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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렁우렁 외쳐대는 산의 울음소리에 영수는 가슴이 철렁했다. 이 깊은 밤에 누가 지르는 소리일까. 곧 자동차 엔진소리에 그 소리는 파묻혔지만 몇 번이나 다시 들려왔다.
그는 다시 영화를 찍고 있었다. 한 장면 속에서 우울하게 달리는 남자의 모습이 그려졌다. 사십 대 남자는 비탄에 젖어 어찌할 줄 모르고 있었다. 라이트만이 어둔 세상 사이로 길을 내고 있었다. 남자는 이대로 삶을 끝내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왜 이 세상으로 왔는가.
영수는 현실로 돌아왔다. 비포장 길이라 군데군데 파이고 자갈이 튕겨져 나갔다. 얕은 개울을 지날 때는 금세 개울물로 곤두박질 칠 것 같은 환상에 사로잡혔다.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그 와중에도 영수는 소희가 개울물로 떨어지지 않았는지 수풀 너머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체라도 보았으면 바랐다. 그러다 그건 아니지, 라고 중얼거렸다.
잠시 후 산길이 끝나고 아스팔트 도로가 나타났다. 야생의 자연이 끝나고 문명이 시작되는 지점이었다. 아침에 영수가 여기까지 데려다 주면 아이들은 스쿨버스를 타고 초등학교에 갔다.
엑셀이 아스팔트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정자나무가 있는 자작 2리를 지나 아래로 내려갔다. 여전히 낯선 풍경이었지만 밤에는 더욱 괴기하게 다가왔다. 사람들이 모습을 감추자, 자연물들이 은밀히 자신들을 드러내고 있었다. 안개가 하얗게 피어오르는 자작저수지를 돌아 마을 하나를 지났을 때 오른편에 청소년 수련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단 전화를 해 보는 거야. 내 전화는 받지 않으니까. 여기 공중전화가 있을 거야.
차에서 내린 영수는 두려움 속에서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가로등이 켜져 있을 뿐 커다란 건물 어느 곳에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매점 유리문 앞에 빨간 공중전화가 눈에 띄었다. 그는 전화기를 칼처럼 뽑아들고 투입구에 동전을 넣었다. 서둘러 소희 휴대폰 번호를 눌렀다. 뚜- 하는 소리가 귀를 타고 들어가 힘차게 가슴을 때렸다. 영수의 예상대로 핸드폰 전원이 꺼져 있었다.
배터리가 다 된 거야, 아니면 일부러 내가 전화할 줄 알고 꺼 놓은 거야? 영수는 가슴이 오그라지며 견딜 수 없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너는 뭘 배웠어? 어떻게 하지? 이럴 때 어찌해야 하는지 누군가에게 물어볼 수 없을까? 마땅한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응, 세상에 나 혼자로군. 꼭 버려진 휴지조각 같아. 거기에 생각이 이르자 꼭 영화주인공의 독백 같다는 자각이 왔다. 흐흐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넌 영화를 너무 많이 봤어. 영화는 현실이 아니야. 전화기를 내려놓자, 동전들이 굴러 나왔다. 그는 다시 동전을 넣고 번호를 눌렀다. 이럴 때 자꾸 같은 동작을 되풀이한다고 안 되는 일이 되는 것은 아냐. 그쳐야 할 때 그쳐야 해. 역시 전원이 꺼져있다는 안내음이 흘러나왔다.
영수는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정체불명의 남자 전화번호를 찾아 헤맸다. 그래, 그는 남자의 번호를 찾자마자 공중전화 전화기를 다시 뽑아들었다. 공중전화의 신호음이 뚜 - 하고 들려왔다. 그것이 반가웠지만 내내 신호가 갈 뿐이었다.
네가 전화를 안 받는다 이거지? 흥, 누가 이기나 보자.
오랫동안 신호음이 날아갔지만 당사자는 받지 않았다. 이윽고 소리샘으로 연결된다는 안내방송을 듣고 다시 번호를 눌렀다. 빌어먹을, 소리샘이 아니라 눈물샘은 아닌가. 신호음이 뚜- 하고 돌아왔다. 제발 그쳐. 그쳐야 할 때 그쳐야 하는 거야. 그것이 너를 위해서도 좋아.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전화를 받으면 엉킨 실타래가 풀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집으로 돌아가리라는 희망이 무너지자 영수는 한숨을 쉬었다. 헛된 희망은 늘 인간을 속이지. 놈은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그에게는 받아서 난처한 전화일 따름이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 영수는 눈을 감았다. 내가 알던 훌륭하고 고귀한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 자신은 아무런 약점도 없다는 듯 위풍당당하게 남의 허물을 지적하던 사람들은 어찌할까?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 사람들은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서 공개적으로 말하기를 꺼리는 거야.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 않겠지.
놈이 소희를 데리고 어디로 간 거야. 차를 타면 아무런 흔적도 없이 대명식품을 벗어날 수가 있지. 어쩌면 나중에 내게 전화를 해올지도 모르지. 당신과는 이제 끝이라고 소희가 말할지도 모르고. 너무 낭만적이군. 마치 영화 같아. 나는 비련의 역을 맡았어. 이런 생각이 들자 영수는 쓴웃음이 났다. 상상력이 나를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군. 어쩌면 업장이라는 것이 아닐까.
문득 소희에게 예전부터 화냥기가 있었던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렇지 않은가 말이다. 영수가 잠시 서울에 가 있겠다고 했을 때 소희는 걱정마라, 죽어도 바람피우는 일은 없을 테니까, 라고 호언장담했다. 혼자 있어도 섹스하고 싶은 마음은 안 들 거야. 지금까지 내가 먼저 섹스를 하자고 한 적이 열 손가락도 안 될 걸. 소희의 목소리가 들렸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누군들 자기 자신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으랴. 부글거리는 욕망의 불꽃을 당해낼 사람이 있을까.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은 말이야.
자주는 아니었지만 신경질적이고 차가운 소희도 한 번씩 자신이 대단한 성욕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냈다. 숨이 막힐 듯한 절정에 터지는 감창을 생각해도 그랬다. 낮의 조신한 태도와 야성적인 밤의 성욕 사이에 생기는 불일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인간은 잠시만 방심해도 짐승이 되는 법이니까.
차에 앉아 있었다. 영수는 어떻게 해서 이런 수렁에 빠지게 되었는지 천천히 생각해 보려고 했다.
혹시 실마리가 잡힐지도 몰라. 그래 집에 있어다오. 그러면 아무 일도 아니야. 집도 없고 무일푼이지만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야. 아니야, 이미 늦었는지 몰라.
영수는 대명식품에 오기 전 1년 동안 살았던 환희아파트에 가보기로 했다. 어둠은 여전했다. 보이지 않는 곳은 모두 잠들어 있었고,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곳만 후다닥 깨어났다가 다시 암흑으로 돌아갔다. 약수골, 고분, 정주나정을 지나 정주 시내를 통과하는 동안 영수는 이 도시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를 생각했다.
이곳에 살기로 결정했을 때 영수는 낭만적인 기분에 젖어 오랫동안 담배를 끊었다가 갑자기 피웠을 때처럼 몽롱해 있었다. 중학교 수학여행 때의 들뜸과 설렘을 떠올리며 현실의 어려움과 고통을 밀어냈다. 어려운 일이 닥쳐왔지만 모든 것이 잘 될 거라고 생각했다. 비관주의자가 아니라면 굳이 미래가 나빠질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냐고? 그래, 내일 일은 걱정할 필요가 없지. 지금 걱정만 해도 족한데 내일 걱정까지 할 필요가 있어? 얼마 전 유채꽃 축제에서 찍은 사진이 떠올랐다. 나비모양의 꽃 조형물에 걸터앉아 찍은 사진이었다. 아이들이나 소희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잠시 후에 다가올 고통을 모르는 얼굴들. 이것이 그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시내를 벗어나자 영수는 동해 가는 길을 따라 운전대를 돌리고 있었다. 창문을 보자, 누군가의 얼굴이 보였다가 사라졌다. 수십 번 수백 번 오간 길 위에 어떤 정령이 살아 영수를 보고 있는 듯했다. 그것은 꼭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을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다시 창문을 보았을 때 그것은 사라지고, 자신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잠시 후 진북으로 접어들었다. 초등학교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주에 처음 이사 왔을 때 아이들이 다녔던 학교였다. 아이들을 전학시키기 위해 학교에 다녀온 소희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도시 학교 같지 않아. 여기는 전교생도 얼마 안 되고, 교장선생님이 꼭 이웃집 아저씨 같아. 이 말을 했을 때 소희는 밝은 표정에 약간 들떠 있었다.
아파트가 보이자 영수는 멀찌감치 차를 세우고 천천히 걸어갔다. 이곳에서 사는 동안 한 번도 마음 편하게 산 적 없었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초등학교 뒤란에 밤이나 대추를 주우러 새벽마다 집을 나선 적이 있고, 근처 약수터도 자주 갔다. 아직 농촌 풍경이 남아 있는 마을은 한가롭고 평화로웠다. 아이들과 논두렁길을 걸으며 민들레, 씀바귀, 제비꽃을 보며 이름을 불러주었다. 바람이 거센 겨울에는 아이들과 연을 날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영수는 슬며시 경비실 안을 조심스럽게 엿보았다. 경비나 관리인에게 붙들리면 무슨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소방호스를 걷어가던 관리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머리가 벗겨진 오십 후반의 남자는 쥐새끼처럼 작은 눈에 광대뼈는 거의 없어 냉정하고 표독스러워 보였다. 그런 관리자에게 영수는 봐달라는 사정도 해보지 못했다. 경비아저씨에게만 겨우 말을 넣어 보았다. 어쩌겠어요. 이빨도 안 들어가요. 나로서는 어찌할 방도가 없어요.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경비아저씨는 우리 안의 동물처럼 자리에 앉아 졸고 있었다. 영수는 계단을 올라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보수조차 소홀한 오래된 아파트 곳곳에 금이 가고, 비만 오면 복도에 물이 흥건했다. 엘리베이터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정지하기도 하고 문이 꽝하고 닫혀서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딩동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발 집에 있기를.
복도를 걸으며 영수는 보름달을 보며 그녀와의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빌 때처럼 빌고 또 빌었다. 드디어 집 앞에 도착했다. 제발, 다시 마음속으로 빌며 현관문 손잡이를 잡았다. 끝이 뾰족한 막대 같은 열쇠를 넣고 돌리자 문이 열렸다. 아직 관리실에서 손을 대지 않았다. 문을 열고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소리가 안 들리나, 귀를 기울였지만 집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때 바람이 문을 쾅 닫았고, 심장의 문도 무자비하게 닫혔다. 어쩌면 좋을까. 소희는 어디로 간 것일까. 거실에는 누구의 침입 흔적도 없었다. 이곳에 살 던 때가 영수에게 오래된 옛일로 여겨졌다. 식탁에 앉아 소주를 마시고, 매실색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웃었던 네 가족의 모습이 떠올랐다. ― 이사비용을 위해 텔레비전을 팔아서 지금은 없었다. 빈자리가 그것을 대신하고 있었다.
무심코 영수는 식탁 위의 밥통을 열었다. 이런 제기랄! 밥통은 그대로 꽂혀 있었고, 밥알은 검게 타 있었다. 무슨 일로 그렇게 바삐 떠나려 한 것일까. 죽음이 뒤쫓아 온 것일까. 책상이나 장롱은 그대로 있었지만 소희와 아이들이 없는 집은 집이라고 할 수 없었다.
영수는 창밖을 보았다. 검은 하늘, 어두운 들 끝자락에 시가지 불빛들이 반짝거렸다. 내가 있던 곳은 늘 어두웠고 불빛들은 먼 곳에 있었지.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빛나는 곳에서 살고 싶었을까. 영수는 신음을 내뱉었다. 고작 이곳에서 1년을 살기 위해 화산에서 정주로 온 셈이었다. 지난 겨울 아이들과 연을 날리던 때가 떠올랐다. 들판에 선 외딴 아파트에는 세차게 바람이 불어댔다. 논에서 검은 독수리가 그려진 비닐 연을 지치도록 날리다가 베란다에 매어 놓았더니 오랫동안 꼬리를 흔들며 저 혼자 날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거센 바람에 연은 실을 끊고 달아나버렸다.
영수는 연을 볼 때마다 꼬리달린 혼을 떠올렸다. 인간이 죽으면 그간 거처로 삼았던 육체에서 빠져나온다는 혼. 꼬리가 달린 혼은 여자이고 꼬리가 없으면 남자라고들 했다. 도깨비불 같았던 그 혼들은 간혹 사람들에게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대체 그것들은 어디에 있을까. 새로운 인간이 태어날 때 다시 그 몸으로 들어온다고 했던가. …우리는 우주의 일부분이며 혼과 육체가 만난 또 하나의 우주인가.…그런 생각이 지금 무슨 소용인가.
현관문을 닫았다. 허탈하게 밖으로 나오자, 복도에 누군가가 움직이는 것이 보여 영수는 몸을 숨겼다. 부부싸움으로 경찰이 출동했던 옆집인가. 늘 문이 닫혀 있던 건너집인가. 생각해 보니 이 집에 먼저 살았던 사람도 자신의 의사에 반해 집을 비운 듯했다. 사정이 있었겠지. 밖에서 보면 다들 행복해 보이지만 그렇지는 않은 거야. 안 그렇다면 새로 열쇠를 바꿔달 리가 없잖아. 그들은 돌아올 수 없었던 거야. 곧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도둑처럼 이사 가던 날. 영수는 꼭 필요한 짐만 박스에 싸서 노끈으로 묶었다. 저녁 어스름 무렵, 관리소장의 눈을 피해 이삿짐센터 일꾼을 불렀다. 일꾼으로 온 남자는 도둑 이사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가 말했다.
다른 사람이 이사 오기 전에는 절대 보내줄 수 없다는 집이었어요. 모르지요, 계약기간이 아직 많이 남았는지, 월세가 밀렸는지. 이십 대의 아가씨였는데 이건 옳다든가 그르다든가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라요. 그것은 그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삶, 그러니까 죄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것과는 좀 달랐지요.
가만 보니 중년의 남자는 인부가 아니라 사장인 듯했다. 그는 영수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신속하게, 이웃들이 눈치 채지 않게 짐을 실었다. 그런데 도둑이사를 갈 필요는 없었다. 관리인은 영수가 나가는 것을 알고도 모른 척한 것 같았다. 회사 소유 아파트를 관리하고 있던 관리인은 보증금뿐 아니라 매달 월세를 관리했다. 세입자가 월세를 내지 못하면 보증금에서 제하고, 그것이 다하면 물을 끊든 소방호스를 가지고 가든 세입자를 내보내는 것이 관리자의 역할이었다. 그러니까 돈이 없는 세입자는 어떻게 하든 집 밖으로 내보내야 했다.
또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저 건너 집에 사는 사람인가? 문 닫히는 소리가 나고 인기척이 난 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영수는 서둘러 아파트를 빠져 나왔다. 불빛이 휘황했지만 의자에 앉아 잠을 자던 경비는 보이지 않았다.
차를 타기 위해 걸어가면서 영수는 오른편의 초등학교를 보았다. 학교는 푸근해 보였다. 부근에는 학원이 없었고, 그다지 여유로운 집도 없었다. 다들 고만고만한 살림살이였다. 선생님들도 차별 없이 아이들을 대해 주었다. 어린 시절 영수가 다녔던 초등학교 같았다.
영수는 시내를 향해 차를 몰았다.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아니 도대체 라는 말은 하지 않을 수 없는가? 더할 수 없이 자신이 형편없이 느껴졌다. 영수는 푸우, 하고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 때 맞은편에서 승용차 한 대가 고함소리와 함께 달려왔다. 어디선가 보았던 장면이라는 느낌이 섬뜩하게 들었다. 이 때 누군가 죽었던가. 순간 차가 가까이 왔다. 앞 유리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고, 운전대를 잡은 남자는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고, 옆에서는 여자가 천연덕스럽게 담배를 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