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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산호 Sep 21. 2024

슬픔의 포도 8


                                   8     

  다음 날 오전 무렵이었다. 

  영수가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핸드폰 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박소희 씨 보호자 아닙니까?”

  “녜. 맞습니다.”

  “어제 저녁에 환자가 대현병원으로 왔는데 데리고 가셔야겠습니다.”

  “환자라니요?”

  “박소희 보호자 아닙니까?”

  “아닙니다. 죽든지 말든지 저는 모릅니다. 병원에서 알아서 하세요.”

  영수는 소희를 데려가라는 전화가 반갑기도 했지만, 화가 치밀어 어느 병원인지 묻지도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는 일하러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공장 밖으로 다시 나왔다.

  “여보세요?” 

  이번에는 병원이 아니라 처형이었다. 

  “병원에서 전화가 왔는데 제가 도저히 가게를 비우고 갈 수가 없어요. 전 서방이 좀 가 봐요.”

  “저하고는 인제 끝났습니다. 제가 어제 전화했잖아요.”

  “그래도 사람이 갑자기 그럴 수가 있나요? 무슨 사정이 있을 겁니다. 오해를 풀고 한 번 가 봐요.”

  “오해는 무슨?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진달래관광 기사하고 도망을 가다니요.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이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영수는 마음이 흔들렸다. 

  “정신병원에 입원할 수 있으면 시켜 봐요. 우리도 도와줄 테니까.”

  “됐어요. 그만 끊겠어요.”

  전화를 끊고 안으로 들어갔지만 잠시 후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제발, 제부 한 번만 가 봐요. 제가 가고 싶지만 갈 수가 없어 그래요.”

  영수는 말없이 그녀의 말을 듣기만 했다. 견딜 수 없는 아픔이 일어났다가 파도처럼 육지를 향해 세차게 달려가고 있었다.

  “좋아요. 일단 가볼게요.”

  전화를 끊고 돌아봤을 때 무슨 일인가 싶어 나온 할머니들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그때 공장장이 뒤에서 나타났다.

  “무슨 일인가?”

  “병원에 데려다 놨는데 도로 데려가라고 하네요.”

  영수는 자신도 모르게 공장장에게 거짓말을 했다.

  “그럼, 어서 갔다 와.”

  공장장의 말에 고마움을 표하고 영수는 차에 올랐다. 가는 내내 그는 우울하게 다가오는 길을 맞이하고 있었다. 아무려면 어때, 인생이란 어차피 이런 거야. 고상하지도 행복하지도 않고. 난 아무 것도 아니지. 고귀하지도 특별하지도 않고. 

  대현 병원에 도착하자, 영수는 원무과로 곧장 걸어갔다.

  “한참을 기다렸어요. 누군가 올까 하고. 그러다 얼마 전에 택시 타고 친정으로 간다고 갔어요. 보호자가 데리고 가기를 거부해서 큰언니한테 전화를 했더니 택시를 불러 가라고 했다고 해서. 여기서 택시를 불러줬어요.”

  원무과 여직원은 몇 번이나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언제 왔어요?”

  “어제 저녁에 119 구급차를 타고 왔어요.”

  “택시 연락처 있어요?”

  “지금 한참 친정으로 갈 텐데.”

  영수는 소희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라는 소희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알아들기 어려울 정도로 작고 웅얼거렸다. 영수는 택시 기사를 바꾸라고 했다. 

  “지금 어디십니까?”

  “화산 가는 고속도로에 있습니다.”

  낯선 택시기사 목소리에 영수는 당황스러웠지만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다시 대현병원으로 돌아오세요.”

  “환자에게 물어보고요.”

  “환자는 그냥 친정으로 간다고 하는데요.”

  “다시 한 번 물어보세요.”

  “환자가 고개를 젓는데요.”

  영수의 목소리에 놀란 원무과 직원들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지나가던 환자들도 힐끔거렸다. 

  “아니 환자가 정상이 아닌데 무슨 말입니까? 택시비는 오면 드릴 테니까 이리 오세요.”

  “알았어요. 환자가 동의하네요.”

  전화통화가 끝나자, 영수는 원무과 여직원을 향해 난폭하게 말했다. 

  “제가 앞으로 무슨 짓을 하든 말리지 말아요. 내가 지금 이 여자한테 무슨 짓을 하든 말이요.”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말한 후 영수는 자신도 몰랐지만 흡족한 기분으로 흥얼거리며 택시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는 주차장을 서성거리며 불량스럽게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피우다가 자신을 힐끔거리는 여자를 향해 담배꽁초를 집어던지기도 했다. 여자들이란 대체 왜 그렇게 생겨먹었지? 혼자 뇌까리기도 했다. 그러자 지금까지 소희와 함께 지냈던 시간들이 가로수처럼 휙휙 지나갔다. 빌어먹을, 제기랄 영수는 기분이 좋아졌다가 거칠게 화를 냈다.

  영수가 소희를 처음 만난 곳은 해운회사 사무실에서였다. 영수는 외항선을 타기 위해 집을 나온 터였다. 취업을 하기 위해 여러 군데 이력서를 넣고 일용직을 전전하기도 했지만 마땅한 곳이 없었다. 육체노동에는 어딘가 모르게 힘이 부족했고 사무직을 하기에는 가방끈이 짧았다. 이 세상이 어쩐지 자신에게 맞지 않는 곳이라는 느낌도 있었다. 부모님이나 가족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그는 마침내 자신에게 가장 적합하리라 생각되는 일을 찾아냈다. 그는 유년시절부터 원했던 일을 하기로 작정했다. 외항선을 타고,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을 떠나는 것이었다. 방랑, 그것은 오랜 그의 꿈이었다. 몇 번이나 집을 나와 방랑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다만 지금까지 알던 세계와 이별하는 순간의 짜릿함이나 홀가분함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었다. 그때 영수가 쓴 시도 남아 있었다. 

  나 이제 떠나려네.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을. 누군가 집 떠나면 고생이라 할지 몰라도 난 지금 이별하려네. 부모 형제들과 이별하려네. 나를 낳아준 고향과 이별하려네. 혼자 모닥불 앞에서 밤을 보내고 늑대의 울음소리를 들으려네. 이곳저곳을 정처 없이 방랑하려네. 나는 이제 피붙이, 일가붙이 아무도 없는 떠돌이라네.  

  해운회사 사무실에서 영수는 소희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소희는 서류를 받아들었고, 다음 날 영수는 봉고차를 타고 바닷가인 영산으로 향했다. 그 날 차에 탄 사람들은 영수를 포함해 여섯 명이었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덩치 큰 애도 있었지만 나머지는 오십을 넘긴 남자들이었다. 자넨 여기 오기는 너무 아깝군. 막장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키 큰 요리사가 영수에게 말했다. 그 날 밤 한 방에서 잠을 자며 대기하던 때를 생각하면 영수는 내내 가슴이 떨렸다. 사형집행장에 끌려가는 사형수처럼 고통스러워하며 일을 나가던 사람들. 그들이 공포에 떨게 된 것은 우울한 숙소 분위기 탓이기도 했지만, 새벽녘에 벌어진 사장의 난동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술에 취해 자신의 돈을 가지고 달아난 경리직원을 욕하더니 웃통을 벗어 제쳤다. 몸은 온통 푸른 용 문신이었다. 그는 어디선가 칼을 꺼내들었고, 놈을 죽이겠다고 아무 곳에나 휘둘러댔다. 승선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까마득한 공포에 떨었다. 얼마 후 사장은 곯아떨어졌지만, 아침을 먹기 전까지 불려가지 못한 세 사람은 슬금슬금 방을 빠져나왔다.  

  며칠 후였다. 시내를 어슬렁거리다 영수는 전화연락을 받았다. 해운회사 경리인 소희가 서류를 찾아가라고 했다. 서류를 찾아가라고? 회사 직원들이 시켜서 그러는 것은 아닐까. 나를 데리고 가려고? 설마 그럴 리가? 그러는 한편으로 영수는 그녀가 어쩌면 자기에게 관심이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여자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영수가 비현실적이고 자기도취가 심하지만, 때 묻지 않고 섬세하다 싶어 호감을 보냈다. 그는 이런 유혹들이 싫지는 않았다. 그도 여자 친구나 애인을 가지고 싶었지만 그건 정신적인 영역일 따름이었다. 현실적이거나 육체적인 것과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그는 편지를 보내거나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몽상에 젖었다.

  그는 회사 직원들에게 들킬까 조심스럽게 찾아간 회사 부근의 다방에서 영수는 처음으로 자세히 소희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단발머리에 안경을 쓰고 있어서 선생님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러다가 길게 뻗은 그녀의 손가락을 보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매끈한 손가락에 영수는 반했다. 그 후 둘은 차츰 가까워졌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택시가 병원에 도착했다. 택시기사가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려 박소희 씨의 보호자를 찾았다.

  “여깁니다.”

  영수는 소리치며 택시를 향해 뛰어갔다. 그는 소희가 앉은 택시 뒷문을 열어젖히고 우악스럽게 팔을 잡아당겼다. 나오려는 순간 소희는 머리를 부딪치고 신음소리와 함께 두 팔로 감싸 안았다. 자신의 행동에 놀란 영수는 어쩔 줄 몰랐다.

  “아, 왜 이러십니까?

  택시기사가 영수를 밀쳐서 떼어냈다. 소희는 택시기사의 부축을 받아 택시에서 내렸다. 그녀는 혼자 설 수도 없는 상태였다.  

  “화장실 좀!”

  영수는 택시 기사가 소희를 부축해 주는 동안 택시비를 지불했다.

  “얼마지요?”

  “8만원입니다.”

  영수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즉시 돈을 꺼냈다. 

  “여기 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 말에 택시 기사는 영수에게 우려의 눈길을 보냈다. 과연 남편이 맞는지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많이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잘 좀 부탁합니다.”

  “예, 그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말에 영수는 택시가 오기 전에 했던 난폭한 생각을 잊어버렸다. 소희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지만 그녀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이, 가엾게 바뀌었다. 영수는 소희를 부축해 화장실로 데려갔다. 소희는 변기에 앉기도, 속옷을 내리기도 힘들어했다. 고통스러워진 영수는 칸막이벽을 보았다. 왜 저를 이곳으로 보내셨나요? 제게 이런 고통을 주러 보내셨나요? 제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닙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자이다. 네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이냐? 내가 그것을 앗아갈 것이니….

  잠시 후 영수는 소희를 데리고 원무과에 들어갔다. 남자직원과 여직원이 나란히 앉았다.

  “아내가 여기 입원할 수 있습니까?”

  “여기서는 더 치료할 게 없습니다.” 치료기록을 보던 남자 직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이해가 안 갑니다.”

  “무슨 일입니까?”

  “처음에 내과로 접수가 됐는데, 변비가 있는 것만으로 입원이 안 되거든요.”

  그 때 소희가 더듬더듬 김영길이 병원의 아는 사람을 통해 입원시켜 주었노라고 털어놓았다.

  “병원 아는 사람을 통해 입원했다고 하네요.”

  영수의 말에 직원은 말이 없었다. 영수가 문득 언성을 높였다.

  “아니, 저는 고작 변비가 있던 사람이 이 지경이 되었나 하는 것이죠. 이해가 안 갑니다. 여기서 문제가 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

  “여기서 문제는 없었어요. 치료하는 중에 정신과 쪽에 문제가 있어 민국대 외래 진료를 보내기로 한 거고요.”

  영수는 더 이상 물어보아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보다 소희의 상태가 더 급했다.

  “혹시 다른 병원 갈 데가 있나요?”

  “옆에 정신병원이 있어요. 거기 가면 받아줄 겁니다.”

  “병실이 있을까요?”

  “확실히는 모르지만 있을 겁니다. 어젠가 알아보았을 때 자리가 있다고 했으니까요.”

  영수는 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소희를 차에 태워 정신병원으로 향했다.

  “처형도 병원에 입원시키라고 했으니까 여기 가까운 병원에 가자.”

  소희는 아무 말이 없었다. 신경정신과 병원 앞에 내려서도 그랬다. 병원은 그다지 큰 규모는 아니었다. 멀리서 보았을 때 방음처리가 된 건물인 듯했는데 가까이 보니 창살 달린 창문이 흡사 고도의 감옥처럼 보였다. 

  접수를 기다리는 동안 영수는 소희의 옆모습을 흘낏 보았다. 이렇게 빨리 사람이 무너질 수도 있다니. 이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기는 틀렸어. 그 때 필경대 위에 매달려 있던 소희가 영수에게 펜을 달라고 했다. 볼펜을 주자, 그녀는 종이에 삐뚤거리는 글씨로 무어라 적고 있었다. ‘소치석 스토커.’

  “이게 무슨 말이야?” 

  영수의 물음에 소희는 말 배우는 아이처럼 옹알거렸다. 몇 마디 알아들었지만 뜻을 알아차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박소희 환자, 보호자와 함께 들어오세요.”

  간호사 호명을 듣자, 영수는 소희를 부축해 진료실에 들어갔다. 간단한 검사가 끝나고 이제 막 머리가 세기 시작한 의사는 그간의 경과를 물었다. 영수는 가능한 한 짧게 대답했다.

  “집에서 지내기 힘들어 그렇습니다. 입원을 했으면 합니다.”  

  “이곳 병실이 모두 찼어요. 입원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집에서 통원치료는 가능합니다만.”

  “아니, 통원치료는 좀 힘든데.” 그 말에 소희가 입을 열고 웅얼거렸다. “나 여기 입원 안 해. 집으로 갈 거야.”

  “녜, 그렇게 하세요. 주위에서 조금만 신경 쓰면 집에서 통원치료를 해도 지장은 없습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는지 영수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병원을 나왔다. 이건 뭘까. 운명이야. 소희는 입원할 운명이 아니었어. 나와 같이 집에 갈 운명이었어. 우리는 고통 받을 운명이었어. 아니 운명이 어디가 있다고, 운명이란 없어. 신이나 조물주가 있다면 운명이 있겠지. 영수는 계속 운명이라는 단어를 써서 말을 지어냈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소희는 무슨 말을 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알아듣기 어려웠다. 괴성이 나오기도 하고 손을 쳐들고 마구 휘젓기도 했다. 며칠 사이에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도 있다니. 어안이 벙벙해 있던 영수는 차츰 소희에게 말을 거는 것이 무서워졌다. 그건 사람 말이 아니었다. 늑대나 야생너구리의 말이었다.

  대명식품에 도착하자, 영수는 공장장에게 집사람을 병원에서 데려왔다고 말했다.

  “병이 길어지면 안 되는데….”

  공장장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영수는 할 말이 없었다. 그의 처분을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수가 없었다. 

  “일단 힘들 텐데 올라가 쉬어.”

  “네, 그럼. 쉬십시오.”  

  저녁 식사 후 영수와 소희는 소파에 앉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전화는 왜 안 받고.” 

  영수는 소희에게 수십 번 수천 번 묻고 싶었지만, 물을 수 없었던 질문을 꺼냈다. 소희는 집에 돌아온 탓인지 한결 안정돼 보였다. 

  “응, 그건….”

  소희가 지난 밤 자신의 행적을 하나 둘 더듬더듬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몇 차례 문자를 보낸 남자는 김영길이었다. 그날 밤, 소희가 집을 나간 밤, 그 자가 아는 민박집에 데려다 주었다는 것이다. 그래, 그놈이었군. 이제 범인을 잡았다 싶었다.

  “그 남자는 참 신사야. 매너가 좋고, 괜찮은 남자야. 내가 아무 것도 준비하지 못하고 그냥 나갔는데 속옷도 한 벌 사가지고 왔더라고. 나를 좋다고 하는데 나는 불륜 같은 것은 싫다고 했어.”

  김영길은 진달래 관광버스 기사였다. 소희가 차고지에 도착해서 버스 청소를 하러 실내에 들어가면, 심심치 않게 식당으로 식사 하러 오라는 쪽지가 운전대에 꽂혀 있었다고 했다.

  그 사이 한 남자가 소희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아주 미미했다. 일을 마치고 갈 때, 혹시 시내로 가는 길이면 차를 좀 얻어 타자는 것이었다. 소희는 별 의심 없이 남자를 태워주었다. 그는 운전기사였고 소희는 버스를 청소했으니. 그 순간 영수는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자신의 어려운 처지가 소희를 사지로 내몬 것 같아서였다. 

  “말을 너무 잘해. 자기하고는 너무 다른 성격이지. 하루는 시내에 내려주고 가려는데 술 한 잔 하자고 하더라고. 나는 술은 못한다고 했는데. 그 남자는 술을 잘 마셨어. 몇 번 그런 일이 반복되고 같이 술집에 가기도 했지. 뭐 별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었어. 그 남자가 좀 궁금했을 따름이었어. 그 남자는 말을 잘했어. 응, 말만 잘했다고 해야 하나. 그는 자신이 돈도 좀 있고 회사에서도 돈깨나 있는 듯 떠벌였는데 실은 그게 아니었나 봐. 차에 다는 오디오 할부도 밀리고, 핸드폰 요금도 밀리고, 양아치 날건달이었던 셈이지. 의도적으로 접근했는데, 나는 그것도 몰랐어. 숨어서 내가 퇴근하기를 기다리기도 했으니까. …아무튼 그러면서 몇 번 만나게 되었는데 이것이 내 발목에 쇠고랑을 채우는 일인 줄 몰랐어. 지금까지 이렇게 나쁜 남자가 있다는 것을 몰랐어. 내가 지금까지 안 남자는 아버지하고 오빠, 당신 밖에 없는데. 이런 인간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자꾸 만나자고 연락이 오고, 내 차를 얻어 타려고 기다리고 하는 것을 견디다 못해 회사를 그만두었는데, 그 뒤에도 자꾸 연락이 오는 거야. 물론 전화를 안 받았지. 그랬더니 이번에는 문자가 오는 거야. 만나자고 한 번 보고 싶다고. 술 한 잔 하자고. 그 놈은 스토커가 맞아, 분명해. 나는 아무 감정 없다, 그냥 몇 번 만난 거 가지고 왜 자꾸 그러냐고 따졌지. 그랬더니 네 남편이 그걸 믿어줄 것 같아? 아니 만나기만 해도 죄가 되는 거지. 안 그래? 세상에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겠어. 나는 어쩔 줄 모르고 속앓이만 하고 있었어. 이런 일이 처음이니까.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자기한테 이야기했다가는 자기가 날 버릴 것 같아 두려웠거든. 점점 무섭고 힘들어졌어. 그 자는 이 동네서 다시는 못 살게 만들 거라고 협박을 하기도 했어. 그래서 할 수 없이 자기에게는 거짓말을 하고 그 놈을 만나러 갔는데. 이놈은 날 가지고 놀 작정이었나봐. 난 아무 관심도 없고 만나고 싶은 생각도 없다, 자꾸 그러면 당신 집에도 알리겠다고 했는데도 내 말은 콧방귀도 안 뀌는 거야. 나는 어찌하면 좋을지 몰랐어. 핸드폰이 끊기게 되었다고 해서 두 번이나 요금을 내주기도 하고. 그러다 결국은 여관까지 따라갔어. 남편에게 알리겠다고 협박하는 데는 당할 수가 없어. 술에 취해서 강제로 옷을 벗기려고 하는데 산적 같은 놈의 힘을 당할 수가 있어야지. 그렇게 새벽3시까지 시달리다가 겨우 도망쳐 나왔어. 한번 당한 뒤로 나도 생각이 좀 달라졌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겠다 싶어 악을 쓰고 대들었지. 그래도 그 놈은 꿈쩍도 않고 욕 문자, 협박하는 문자를 보내는 거야. 온 동네 소문내고 여기서 못살게 하겠다는 거야. 다시 안 만나주면 남편한테 알리겠다고 하기도 하고. 그래서 자기한테 그런 문자가 한 번 온 거야.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부인 몰래 잘 알아보라고….“  

  영수는 소희의 눈을 자세히 보았다. 눈동자가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계속 불안스레 움직이고 있었다. 거짓말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불안한 것일까. 영수는 소희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김영길은 어떻게 된 거야?”

  “이 남자도 자가용이 없어서 태워주었어. 한 번씩 일을 끝내고 오는 길에 집 앞에 내려주곤 했어. 우리 집으로 오는 길목에 살고 있었으니까. 이 남자는 이혼을 했는지 혼자 살고 있었는데 먼저 도움을 청한 건 나였어. 소치석이 협박을 하고 있는데 좀 도와달라고. …나를 도와줄 사람은 이 사람밖에 없었어. 남자 문제니까 자기한테는 입도 뻥긋할 수 없었고. 그래서 그 때까지 소치석이 보낸 문자를 보여주기도 했어. 물론 그것은 소치석이 번호를 바꾸어서 보낸 문자였어. …그러면서 한 번씩 만나게 되었는데 이 사람은 진짜 신사야. 집을 나간 그 날 저녁에도 내가 먼저 도와달라고 문자를 보내게 된 거야. 날 좀 데리러 와 줄 수 없냐고. 그랬더니 어디냐고 묻더라고. 참 할 말이 없었지만 있는 곳을 말할 수밖에 없었어. 이 남자는 언제 그 깊은 산중으로 갔냐고 하더니 한밤중에 날 데리러 왔어.” 

  “그런데 내가 전화를 했을 때 왜 안 받은 거야?‘

  “휴대폰 배터리가 없어서 못 받았어.”

  “안 받은 게 아니고, 꺼 놓았던데. 아예 받을 생각이 없었던 거 같은데”

  “믿어줘. 배터리가 없었어.”

  “그 남자는 왜 전화를 안 받어?”

  “나는 몰라. 왜 안 받았는지. 내가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정신은 없었고. 그 사람이 민박집 할머니한테 이야기해서 죽도 준비해 주고 그랬어.”

  “도대체 왜 그런 거야? 이야기도 안 하고, 나한테 내내 거짓말만 하고.”

  화가 치밀어 오른 영수는 소희의 가슴을 쥐어지르고 말았다. 소희는 푹 꼬꾸라졌다. 이후 영수가 아무리 물어도 소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수는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왔다. 영수는 안주도 없이 술을 마시다가 마침내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왜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젖을 빨았던가? 아내가 이리 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 탓입니까? 저의 죄이지요. 저의 죄!!

  영수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누군가가 말하는 듯했다. 나는 네가 가장 아끼는 것들을 가져가리라. 흐흐 웃음이 나왔다.

  그는 울다가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스스로 물었다.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지? 나는 누굴까? 그가 비실비실 웃고 있을 때 갑자기 소희가 짐승처럼 고함소리를 질러댔다. 우어, 우워! 영수는 소희가 미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저런 소리를 낼 리 없었다. 

  어떻게 밤이 지나가는지 알 수 없었다. 둘은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영수가 잠이 깼을 때 소희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는 거야?”

  “우리 집에 갈 거야.”

  “지금 이래가지고 무슨 집에 간다는 거야?”

  소희는 막무가내였다. 영수가 말릴 새도 없이 집을 나섰다. 잠옷을 입은 채로 영수는 소희를 따라 나섰다. 소희는 금세 넘어질 듯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영수는 다급해졌다. 여기서 그녀를 놓치면 어디로 갈지 알 수 없었다. 다리를 건너 공장장 집 아래 길까지 갔다. 영수는 소희를 막아섰다.

  “차 열쇠 가져올 테니까 기다려.”

  영수는 소희에게 애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필요 없어, 다 필요 없어. 갈 거야.”

  소희는 가려고 몸을 움직였다. 무릎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엉거주춤 걷는 것이 넘어질 듯 불안했다. 팔을 잡으려 했지만 소희는 그 손을 뿌리쳤다. 

  “조금만 기다리라구.”

  “비키라구. 나는 갈 거야. 울 엄마한테 갈 거야.”

  얼마 전부터 위에서 공장장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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