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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산호 Sep 09. 2024

슬픔의 포도 5

 5     

  “쟈가 왜 저러냐? 난 꼭 일부러 그러는 것 같다.”

  영수의 어머니는 아픈 소희를 여전히 못마땅해 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가졌던 소희에 대한 미움을 한 가닥도 버릴 생각이 없었다. 

  “병원에 입원시킬 처지가 안 돼서 데리고 왔어요. 정신도 불안하고, 걸음도 못 걸어요.”

  “내가 오늘 내내 식당 일을 해줬다. 마늘도 까고 깻잎도 다듬고. 공장장 옆에 앉아서 비위를 좀 맞춰주었더니 헤헤거리면서 좋아하더라. 내가 얼마나 힘들게 애들을 키웠는지도 이야기했지. 느그 아부지가 일을 안 해서 내가 얼매나 고생했는지도 늘어놓고. 그건 그렇고 내가 얼매나 힘들게 너를 전주로 고등핵교 보냈는디 지금 이 지랄을 하고 있냐? 여자 하나 잘못 만나 도대체 무슨 고생이냐?”

  그간의 고부갈등이 얼마나 깊은 것이었는지 알고 있었지만 지금 영수는 어머니 도움이 절실했다. 아니 어머니가 아니라 허약한 실오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소희는 일을 할 수 없고 누군가의 도움이 아니면 이 집을 비워주고 어디론가 가야했다.  

  “하루 해 줬으니 됐고, 나는 내일 갈란다. 인자 네가 알아서 해라.”

  더는 붙잡을 수 없을 것 같아 영수는 눈물을 삼켰다. 어머니는 결혼하기 전, 자신이 알던 어머니가 아니었다. 영수가 군대에서 탈영했을 때 자식을 생각하며 끝도 없이 눈물 흘리던 어머니가 아니었다. 결혼하면서 아들을 며느리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한 거야. 질투심에 견딜 수 없었던 거지.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독살스럽게 굴지는 않았겠지. 결혼하면서 빌린 전세금을 이자 한 푼 에누리 없이 받았으니까. 

  저녁을 먹고 나자, 공장장이 영수를 불렀다. 이곳에 온 지 열흘이 넘었지만 공장장의 집은 처음이었다. 무슨 말을 할까. 영수는 걱정이 되었다. 아직까지 영수에게 호의를 보여주고 있었지만 그것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었다. 행여나 감정조절에 장애가 있는 소희가 갑자기 화가 나서 물건을 던지거나, 고함을 지르며 누군가에게 달려들면 어쩌나 싶었다. 그 때는 소희가 아프다는 해명만으로 해결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영수는 공장장 집 문 앞에 서서 잠시 머뭇거렸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짝사랑하던 여학생의 집 주위를 돌며 느꼈던 초조감과 불안함이 되살아났다. 

  한 번은 짝사랑하던 여학생 집 부근을 배회하다가 여학생이 친구와 주고받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영수에게 진심으로 관심이 없었다. 나는 저런 애 싫어. 말도 못 하고. 편지나 쓰고 집 주위를 빙빙 돌고. 우리 아버지 무서워 피해 다니고. 그 말에 친구가 안타까운 듯 말했다. 그래도 많이 좋아하는데 한번 만나 봐. 

  영수는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돌계단을 올랐다. 문이 열리면 또 어떤 인생이 나올 것인가. 그는 마음을 다잡고 문을 두드리려고 했지만 철문 사이에 투각된 꽃 때문에 노크 소리가 나지 않았다.

  “공장장님! 공장장님!”

  영수가 두어 차례 부르고 나서야 육중한 철문이 열렸다. 영수는 공장장에게 머리를 숙였다. 지금 공장장은 나를 내쫓을 수도 있고, 관용과 사랑을 베풀 수도 있어, 그렇지. 영수가 고개를 들자 반바지와 런닝 차림의 공장장이 보였다.

  “어서 들어와.”

  공장장을 따라 영수는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밖에서 보는 것과 달리 꽤 넓었다. 대명도사가 살다가 물려주었다는 집은 고풍스런 액자와 가구들로 가득했다. 

  “병원에서는 뭐라던가?”

  “예, 조금만 치료를 받으면 된다고 합니다. 갑자기 파산을 하고 이런 처지에 놓이게 돼서 생긴 신경쇠약이라고 하네요.”

  그 때 공장장 둘째딸이 수박을 가져다 놓고 사뿐사뿐 가벼운 발걸음과 함께 사라졌다. 그녀는 이제 갓 스물을 넘은 듯했는데 우연히 영수를 만나게 되어도 아는 체 하지 않았다. 할머니들에게 대하는 태도도 그다지 친절해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할머니들은 일당 2만원 받고 일하는 일꾼으로만 보였을까. 

  “이곳에 둘러보러 왔을 때는 건강하고 활발했던 자네 마누라가 갑자기 저리 된 게 나도 놀라워. 자네 고향이나 내 고향이나 거기서 거기라 내가 마음이 쓰이네 그려. 아니 자네는 나하고 일하기 딱 맞는 스타일이여. 전에 일하던 사람들은 나이도 많고 마음도 안 맞고 힘들었는데 말이여. 자네는 내 마음에 딱 드는데 자네 마누라가 저래서 걱정이네.” 

  “예 그러시군요.”

  아직 내칠 생각은 하지 않고 있다는 느낌에 영수는 안도감을 느끼며 속으로 후유하고 숨을 내리쉬었다. 

  “오랫동안 식당 일할 사람을 못 구해 우리 마누라가 혼자 무지 고생을 했어. 그러니까 말이여. 자네 마누라가 식당 일을 하게 되어서 한시름 놨다 싶었지. 그런데 일 시작한 지 며칠 안 되어 병원으로 가고, 또 걸음도 못 걷게 되었으니 나도 마누라 볼 면목이 없네.”

  “곧 좋아질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야지. 자, 수박 먹고. 어서 나아서 잘 지내도록 해보자구.”

  공장장의 말에 영수는 잠시 안심했지만 조마조마한 마음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어쩐지 그가 실권자는 아닐 것 같았다. 식당을 운영하는 책임자는 그의 마누라였고, 수시로 달달 볶는 여자의 등쌀에 견딜 남자는 많지 않았다.

  “그럼 쉬십시오.”

  영수가 막 문지방을 지나 마당에 내려서는데 어머니가 급히 달려왔다. 그는 서둘러 문을 닫고 돌계단을 내려왔다. 

  “야, 큰일났다. 쟈가 지금 너한테 온다고 나한테 소리를 지르고 난리다. 내 신랑한테 갈 거다 내 신랑한테 갈 거다 그러면서. 내가 뭐라고 했다고. 그동안 돈 안 벌고 뭐했냐고 했더니 저 난리다, 난리여!”

  그 순간 비틀거리면서 아니 껑충대면서 넘어질 듯이 넘어질 듯이 위태롭게 소희가 영수에게 달려왔다. 영수는 공장장 식구들이 알까 두려워졌다. 서둘러 키가 큰 소희를 등에 업었다. 처음으로 아내의 무게를 느꼈다. 

  “목을 잡아, 목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영수의 말에 어머니는 당황한 듯했다.

  “난 아무 소리 안 했다!”

  소희를 업고 자갈길을 걸어가자 어느 새 왔는지 아이들도 뒤를 따라왔다. 영수는 낑낑거리며 돌계단을 내려온 끝에 이층으로 통하는 계단 앞에까지 간신히 걸어갔다.

  “됐어. 여기 내려 줘. 계단은 내가 올라 갈 수 있어.”

  영수는 계단 앞에서 소희를 내려놓았다. 얼굴에 땀이 유리창의 비처럼 흘렀다. 소희는 난간을 잡고 아주 천천히 올라갔다. 뒤따르던 영수는 조마조마했지만, 소희는 계단 끝까지 올라가 마침내 직접 문을 열었다. 

  영수는 소희가 큰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거실로 쓰는 사무실로 갔다. 집안 곳곳을 청소기로 밀고 샤워실로 갈 준비를 했다. 작은방으로 간 어머니는 아이들과 함께 곧 잠이 드는 듯했다. 열린 문을 통해 밖을 보았다. 소희는 철제계단에 앉아 전화를 하고 있었다. 집안에서는 신호가 잡히지 않아서일 것이다. 힘들고 어려운 사정을 누군가에게 말하는 듯했지만 영수는 내버려두었다. 이럴 때 어떤 사람은 집안 사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을 불명예로 여기기도 하지만, 영수는 숨길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말함으로서 진실에 육박해 들어가거나, 소희의 고통을 덜 수 있다면 그보다 다행스러운 일은 없었다.   

  삶이 어떻게 다가오는지 미리 알고 대처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했다. 오죽하면 그런 시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을까.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 때도 알았더라면. 미래는 판도라의 상자일 따름이었다. 미리 안다고 한들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약한 인간은 자신의 한 몸 건사하기도 어려운 동물이었다. 그래서 신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미래에 장막을 치고 볼 수 없게 만들었을 따름이었다. 그대가 볼 수 있는 것은 지금뿐이니 미래를 위해 걱정하지 말라. 고민하지도 말고 불안해하지도 말라. 다만 지금 이 순간을 깊이 통찰하라. 

  영수는 샤워하는 내내 이런 생각들을 했다. 

  조금이라도 어려운 일이 닥치면 큰 충격 없이 보내기 위해 보험을 드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신도 할 수 없는 노릇을 사람의 힘으로 잠시 잠재우는 수단에 다름 아니었다. 닥치면 닥치는 대로 지금을 맞을 일이었다. 두려움 없이.

  얼마나 지났을까. 문을 열고 나와 보니 계단 위에 앉아 있던 소희가 보이지 않았다. 영수는 안방 창문가에 놓았던 핸드폰을 찾았다. 방 안에서 핸드폰 신호가 한 번씩 잡히는 유일한 곳이었다. 통화기록을 찾아보았다. 모르는 번호가 몇 개 나타났다. 누구에게 전화를 했을까. 

  영수는 메시지 함을 열어 젖혔다. 전화를 안 받네요. 이제 다 왔어요. 여자가 아니고 남자였다. 어느 놈일까. 병원에서 보았던 남자의 메시지라는 느낌이 강렬했다. 둘은 어떤 관계일까.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을지 생각해 보려고 했지만 차츰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게 어려워졌다. 신음소리와 함께 나체의 동물들이 뒤엉켜 나뒹구는 장면이 떠오를 뿐이었다. 영수는 고통스러워 신음을 내뱉었다. 나는 지금 동물이 된 거야. 지금까지 우리 조상들이 섹스를 하며 했던 생각들과 연관이 있겠지. 아내를 빼앗긴 자들 말이야. 둘은 어떤 관계일까. 불안한 상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처음 병원에 면회 갔을 때가 떠올랐다. 아이들을 데리고 갔었고, 나이 든 여자 환자가 그랬지. 어제 온 분이 아저씨가 아니었는가 보네. 영수는 무슨 소리인가 싶어 소희에게 물었다. 누가 왔다 갔어? 그 말에 소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구? 김영호?”

  소희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김영호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던 두 사람에게, 헛된 바람에 지나지 않았지만 잠시 희망을 안겨주었다. 그는 전세 주었던 소희 명의 아파트를 잡히고 사채를 빌려주었다. 매매가와 차액이 거의 없었을 텐데 어떻게 사채를 빌렸을지 의문이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대출전문가였다. 그 돈 중 얼마를 받고 기뻐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 때는 당장이라도 신용이 회복되고 안정된 삶으로 복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밑이 빠진 독에는 물이 고이지 않았다. 그 돈은 아파트 관리비와 카드이자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때 소희가 속옷을 빨아달라고 말했지. 그 놈에게도 속옷을 빨아달라고 부탁했을까. 아, 그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껏 영수는 소희의 속옷을 빤 적이 없었다. 소희가 자신의 속옷을 셀 수도 없이 빨아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 나는 어떻게 소희의 속옷을 들고 샤워실까지 걸어갔을까. 쑥스러움이 느껴졌다. 속옷을 뭉쳐 들고 샤워장에 가서 비누칠을 하고 살살 문질렀다. 야릇한 행복감과 성적 흥분이 느껴졌다. 성적 당사자가 아니라 옷임에도 그것을 느끼다니. 그런데 그놈도 이런 느낌을 가졌다면. 영수는 울고 싶어졌다.

  빠르게 지나는 망상의 고속열차에서 영수는 몸을 날려 뛰어내렸다. 다시 현실이었다. 영수는 텔레비전을 켰다. 이미 지나간 것들은 이미 내 것이 아니야. 흘러가 버린 과거의 것이지. 기억이라도 마찬가지야. 실제는 아니라고 했어. 내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거야. 스카이라이프를 달아서 텔레비전 화질은 깨끗했다. 영수는 고대 조상들처럼 이곳저곳 채널을 돌리며 탐색했다. 드라마, 스포츠, 다큐멘터리, 어느 곳에서도 그는 안주할 수 없었다. 한참을 돌리다 그는 자리에 누웠다. 불안이 도끼를 든 강도처럼 엄습해 왔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지옥처럼 방바닥이 뜨거워지며 금방이라도 등이 익을 것 같았다. 도깨비들이 주위를 빙빙 돌더니 이내 영수를 헹가래 치고 있었다. 이대로 떨어지면 지옥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았다. 영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시간과 공간이 그를 향해 육박해 오고 있었다. 이럴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누구도 이런 순간이 왔을 때 대처할 방법을 알려준 사람은 없었다. 질식할 것 같은 고통에 숨이 막혀왔다.

  문득 신혼 초에 소희가 썼던 쪽지가 생각났다. 나 없이 잘 살기를 빈다. 그때 소희는 그가 잠든 사이 집을 떠났다가 눈 뜨기 전에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도 소희는 집을 나간 것일까. 그 때처럼 밤이 되기 전에 소리 소문 없이 돌아올까, 아닐까? 영수는 그 쪽지를 삶의 소중한 자락이라 생각해서 앨범에 고이 모셔두었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그 일을 알게 된 걸까. 영수는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생각을 주체할 수 없었다. 고통의 씨앗은 바로 이런 생각들이야. 음, 그랬지. 소희는 내내 말이 없다가 화가 났을 때 말했어. 세상에 지 마누라가 집 나간 줄도 모르고 잠만 자고 있더라니까. 그 말에 영수는 다행스럽다 싶으면서도 한쪽에 소희에 대한 불안을 쌓아 놓았다. 그 후에도 비슷한 일이 있을 때마다 그랬을 것이다. 지금 그것들이 용수철처럼 움츠리고 있다가 갑자기 튀어 오르는 셈이었다.

  영수는 작은방 문을 열어 보았다. 어둠 속에서 개울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어머니와 아이들이 서로 끌어안고 자는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영수는 문을 닫고 좁은 복도로 나왔다.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다가 현관문을 열었다. 슬리퍼를 끌고 그는 철제계단으로 내려섰다. 분명 얼마 전까지 저기 소희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왜 조금 전까지 가능했던 일이 지금 이 순간에는 가능하지 않을까.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갔다. 무슨 일일까. 아래로 내려가면서 개울물소리가 천둥소리처럼 요란해졌다. 

  다리 부근에서 영수는 얼핏 뽕나무를 보았다. 낫에 잘려진 가지와 잎을 잃고 나무는 맨 몸으로 수치스럽게 서 있었다. 오전에 서투르게 낫을 휘두르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갑자기 뽕나무의 아우성과 함께 가슴이 답답해졌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보았다. 뒤에는 높이 솟은 산이 열린 공간을 가로 막고 있었고, 앞에는 음침한 가로등 불빛에 드러난 공장장의 집과 대명 사혈본부가 있었다. 어디로 갈까요? 저는 어디로 갈까요? 물음에 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소희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이곳이 너무 답답해 견디기 힘들다고 그녀는 몇 번이나 말했다. 우리는 이제 막다른 길 앞에 선 거야. 아파트도 비워주어야 하고. …지금 생각하니,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다른 길이 있었을 것이었다. 쉽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많은 길 중에서 영수는 우연히 그 길에 접어들었고 한 번 들어선 이상 헤어날 길이 없었다. 인생의 강도를 피하기는 어려웠을 테고. 그러니 누가 뭐래도 이 길을 갈 수밖에.

  문득 낮에 소희 손에 들려주었던 플라스틱 막대가 생각났다. 영수가 고추밭에서 쓰던 막대를 지팡이로 쓰라고 준 것이었다. 그것을 짚고 먼 곳까지 가기는 쉽지 않았다. 곧 따라잡을 수 있을 거야. 꽃이 떨어진 벚나무는 가지와 잎이 울창해서 바람에 한 번씩 흔들렸다. 그것이 꼭 인기척인가 싶어 반가움에 어쩔 줄 몰랐다가 아님을 알자 실의에 빠졌다. 다시 걸었다. 이번에는 개울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소희의 환영이 보였다. 그는 풀이 무성한 개울을 속속들이 뜯어보았다. 어디에도 소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세 갈래 길이 나타났다. 왼쪽은 공장장 집과 수련원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위에 철쭉 동산이 있었다. 좀 더 내려가자, 앞서 말했던 경고 표지판이 나타났다. 이런 표지판을 쓰는 사람은 한국에는 거의 없어. 공사장에나 있지.

  다시 갈래길이었다. 오른편으로 가면 마하보디 선원이었다. 미얀마에서 비구계를 받은 혜조 법명을 가진 스님이 운영하고 있는 곳이었다. 영수가 그들이 사용하는 위빠사나 수행법을 알 리 없었다. 한 눈에 보아도 이색적인 목조건물이었지만 영수는 감히 들어가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낮에 밭을 매는 몇 명의 수행자를 보았을 따름이었다. 

  그 때 영수는 풀섶에서 플라스틱 막대를 발견했다. 분명히 소희가 짚던 것인데. 이 막대가 필요 없어졌다면? 놈이 여기서 소희를 태워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이 막대를 버릴 필요가 없지. 어디로 갔을까? 어머니 말처럼 소희는 연극을 하고 있었을까. 어머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살아났다. 나는 안 믿긴다. 아무래도 저 년이 거짓말로 저러고 있는 것 같아. 평소에도 거짓말을 그리 잘하더니. 어머니의 말에 영수는 대꾸도 잘하지 못했지만, 문득 이런 말을 해주고 싶었다. 어머니는 제가 보이지 않는가 보죠. 이렇게 욕을 하시는 것을 보니. 이제 더 이상 저는 어린애가 아니에요. 저를 얽어매지 말아요.

  어디선가 소희 목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거짓말이라니요? 꼭 사람을 속이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들어서 기분 나쁜 말을 전하지 못할 때가 있어요. 사실을 사실대로 말해서 안 되는 경우 말이지요. 못 생긴 사람을 못 생겼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영수는 다리를 건너 어슴푸레한 불빛을 등대 삼아 선원을 향해 걸어갔다. 어두운 길을 걷는 자신의 모습을 영화로 보는 것 같았다. 제발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빌었지만 선원 어디에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문상객이 끊어진 삼경의 상가처럼 고즈넉했다. 헛기침을 해볼까도 싶었지만 갑자기 겁이 났다. 어쩌면 사이비종교집단에 들어온 것이 아닐까. 한쪽에 살림살이가 놓여있는 것이 보였지만 불상이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을 하는 곳인가. 절이 아니었던가. 그 때 꼿꼿하게 앉아 있는 한 남자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흐흑. 영수는 놀라 숨을 멈추었지만 남자는 미동도 없이 자신의 가부좌자세를 흐트러짐 없이 고수하고 있었다. 

  이건 대체 뭔가, 영수는 생각했지만 그것은 앞에서 말한 위빠사나 수행법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남자는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알아차리는 훈련을 수행하고 있었다. 처음 시작할 때는 호흡, 또는 호흡에 따라 아래 배가 일어나고 가라앉는 현상을 관찰한다. 일체의 관념이나 개념적 이미지를 배제하고 호흡현상만 관찰하기 때문에 종교적 교리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고 해도 좋았다. 

  영수는 선원 안을 둘러보았다. 솥이 걸린 부엌도 들어가 보았다. 소희는 이곳에 없는 게 분명했다. 소희가 왔다면 누군가 사무실로 전화를 했을 것이 분명했다. 얼마 전에 걸음도 제대로 옮기지 못하는 소희가 혼자 길을 걷는 것을 보고 노파가 전화를 했던 것처럼. 

  영수는 서둘러 선원을 빠져나왔다. 어디로 간 거야. 이러다가는 도저히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불빛이 환한 도시라면 이런 공포에 시달리지 않았을 테지만 말없는 산과 개울, 어둠이 무서웠다. 주위에 도움을 청할 곳도 없었다. 그는 허겁지겁 왔던 길을 되돌아 걷기 시작했다. 

  어디로 갔을까. 나는 어디로 갈까요. 어디로 가면 될까요. 어둠 속을 향해 물었다. 어느 것도 말이 없었다. 혼자라는 느낌이 절실해졌다. 순간 그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하다가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다. 순간 발에 통증을 느꼈다. 약간 작은 슬리퍼를 신고 오래 걸어서였는지 발등도 시큰거렸다. 빨리 걷을 때는 발이 이리저리 놀며 걸음은 비척거렸다. 그는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그래, 나이가 들었지만 난 여전히 어린 애지. 인정하지 못했지만. 삼십 몇 년을 살았지만 제대로 살 줄도 몰라. 그는 속으로 흐느끼다가 중얼거렸다. 소희는 아파트에 가 있지도 몰라. 관리비와 집세를 내지 않아 물이 끊긴 아파트였지만 아직 현관키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래 차를 가지고 거기 가보는 거야.

  갑자기 그는 집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내려올 때보다 더 황급히 발을 옮기고 있었다. 차는 공장장 집과 사무실로 가는 갈래길 아래 공터에 있었다. 가만, 키가 있던가. 없었다. 급한 마음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 서둘러 그는 집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아이들과 어머니는 잠들어 있었다. 아이들이 꼭 자신의 어릴 적 모습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부산함에도 잠을 깨지 않고 잠들어 있는 아이. 작은아버지들이 술을 먹고 행패를 부릴 때도 그랬고 어머니가 이들을 대적하여 울고 고함을 지를 때도 그랬다. 나도 지금 저 모습으로 내내 잠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 모습은 겉으로는 순진무구하게 보였지만 내면에는 깊은 상처가 패여 있었다. 얘 자는 가 봐봐. 작은아버지의 말에 어머니가 대답했다. 얘는 한번 잠이 들면 누가 업어가도 몰라. 영수는 어머니 말을 들으며 다시 잠에 빠져들었고, 나락에 떨어지거나 줄곧 쫓기는 꿈을 꾸었다. 이것은 중2 때의 가출과 방랑으로 이어졌다. 어느 날은 야간열차를 탔고, 어느 해 여름에는 사막이나 다름없는 아스팔트길을 혼자 오랫동안 걷고 있었다.

  차를 가지고 내려오며 조금 전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했던 움직임과 갖가지 야릇하거나 불안한 생각들. 이런 것들을 다시 떠올려야 하다니, 너무 고통스러웠다. 하긴 이곳을 지날 때마다 고통스러워지겠지. 하지만 어쩌랴, 나는 그것들을 아프게 기억하는 인간인 것을. 이게 과연 나일까,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은 한낱 기억에 지나지 않을 뿐 내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누가 말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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