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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산호 Sep 02. 2024

슬픔의 포도 3

    3                                            

  아래층에 냉동기와 냉장고, 고추건조기가 있어 진동이 느껴지는 이층 살림집은 매우 위태로워 보였다. 바닥에 깔린 전기판넬 때문이 아니래도 영수는 공중에 붕 떠 있는 상태에서 잠을 청하는 기분을 몇 번이나 느꼈다. 나무 위에 지은 집이나 그물침대에서 흔들리며 잠을 청한다고 할까.

  그런 어느 날이었다.

  개운치 않은 몸으로 잠에서 깨었을 때 할머니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낮은 소리였던 것이 갈수록 커지며 가까워졌는데, 무슨 내용인지 알아들을 수 있을 즈음에 한 번씩 끼어드는 공장장의 거칠고 굵은 목소리도 들려왔다. 공장장은 할머니들을 출근시키기 위해 마을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이후 영수는 그곳을 떠나올 때까지 거의 매일 아침 밝고 순박한 할머니들 목소리와 웃음소리를 들었다. 그 때마다 영수는 반가운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고, 소희는 창문을 열고 인사말을 던지기까지 했다. 

  “할머니들 안녕하세요?”

  “아, 새댁이네. 애들은 학교 갔어?”

  “애 아빠가 데리고 갔어요.”

  “좀 좋아졌어?”

  “예.”

  “그래 곧 있다 보세.”

  한 사람이 말하면 곧이어 다른 사람이 말했다. 할머니들은 공장으로 들어가면서 인사를 하기 위해 서둘렀다. 그것을 보며 소희는 눈물을 흘렸다.

  아침식사를 마치면 영수는 일터인 1층 공장으로 갔다. 공장의 육중한 철문을 밀어젖히면 바닥에 녹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고, 냉동실 2개와 건조실 1개, 반죽을 국수처럼 뽑아내는 기계, 또 다시 국수를 둥근 환으로 만드는 기계가 4대 놓였다. 

  일은 그다지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하얀 가운에 모자를 쓴 영수가 공장 안으로 들어가자 이미 일이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었다. 건조실에서 일 주일을 보낸 검은 환약이 비닐포대에 담겨 있었다. 나중에 영수는 이것이 대명원으로 불리는 조혈식품으로 십오만 원 가량에 판매되고 있는 건강보조식품이라는 것을 알았다.

  “안녕하세요?”
   “그래, 어서 오게.”

  “어서 와.”

  한 할머니의 답례가 끝나기 무섭게 다른 할머니의 인사가 이어졌다. 영수는 머리가 하얗고 키가 작은 할머니 옆으로 다가갔다. 이 날은 대명원을 제조하는 날이어서 할머니들 역시 하얀 모자를 쓰고 위생복도 입고 있었다. 

  “봉상댁, 잘 보고 있어요. 전씨는 잠깐 좀 봅시다.”

  머리가 하얗고 키가 작은 할머니 택호는 봉상댁이었다. 공장장은 잠시 영수를 공장 밖으로 불러냈다. ㄴ자형 건물과 마주보이는 곳에 이층 조립식 건물이 서 있고, 맞은편으로 냉동 창고 2개가 한 번씩 윙 소리를 내며 작동하고 있었다. 

  이층 조립식 건물에 매달린 계단을 보며 잠시 영수는 오래 전에 이곳을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보았을까. 꿈에서 보았을까. 공장장의 말투도 전혀 낯설지 않았다. 고향친구를 만난 것처럼 느껴졌다. 전생의 일일까.

  “잘 왔습니다. 함께 일하게 돼서 저도 기분이 아주 좋습니다. 그간 나이 든 사람들과 일하려니 마음에도 안 들고 답답해서 힘들었는데…… 뭐 그렇게 힘든 일은 없어요. 단지 산 속에 들어와 산다는 것이 힘 드는 일입니다. 아, 전씨! 내가 그 이야기를 했던가요?”

  전씨, 라니 참 귀에 와 닿지 않네. 영수는 생각했다. 아주 오래 전에야 사용했을 법한 호칭이었고, 영수 나이에 어울리지도 않았다. 

  “무슨 이야기 말입니까?”

  “여기서는 절대 술을 마셔서는 안 됩니다. 저도 여기서는 절대 술을 마시지 않고 있습니다. 어쩌다 요 앞에 있는 마을, 사연리에 나가서 한 잔씩 하고 오는데, 만약 술에 취해서 행패를 부리거나 고함을 지르거나 하면 큰일이 납니다. 우리 선생님이나 사모님은 절대 이런 것 용납하지 않아요. 글고 집에서 라면을 끓여 먹는 것 정도는 되지만, 가능하면 식당에 가서 먹는 것을 해결해야 해요. 지금 전씨가 사는 집은 배수관이 겁나게 작아요. 원래 사무실용으로 지어진 거라서. 아무튼지 배수관이 막히면 물건을 쌓아 둔 창고 안에 물이 터지게 됩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공장장 말에 영수는 퍼뜩 깨달았다. 그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도 아니었고, 세탁물을 배달하는 운전사도 아니었다. 공장장 말 한 마디면 당장이라도 그만두어야 하는 비정규직 사원으로, 밤이면 공장을 지키기도 하는 경비원이었다. 네 주제 파악을 잘 해야지. 영수는 씁쓸해졌다.

  “저도 이곳에 들어오기까지 정말 힘들었어요. 마음대로 택시 몰고 영산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산중에 와서 살려고 생각하니 가슴이 턱 막혀서 답답했는데 인자는 괜찮아요. 집도 좋은 게 있고, 봉급도 많이 받아 돈에 어려움을 못 느끼고 사니까. 내가 공장장으로 일해서 월급 받고, 애들도 따로 월급을 많이 받고 하니까 영산 살 때하고는 사는 형편이 달라요. 전씨도 여기서 돈 벌어 나가야지요. 여기서는 방세 안 들고 부식비, 가스비, 물세도 안 들고 주위에 돈을 쓸래야 쓸 곳도 없으니 한 달에 100만원 받은 그대로 다 저축할 수 있으니 말이지요.”

  “예, 그렇네요. 잘 알겠습니다.”

  영수는 그간 사회생활에서 배운 대로 길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들어가 일합시다.”

  그들은 작업장 안으로 들어갔다. 봉상댁이 알루미늄 채반에 담긴 검은 환을 비닐에 담아 놓았다. 

  “전씨 이걸 저쪽으로 쌓아 놓아요.”

  “예.”

  영수는 커다란 비닐봉지를 들려고 했지만 여간 어렵지 않았다. 비닐에 담긴 환들은 아직 따뜻해서 주둥이를 잡았더니 곧 터질 것처럼 늘어졌고 그것을 안자니 품에 다 들어오지 않아 요상스러웠다. 하이고, 참. 그것을 본 공장장이 말없이 다가왔다. 그는 땅딸한 몸집과 달리 힘이 있었다. 비닐봉지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것을 플라스틱 이동대차에 싣고 창고 안으로 날랐다.

 한편 소희에게도 대명에서의 일상이 시작되었다. 소희가 맨 처음 그 곳에서 만난 사람은 공장장이라 불리었던 50대의 남자였으며, 다음으로 만난 사람은 일당제로 일하는 할머니들이었다. 그들은 인근 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공장에서 일당 2만원을 받고, 일하는 틈틈이 농사를 짓고 있었다. 이들에게 2만원이 얼마만한 돈인지 처음에는 가늠하지 못했다. 단지 그들의 표정에서 그 돈이 상당한 가치를 발휘하고 있으며 어떤 일이 있어도 공장에 나오려고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소희는 영수보다 며칠 늦게 일을 시작했다.

  이사한 날부터 그 다음 날까지는 매우 바빴다. 철제계단을 통해 잔짐들을 나르고 정리하는 동안 한 나절이 흘렀고, 식당에 가야할 때가 되었다. 집안에서 늘 식사를 준비해왔던 그녀에게 집에서 식사를 하지 않고, 여러 사람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한다는 것은 꽤 이상한 일이었다. 

  식당으로 가는 길은 멀지 않았다. 철제계단을 내려와 콘크리트 비탈길을 내려가, 개울에 걸린 다리를 지나 몇 개의 돌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그 곳에 오르면 감자밭이 나타나고, 쓰레기 소각장과 제품을 쌓아두는 창고가 있었다. 거기서 잠시 서서 소희는 살고 있는 집을 서글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한 번도 생각지 못한 삶이 거칠게 내려 앉아 자신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곳을 지나면 공장장이 기거하는 집 마당으로 달마시안의 집이 나타났다. 마당에는 자갈들이 깔려 있어서 걸을 때마다 자글자글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때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리고, 공장장 식구들이 나올까 소희는 갈수록 조심하는 자세가 되었고, 하루하루가 지옥처럼 변하는 것을 느꼈다. 일이 힘든 것보다는 식당 운영자인 공장장 마누라 때문이었다. 처음 보았을 때 소희는 공장장 마누라가 고양이나 살쾡이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눈에 주근깨가 얼굴 전체에 박힌 오십대 여자는 한 번씩 히스테릭하게 웃었다. 그러다 뜻하지 않은 순간에 소희를 무시하는 말을 던져 모멸감을 안겨 주었다. 

  “지금은 그런 대로 팔자가 피었다고들 하지. 옛날에는 택시 운전수 마누라였으니까. 그런데 팔자가 다 핀 것은 아니야. 돈이 된다고는 하지만 죽도록 식당에서 일해야 된다고. 팔자 좋은 사람이 일하면 좀 이상하지만 일할 사람이 없는 걸 어떡해. 얼마 안 있으면 다들 나가버리고. 그러니 좋은 신세라고 할 수 있겠어, 안 그래? 자네는 잘 좀 붙어 있으라고. 그래봐야, 오갈 데 없는 신세잖아.”

  한 번씩 소희는 은근한 부러움과 질시의 눈으로 공장장과 마누라를 보았다. 사무실 직원들이 둘을 떠받들고 있어서만이 아니었다. 그들 가족은 어찌 보면 선택된 사람들에 속했다. 그들은 관리자로서 대명식품의 중심에 서 있었고, 그들의 말과 행동은 대중스타 못지않게 사원들의 주목을 받았다. 

  큰딸은 여상을 졸업한 이후 기획부장으로 한 달에 400만 원 정도 급여를 받고 있다고 했다. 얼굴이나 몸매는 보잘 것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법대를 졸업한 사원과 교제를 하고 있다고 했는데 영 골빈 놈이 아닐 수 없었다. 소희가 이렇게 말하자 영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딸은 전문대를 졸업한 이후 취직을 하지 못해 집에 와 있었는데 다른 사원들에 비해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또 한 사람은 사장 조카라고 했는데 고등학교를 막 졸업해 홈페이지에 댓글을 달고 있었다. 

  소희는 한번씩 이 작은 공장이 그렇게 대단한가 싶었고, 그 다음에는 공장장에 대해 생각이 미쳤다. 

  분명 사장부인의 제부가 됨에도 불구하고 공장장은 처형을 큰사모님이라고 불렀어. 공장장은 집사가 아닐까? 아, 그러니까 나는 집사부인의 부림을 받는 종업원이로군. 이렇게 생각하자 소희는 우울해졌다.

  공장장이 사는 집은 원래 대명도사가 살던 집이었다. 그가 대명사혈을 창시했고, 대명식품의 사장이었는데 선생님이라고들 불렀다. 그곳을 지나면 대명관이었다. 이곳에서 간혹 사혈에 대한 실습이나 비디오 강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무조건 피, 피만 빼면 돼! 이것이 병을 낫게 하는 도사의 절대적인 가르침이었다. 도사는 어혈을 제거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질병은 치료할 수 있다고 말했다. 몇 번인가 본 교육실의 벽에는 이런 문구도 씌어 있었다. 내 병은 내가 안다. 내가 고친다!

  대명관이 보이는 곳에 서면, 북쪽으로 뻗은 길이 나타나고 기숙사로 통하게 되어 있었다. 이 길은 다시 대명도사가 도를 닦던 굴과 이어지고 아래로는 철쭉 산책로로 이어졌다. 거기까지 대명의 땅이었다. 

  드디어 식당이었다. 소희는 주방으로 들어가 일을 시작했다. 공장장 큰딸이 들어오더니 소희에게는 인사도 없이 어머니와 몇 마디를 주고받은 후 사라졌다. 소희는 한두 번 본 일도 아니고 제 할 일만 했다. 

  얼마 후 식사시간이었다. 사무실 직원들이 하나 둘 뒷문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소희는 배식을 하며 흘깃 사람들 모습을 보았다. 표정이 이상하리만치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니 그것은 어두움이 아니라 수도사들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종교적인 경건함이라 할 만했다. 어쩌면 이곳은 종교집단이 아닐까. 그렇다면 교주는 누구이며 무엇을 숭배할까.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대명도사겠지. 

  눈이 마주치면 그들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식판을 챙겨 반찬을 집었다. 반찬에 고기가 오르는 일은 없었다. 대부분 인근 밭에서 재배한 깻잎이나 고구마 줄기, 시금치로 만든 나물이었다. 천일염으로 자체 제작했다는 웰빙 된장국, 오뎅볶음도 있었다. 공장장 마누라는 나물을 무치거나 계란찜을 할 때에도 늘 땡초를 썼는데 이유가 가관이었다. 그래야 몸 안의 병균들이 꿈틀대지 않는다는 거였다. 

  영수가 아이들과 함께 들어오는 것을 보았지만 소희는 공장장 마누라가 눈살을 찌푸릴까 두려워 크게 반기는 표정을 짓지 못했다.

  “응, 왔어?”

  그저 눈웃음으로 표현했다. 영수도 마찬가지였다.

  “응! 

  영수는 짧게 대답하고 식판을 들고 할머니들이 모인 식탁으로 걸어갔다. 그러면 소희가 식판을 들고 옆으로 가서 앉았다. 소희는 할머니들을 보았다. 할머니들은 소박하고 인정스러웠다. 비록 일당2만원을 받기 위해 공장일, 들일을 하고 있었지만 아이들을 무척이나 안쓰럽게 생각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잘 먹지 못하는 땡초를 음식에 넣은 공장장의 마누라를 꾸짖었다. 

  “아니, 아이들이 먹을 수 있는 게 뭐가 있어? 이런 거라도 먹어야 하는데. 참 전에 있던 사람 보니까 계란을 한 판 사다 놓고 삶아서 먹더라고. 먹을 게 별로 없으니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마름 행세를 하는 공장장 내외에 대해 할머니들은 못마땅하다고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다지 좋은 감정이 없었다. 여기 도사도 없으니 이제 제 세상 같아요, 아주. 위세가 보통이 아니에요. 영수는 몇 번인가 그런 말을 들었다. 그런가 하면 대명도사라면 말투가 달라졌다. 공장에 일을 다니게 된 것은 순전히 도사 덕분이기는 했다. 그러나 할머니들이 베푼 은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오래 전 도사가 부랑자 차림으로 마을에 나타났을 때 할머니들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이슬을 피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쌀이나 김치, 고추장 된장 등을 주었다. 할머니들이 그를 먹여 살린 셈이었다. 

  점심식사를 마친 영수는 발밑에서 자갈이 저벅거리는 공장장 집 앞 마당을 지나 이층 샌드위치패널 집으로 들어와 누웠다. 30분 정도만 누워 있다 보면 힘든 것이 잊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자리에 눕자 마음이 달라졌다. 어쩌다가 이 세상에 들어왔을까, 이 답답한 세상에. 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렇지만 그래봐야 소용없지 않은가. 영수는 아주 오래 전에 그것을 깨달았기에 끝없이 되풀이되는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용기란 절망을 넘어선 곳에 있다! 아주 오랫동안 가슴에 되새긴 말을 떠올리며 영수는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울해졌다. 지금쯤 아파트 관리실에서는 집안에 있는 짐을 모두 들어냈을 거야. 그들이 원하는 것은 우리가 그 집을 나가는 거였으니까. 좋아. 아니라고 해도 자물쇠를 열 수 없기 때문에 그대로 짐들이 있다고 해도, 잘 있거라, 나의 화분과 책들이여. 

  영수가 막 잠이 들려고 했을 때 철제계단의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은 누군가가 왔음을 알릴 필요가 없었다. 쿵쾅거리는 소리면 충분하지. 응 그래 맞아. 잠결에 있던 그는 깨어났다. 도대체 누구일까? 지금 이 시간에. 공장장이 무슨 일일까?

  “어서 문 좀 열어!”

  다급한 소희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아니 나는 왜 도대체, 라는 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영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철문을 열었다.

  “아, 몸이 안 좋아. 설거지, 식당 설거지를 좀 해줘.”

  “그래. 어째 안 좋아 보이더라니. 어디가 안 좋은 거야?”

  “똥을 누지 못했어. 그제부터.”

  영수는 소희를 따라 서둘러 식당으로 향했다. 왜 그러냐고, 물을 여유가 없었다. 그는 단지 소희의 고통스런 얼굴에서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아이를 보았을 따름이다.

  “저기, 저기!” 

  그곳에는 50여명의 공장식구들이 먹은 식판이 개수대에 높여 있었다. 영수는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그래, 내가 전에 이런 일 좀 했지. 군대 취사반에서.”

  영수는 세제를 묻혀 자신도 놀랄 정도로 빠르게 식판을 닦았다. 거품이나 물이 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순식간에 일을 해치웠다. 그런 다음 소희에게 웃어 보이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그런데 다음 날 새벽 소희가 다시 그를 깨웠다. 다 죽어가는 얼굴로 그녀는 영수를 데리고 화장실로 갔다.

  “제발 어떻게 좀 해봐. 똥이 안 나와. 좀 파주던가, 어떻게 좀 해줘.”

  영수는 설사가 난 적은 부지기수였지만 변비에 걸려본 적은 없었다. 아,홍시를 많이 먹고 난 뒤에는 그런 적이 있었다.

  “어떻게 하라는 거야?”

  “신문지하고 비닐장갑이 있으니까 그걸로 파내봐.”

  나는 의사가 아니야, 참 별 걸 다 시킨다, 는 말이 나올 뻔했지만 일단 불은 끄고 봐야 했다. 센 척하고 강한 척 할 때는 언제고 사람이 형편 없구만 그래. 이유가 하나 있긴 있지. 이런 여자하고 결혼했다는 것이지. 그간 소희는 마음이 약한 영수를 대신해서 어머니께 대들기도 하고 집안행사를 주도하기도 했다. 그런 소희가 이런 생활에 적응도 못하고 헤쳐 나가지 못할 리 없다고 믿었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겉보기와 달리 소희는 평범하고 연약한 여자일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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