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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꽤나 복잡했다. 정주 시내를 벗어나 화산방향, 영동면 강계 쪽으로 가다보면 나오는 사거리에서 표지판을 보고 자작리로 우회전하라. 대명 사혈 사무국 여직원의 설명이었다.
사연천을 낀 지방도로 곳곳에 가축을 키우는 농가나 십여 호에 이르는 마을이 나타났다가 사라짐을 되풀이 했다. 먼 곳으로 보이는 산 밑에는 마을이 군데군데 자리 잡고 있었다.
십여 분을 달리다가 청소년수련원에 다다랐을 때 영수는 엑셀을 세웠다.
“다시 전화를 해 봐야겠어.”
그의 말에 내내 어두운 표정이었던 소희가 차문을 열고 밖을 보았다.
“그래. 그러는 게 좋겠어.”
영수는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신호음이 몇 번 저편을 향해 날아간 후, 상냥하지만 날카로움이 스며있는 목소리와 연결되었다. 조금 전에 전화를 받았던 여자였다. 그녀는 친절하게 다시 길을 안내해 주었다.
“거기까지 오셨네요. 그 길을 따라 계속 올라오다 보면 오른쪽에 저수지가 보입니다. 좀 지나면 다시 오른쪽으로 음식점이 보이고 자작교회가 보이고 마을도 보입니다. 그 다음에 오른쪽, 역시 오른쪽입니다. 한번 우회전을 시작했으니 마지막까지 의심 없이 가야합니다. 그러면 양어장이 보일 것입니다. 물레방아나 수차 같은 것이 보이고, 대명식품이라는 하얀 표지판이 보일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다 된 것입니다. 아, 참! 양어장이 보일 때 혹시 같이 양봉장이 보일지도 모릅니다.”
청소년수련원을 지나자 과연 저수지가 나타났다. 몇 개의 음식점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왼쪽에 전원주택지용으로 닦아놓은 택지가 보였다. 오랜 수령의 정자나무가 모습을 드러내고 자작 1리, 자작 2리 표지판이 연달아 나타났다. 귀족 작위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싶었지만 전혀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시베리안 샤먼이나 하얀 자작나무와 관련이 있어 보였다.
“오른쪽에 양어장이야!”
소희의 말대로 오른쪽에는 수차가 돌고 있었다. 우회전 하는 동안 언뜻 보인 하얀 팻말. 풀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지만 하얀 바탕 위에 쓰인 검은 글자, 대명식품이었다. 이제 이 킬로미터 정도의 산길을 가면 영수가 찾는 문제의 장소가 나올 것이다. 사무실, 수련원, 조립식 공장이 있는 곳이다. 아, 그 전에 왼편으로 붉은 미송으로 지어진 사찰이 나올 것이다. 이 소승불교 사원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길은 마주치는 차량이 길을 비키기 어려울 정도로 좁은 돌길이었다. 왼편에는 논이 길게 이어져 있고 오른편은 산이었다. 작은 개울을 지나 다리를 지나자 주차장이 모습을 드러내고 본격적인 표지판이 나왔다.
“여기서 내려야 하는가 봐.”
영수는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렸다. 안내표지판에는 공장과 사무실로 나누어지는 두 갈래 길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옆에는 경고문이 있었다.
이곳은 사유지이므로 소유자인 대명식품의 허락 없이는 출입할 수 없음. 무단출입 시 법적절차에 의거하여 처벌하겠음. (주)대명사장 백
이 경고문은 흡사 은둔 중이었던 헤르만 헤세를 연상시켰는데 아메리카에서나 볼 수 있는 무시무시한 사유지 경고문 같기도 했다. 아니 해안 철조망에 걸어놓은 해병대의 발포 경고문 같았다. 일몰 후 이 곳에 접근하는 자는 발포하겠음. 낯선 공간에 온 부담 때문인지 간이 오그라들고 있던 영수는 아내를 흘깃 보았는데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점이 불안했지만 영수는 모른 체 하기로 했다. 그래,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때마다 느끼는 두려움이 생각지도 못한 활기가 되기도 하는 거야.
“일단 가보자구.”
그들은 벚나무 길을 따라 걸었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높은 언덕 위에 철쭉이 널브러져 있었다. 도대체 누구일까. 벚나무 길을 조성하고 저 넓은 곳에 꽃을 의도적으로 피게 한 자는. 좁은 시멘트 길을 오르자 왼편에 분홍빛 자귀나무와 자두가 주렁주렁 매달린 나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이 영수로 하여금 흡사 무릉도원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그렇지. 이곳은 분명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 신선들이 사는 곳이지. 복숭아나무가 어딘가에 있을 거야. 오기 전에 본 개울에 복숭아 꽃잎이 둥둥 떠다니고 있을지도 모르지.
“어서 오세요. 먼 길 오신다고 수고하셨지요?”
사무실 여직원은 삼십 대 후반으로 보였다. 그녀는 두 사람이 할 일을 대충 이야기한 후 직원식당을 보여주었다.
“여기가 사모님이 일할 곳입니다. 그리고 저 아래 공장이 아저씨가 일할 곳입니다. 저쪽으로 가십시다.”
마당에는 자갈이 깔려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뾰족한 돌들이 발바닥을 찔렀다. 길을 가다가 영수는 개집 앞에 서 있는 달마시안을 처음 보았다. 녀석은 꼬리를 흔들지도 낯선 사람을 보고 짖지도 않았다. 개집에 매달려 멍하니 사람들이 무리지어 걸어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동화책에서 보았을 때는 순박해서 친근해 보였는데 막상 보니 물정 모르는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 때 누군가 나무판을 외벽에 덧댄 현대식 집안에서 나왔다.
“여기 계시네요. 공장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제가 말씀드렸지요. 오늘 면접 보러 오신다고 한 분들이요.”
“아, 그렇습니까? 반갑습니다.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공장장이 영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예, 반갑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조금도 급하지는 않아요. 한두 달 정도는 여유를 줄 수가 있어요. 그렇게 당장 사람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마침 식당에 일할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집사람에게 들었기 때문에 정보지에 광고를 낸 겁니다. 공장을 둘러봐도 좋아요.”
공장장은 땅꼬마 같은 오십 대 중반 남자였다. 반백의 머리에 살이 두툼한 얼굴, 한 번씩 드러나는 하얀 앞니, 이따금씩 뒷짐을 진 자세. 식품공장의 공장장답게 하얀 작업복에 모자를 썼지만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양말 속에 구겨 넣은 바짓가랑이와 흰 고무신도 그랬다. 나중에 알고 보면 그는 전국적으로 번진 사혈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고, 책임지고 생산하는 조혈식품에 대해서도 공부한 바가 없었다. 연관된 것이 있다면 그는 대명사혈을 창시한 도사의 동서라는 것이었다. 공장장은 소희에게도 말을 붙였다.
“사모님은 이곳이 어떻습니까?”
소희는 직접적인 대답을 피하고 나쁘지는 않다는 표정만 지어보였다.
“예, 그냥. 저는 이런 데는 처음이라서요.”
“여기 있게 되면 아시겠지만 도시에 살다가 오게 되면 굉장히 어려운 점이 많이 있어요. 일단은 가까운 곳에 슈퍼가 없고, 문화시설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요. 식당도 없고, 아이들이 놀만한 곳도 없고. 처음에는 힘들겠지만 두 사람이 일을 하다 보면 저축도 늘고, 그런 대로 괜찮은 곳이라는 느낌을 받을 겁니다. 아니 그 전에 여기 핀 무공해 꽃을 보면 정말 멋진 곳이라는 생각이 들 겁니다.”
“예, 좋은 곳 같습니다. 이런 곳에 제가 일할 곳이 있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영수의 말에 공장장이 크게 웃었다. 그들은 공장견학에 나섰다. 넓은 밭 가장자리에 난 길을 따라 돌계단을 내려가자, 맑은 시내 위에 걸쳐진 다리와 이층 조립식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마 전에는 오십 대 남자와 여자 둘이 제발 있게 해달라고 하는 것을 오지 말라고 했죠. 누가 보아도 불륜인 놈들인데 이곳은 결코 그런 곳이 아니거든요. 자식들도 없이 그 나이에 이런 곳에 들어와서 잠시 세상을 피해 살려는 치들이죠. 우리는 이런 사람들과는 절대로 같이 한솥밥을 먹을 수가 없어요. 우리 선생님이 아시면 큰일 나지요.”
“한솥밥이요?”
영수의 말에 앞서가던 공장장이 뒤를 보며 말했다.
“아, 여기는 식당에서 세 끼를 다 같이 먹어요. 한솥밥을 먹는다는 건 대단한 거죠. 식구가 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여기에 오게 되면 일단 물세와 전기세가 들지 않고, 집세도 물론 들지 않아요. 또 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으니까 따로 식사를 준비할 필요도 없어요.”
“정말 저한테는 딱 맞는 곳이군요. 사업이 부도가 나서 이렇게 오갈 데가 없는 신세가 되었는데.”
영수는 유쾌하게 보이려고 애썼다.
“어떤 사업을 하셨습니까?”
그러자 소희가 선수를 쳤다.
“큰 학원을 좀 했습니다.”
그 말에 영수는 속으로 웃었다. 아이들을 가르친 것은 맞지만 큰 학원을 한 적은 없었다.
샌드위치 판넬로 지어진 공장 안에서는 허리가 굽은 할머니 몇이 하얀 가운을 입고 바쁘게 움직이다가 그들 일행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답례로 영수는 그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공장 내부도 보았다. 몇 대의 기계와 냉동창고가 있었다. 바닥에는 녹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는데 먼지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깨끗했다.
“이층에 살림집이 있습니다.”
공장장이 이층으로 통하는 철제계단에 다리를 올렸다. 텅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높은 미끄럼틀에서 내려오기 위해 올라가야 하는 어릴 적 계단 같았다. 영수는 그것을 보며 지금까지 머릿속에 주입된 지식을 생각했다. 높이 오르려는 자는 먼저 한 개의 계단을 딛어야 한다? 이렇게 단순한 진리가 삶에 두루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을 이들은 알고 있을까. 아니 몰랐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자신들이 적어도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한계에 대해 역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건 일면의 진리. 음, 열두 개의 면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 그들은 한 가지면 밖에 보지 못한 거야. 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어. 뒤죽박죽이야. 관념이 관념을 낳을 뿐이야.
“이쪽으로 방이고, 옆에는 화장실과 샤워장. 그리고 여기는 사무실로 쓰던 곳인데 보일러가 안 들어올 겁니다. 그렇지만 두 개의 방에는 전기판넬이 깔려 있어서 언제고 따뜻하게 보낼 수 있습니다. …샤워장과 화장실이 같이 있는데 꽤 넓죠? 자, 여기 순간온수기도 있어요. 어떻습니까?”
공장장은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짧게 면도한 하얀 수염 주위에 흐르는 느긋한 미소와 흐뭇함이 교차된 얼굴 속에는 자신감이 섞여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비웃음으로 바뀌었는데 그것은 가난한 자에 대한 경멸이었다. 이제 막 자신이 벗어난 열등감에 대한 이별의 의식이었다.
“예, 괜찮은 것 같습니다.”
“뭐, 당장 결정 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음 주까지는 시간을 드리죠.”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드리기 거북하지만 제가 부도를 맞고 4대 보험 들 처지가 못 됩니다. 금방이라도 빚쟁이들이 들이닥칠 것이 분명하거든요.”
“그런 걱정은 안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월급은 모두 현금으로 드리겠습니다.”
영수는 공장장이 지껄이는 말들이 모두 진심에서 비롯된 것이고 성격이 급변한다고 하더라도 오차범위가 크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어졌다. 세상이 어려워질수록 이기적이고 저열한 사람이 많지만 간혹 말할 수 없이 숭고한 인격을 지닌 사람들도 있는 법이니까. 음, 뛰어난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타인의 아픔에 대해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슬픔, 원망, 그리움, 분노, 절망을 겪고 있는 상대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 사람이 그러한 아픔을 겪어야만 하고. 그런데 지금껏 그런 위인들이 적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더 고매해지지 않은 것은 왜일까. 잠시 잠깐 마음을 놓으면 인간이 짐승처럼 되는 것은 왜일까. 아, 이런 상황에서 넌 이런 생각이 나니, 나는 게 참 이상하다. 이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