002-06-07-금> 
 

오늘 엄마는 아주 바쁜 하루였단다. 아가...
아침 일찍 미국 대사관에 다녀왔고 수지침 배우고 미용실도 다녀왔거든.

지난번 아빠 혼자 미국비자받으러 가셨다가 엄마껀 접수도 못했었어. 엄마도 함께 갔어야 했는데 여행사에서 함께 갈 필요가 없다고 하는 바람에 한 번에 끝낼 일을 두 번 걸음을 하게 한 거야. 무척 화가 났지만 이것도 뭔가 뜻이 있는 거겠지 생각하며 화를 눌렀단다. 그 덕에 미국 비자받는 과정을 몸으로 경험하게 되었으니 무슨 일이든 안 해보는 것보다는 나은 거겠지. 그지?


아가. 어제오늘 계속 날씨가 무척 덥구나.
아침에 언니에게 끈나시 투피스를 입고 학교에 가라고 했더니 쭈쭈 보인다고 반팔티를 안에 받쳐 입겠다고 하더라.

벌써 끈나시 입는 것이 부끄럽게 생각될 나이라니... 좀 놀랍고 쓸쓸하고 그렇구나.

어느새 조금씩 조숙해져 가는 언니를 보는 것이 아주 즐겁지는 않아.

아직 아가 같아서 엄마 품에 쏙 들어오면 좋겠는데 이제 언니는 그렇지가 않네...

그럴수록 우리 아가가 더 그립고 보고 싶은 걸 어쩌니.....

엄마 품에 꼭 안겨 머리를 엄마 어깨에 기대던 우리 민지가 너무 그립구나...

언니가 스케이트장에 가는 차 안에서 문득 산타 선물에 대해 묻더라.

자기 선물을 엄마가 한 것이 틀림없다고 하면서 텔레비전에서 보았다는 거야.

그래서 마음이 착한 어린이에겐 산타가 찾아오는데 언니는 마음이 안 착해서 산타가 안온 건가? 했더니,

그럼 자기가 그 인형 갖고 싶은 건 산타가 알았는데 민지가 비행기 갖고 싶은 건 왜 몰랐냐고 묻더구나...

그래... 우리 민지 유난히 비행기를 갖고 싶어 했는데 그 비행기를 너의 영전 앞에 사다 주고 말았었지.

그깟 것 얼마나 비싸서 맨날 다음으로 미루다가... 가슴이 너무 아파...
오랜만에 우리 민지 이야길 꺼내는 언니에게 민지가 너무 보고 싶다고 했더니 슬쩍 말을 돌리더라.

매번 느끼지만 언니가 엄마보다 훨씬 어른스러워. 너 보고 싶은 마음을 가슴으로 누를 줄 아는 언니가 훨씬 어른이야...

아가... 산타 선물 받고 아침에 기쁨과 놀라움에 울먹이는 목소리로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주셨어" 하면서 엄마 아빠 침대로 달려왔던 너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가슴을 울리는구나... 아가...

아... 네가 정말 보고 싶어. 민지가 정말 보고 싶어. 어떻게 널 잊을 수가 있겠니... 어떻게...... 



<2002-06-11-화> 
 

민지야 엄마 유학원에 다녀왔어. 언니 학생비자 신청 때문에...
이렇게 하나 둘, 이 나라를 뜰 준비가 되어 가고 있단다.
이렇게 하나 둘, 너의 숨결이 배어 있는 이곳을 뜰 준비가 되고 있단다.
갈수록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건 네가 엄마를 붙드는 건 아닐까 싶어 혼동스럽구나.
어디에 간들 너는 함께일 텐데 왜 이리 마음이 어지러운지...

사랑하는 민지야. 예쁜 민지야...
보고 있니? 엄마 보고 있니?
왜 한 번도 엄마 꿈속에 조차 만나러 오지 않는 거니? 엄마 잊은 건 아니지?
엄마한테 잘 지내고 있다는 걸 그렇게 보여주는 거지?

시원한 빗줄기가 쓸고 간 더운 열기가 다시 살아나고 있구나.
유학원에 일찍 도착해서 잠깐 커피숍에서 밖을 내다보았어.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서로 엉키듯 움직이는 차들... 하지만 모두들 제 길을 찾아 주저 없이 앞을 향해 가더구나.
그래, 적어도 엄마 눈엔 그 모든 것들이 주저함이 없어 보였어.
그 속에서 엄마만이 어떤 일에서든 주저하고 멈칫해지는 것이 참 슬펐어...
혹시라도 그만둘 수 있는 핑곗거리도 찾아보지만 이미 돌아서기엔 너무 먼 길을 왔다는 생각만 드네...

그래서 이젠 그만두는 것도 겁이 나...

쌓여있는 짐들을 정리할 기운도 없구나...
즐거운 마음으로 떠날 준비를 하는 중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귀여운 우리 민지 옷가지도 사면서 금방 작아지면 어쩌나 하는 행복한 걱정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민지야 자꾸만 약해지는 엄마 마음에 힘 좀 주렴...

민지야, 어린이집에도 가봐야 하는데... 진짜 가봐야 하는데...
우리 아가 앨범도 받아 오고 우리 아가 잊지 말아 달라고 선물도 해야 하는데...
민지야, 엄마에게 용기 내라고 말해줘... 응?...
지금 전화해 봐야겠구나. 용기 내서 우리 민지 어린이집에 전화해야겠어... 가슴이 두근거린다... 



<2002-06-19-수> 
 

민지야... 엄마가 또 너무 오랜만에 왔지.
미안해 민지야... 널 잊고 있었던 게 아니라, 널 잊지 못해서 못 왔다는 거 알지?...

그래... 우리 민지 생각이 더 많이 나서, 엄마가 힘이 없어서 컴 앞에 앉지도 못했었어...

지난 토요일 언니의 친구 엄마들.

우리 민지도 봤지? 옛날에 시립문화원에서 연극 볼 때 오셨던 아줌마들.

그리고 우리 민지를 지하층에서 극장층까지 안고 계단을 올라와 주신 그 아줌마.

그분들이 엄마를 위로해 주려고 만나자고 했었어. 캐나다에 가기 전에 보자고.
그리고 엄마를 위해 간 곳이 라이브카페였단다...

자리에 앉자마자 이규석의 잔잔한 노랫소리에 엄마는 울컥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단다.

그러고 나서 멈출 수가 없었어.

함께 와 준 엄마들에게 미안해서 울면 안 된다고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쏟아지는 눈물은 이미 막을 수 없었고,

울렁이는 가슴을 진정시키기엔 그 흔들림이 커져만 갔어.

민지야... 그날은 엄마가 즐길 수 없는 것 또 하나를 확인한 날이었단다.

CD로 듣는 음악과 무엇이 다르기에 그토록 참을 수 없는 설움이 몰려오는 것인지.

그걸 알 수는 없지만 잔잔한 생음악 속엔 분명 다른 진동이 숨어 있었어.

그리고 그것이 엄마의 억눌러 놓은 슬픔을 밑바닥까지 헤집고 끄집어내는 것 같았어.

정말 참을 수 없는 설움이 온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어. 너무 슬펐어...

이젠 절대로... 그런 곳에 못 갈 거야. 그 느낌이 무서워. 널 잃은 슬픔을 더 확실한 모습으로 각인시켜 주는 그 느낌이 무서워...

민지야, 하지만 그날 아줌마들이 늦은 시간까지 엄마를 위로해 주고 함께 해주어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

모두 널 기억하고 널 위해 기도해 주실 거야... 우리 민지 좋은 곳에서 좋은 모습으로 늘 행복하라고 기도해 주실 거야.

민지야 너도 좋지? 널 잊지 않고 가끔이라도 기억에 떠올려 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기쁘지? 외롭지 않지?

민지야... 절대 외로워하면 안 돼. 알았지?

엄마가 이곳에 글을 아주 가끔 올리게 되더라도 절대 외로워하면 안 돼. 알았지?

그런 날일수록 엄마는 너의 곁에 더 가까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해.... 알았지?

아가... 사랑해... 사랑해 아가야.....

민지야
요즘 우리나라는 온통 붉은 물결이란다. 월드컵 때문에 말이야...

어제 우리가 이탈리아를 연장전까지 해서 2대 1로 이겼지 뭐야. 이탈리아는 순위 6 위였는데 말이야.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이루어지고 있단다. 이 때문에 온 나라가 붉은 악마의 함성소리로 가득하단다.

어제 안정환 선수가 골든골을 넣어 우리의 8강 진출이 확정되는 그 순간... 아빠와 엄마는 부둥켜안고 기뻐했단다. 그 순간은 그저 순수한 기쁨으로 넘쳤지...

잠시 후 진정이 되면서... 아, 이럴 수도 있구나... 하는 마음에 엄마는 곧 허탈함에 빠지고 말았지.

우리 민지를 홀딱 잊고 그렇게 기뻐하는 순간도 올 수가 있는 거구나 하는 걸 확인하니 너에게 너무 미안해서.

미안해... 민지야... 그래도 서운해하거나, 외로워하지 마... 엄마는 절대로 널 잊지 않을 거니까... 알았지?

절대 외로워하지 말아야 해... 절대로.......

아가... 사랑해...

민지야 아주 많이 많이 사랑해... 얼마 만에 우리 민지이름을 써보는 것인지...

민지야... 민지야... 민지야... 민지야... 민지야... 사랑해...

사랑해 민지야...... 

 


<2002-06-21-금> 너와 함께라면
 

온종일 치우고 정리하고, 치우고 정리하고... 해도 해도 끝이 안 보이는 것 같아.
민지야 머릿속을 텅 비운 채 몸만 움직이려 했지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너의 흔적들이 엄마를 힘들게 해.
쓰윽 눈물을 닦아내며 '이미 끝났어'라고 모진 맘을 먹어보지만,
이어 나오는 흐느낌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한다...

아가... 보고 싶었어. 오늘 우리 아가가 더욱 보고 싶었어...
구석진 곳에 끼워진 엽서, 파지 사이에 프린트된 너의 사진, 어린이집 입학 축하카드...
예고 없이 엄마 손에 잡히는 너의 흔적들이 엄마 가슴을 더욱 진하게 물들인다.

아가... 보고 싶은 내 아가...
너와 함께라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행복할까... 얼마나 얼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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