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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산호 Sep 28. 2024

슬픔의 포도 10

  10

  

  영수와 할머니들 사이에는 약간 거리가 있었다. 영수는 조립식 건물 2층 방문 앞에 서 있고, 할머니들은 얕은 오르막 끝에 걸린 다리를 막 건너고 있었다.

  “할머니, 오늘도 일찍 오시네요.”

  영수가 두 손을 높이 들고 흔들면 할머니들도 굳은살이 박힌 손가락을 펼치고 천천히 흔들었다. 

  “새댁은 좋아졌소?”

  한 사람이 말하면 다들 질세라 좀 괜찮소, 애들은 학교 갔소, 라고 두 마디 세 마디씩 했다. 영수는 할머니들을 만나러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아직 나이가 젊어 할머니들에게 새댁으로 불린 소희는 아직도 일을 나가지 못하고 집에 누워만 있었다. 할머니들 중 영천댁은 가장 나이가 많았는데 머리가 하얗고 허리는 굽어 있었다. 그렇지만 환하게 웃는 모습이나 소희를 걱정해 주는 모습에는 정이 넘쳤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 

  영수를 보더니 손티가 있는 녹동댁이 소리쳤다. 

  “무얼 말인가요?”

  일행 중 가장 젊은 옥봉씨 물음에 녹동댁이 대답했다.

  “병천에 있는 병원을 알려주겠다고 했는데 명함을 안 가지고 왔구만 그래.”

  녹동댁이 영수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조금 있다 차 타고 집에 좀 갔다 와. 아저씨한테 이야기 해 놓을 테니까 명함을 줄 거야. 그 집이 그렇게 용해. 전국각지에서 온 환자들이 줄을 섰어.”

 키가 작지만 야무진 봉상댁이 거들고 나섰다.

  “내가 영감 죽고 잠이 안 와서, 거기 가서 약을 받아 좀 먹었는데 저녁만 먹고 나면 잠이 와. 스르르 잠이 오는데 그 의사 선생님 아니었으면 내가 벌써 죽었을 거야.”

  봉상댁은 지난 일을 회상하는 듯 하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그 때였다. 둘째 다예가 땀을 뻘뻘 흘리며 공장으로 들이닥쳤다. 

  “아빠, 엄마! 큰일 났어! 언니가 다쳤어. 큰일 났어! 다리에 피가 나고.”

  “뭐라고? 큰일 났구먼, 큰일 났어.”

  할머니들이 자기 일처럼 걱정을 하고 나섰다. 맨 뒤에 올라오던 공장장도 다녀오라고 손짓을 했다. 

  “오는 길에 꼭 집에 갔다가 와.”

  녹동댁 부탁에 영수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 때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소희였다. 무어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다급해지자 그녀의 목소리는 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웅웅웅웅!” 소희는 손도 마구 휘저어댔다.

  “알았어. 알았어!”

  부랴부랴 영수는 다예를 데리고 주차장까지 뛰었다. 

  “피가 많이 나는 것은 아닌데 찢어진 데 뼈가 다 보여.”

  가는 동안 다예가 말했다. 

  “알았다. 빨리 가자!”

  “올라오는데 쉬지도 않고 뛰어왔어.”

  버스 정류장에서 공장까지는 오 리는 되었는데 산길이었다. 영수는 놀란 다예의 볕에 검게 그을린 얼굴을 보았다. 땀이 범벅이었다.

  잠시 후 그들은 자작 2리 정류소에 도착했다. 다희는 다리를 잡고 등을 구부린 채였다.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

  다희가 다리를 폈다. 왼다리 허벅지 부분이 찢어져 안이 하얗게 드러났다. 영수는 얼른 아이를 안아 차에 태웠다. 놀라서 아무 말이 없었지만 울지는 않았다.

  영수는 그 길로 정주 시내를 향해 달렸다. 강변로를 따라 달리다가 화명로로 내려오면서 영수는 아는 병원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디로 가야할까. 하는 수 없어. 일단 거기로 가자.

  영수는 다희를 데리고 중앙시장 사거리에 있는 대현병원으로 갔다. 아는 병원이 그 곳밖에 없었다. 

  “애가 팔이 찢어졌어요!”

  그 말에 고개를 돌린 응급실 의사가 영수를 알아보았다. 겸연쩍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니, 바로 그 보호자!”

  “그 땐 죄송했습니다.”

  영수는 고개를 숙였다. 의사는 다시 한 번 영수를 보더니 상처소독을 시작했다. 혹시 그때 벌인 소동 때문에 의사가 소홀히 치료할까 두려워졌다.

  며칠 전 영수와 소희는 담당의사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어떤 병세로 입원이 결정되었는지 그간 어떤 치료를 행해졌는지 알고 싶었던 탓이다. 변비로 인해 스스로 걸어 들어갔던 병원에서, 나올 때는 걸을 수 없고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강변했지만, 의사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변명했다. 가만 생각해 보니 토요일에 약을 탈 때 했던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이 약은 절대 많이 주면 안 되는데, 이거. 하여튼 제 때 조심해서 먹이시오. 

  그 약이나 처방전이 있었다면 싶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이미 병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치료를 했구요.”

  “그럼 차트를 볼 수 있습니까?”

  영수의 말에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화가 난 소희가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문 옆에 있던 컴퓨터를 들이 엎었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병원이 아수라장이 된 듯했다. 그 때 병원사람들과 환자들이 몰려들어 구경을 했다.

  “사람이 이 지경이 됐는데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글쎄 내 잘못이 아닙니다.”

  “정신과 약을 함부로 써도 됩니까?”

  소리를 질렀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소희가 진료실 안으로 급하게 들어오던 소희가 들어서며 컴퓨터를 짚으며 넘어졌다. 그때 사이렌 소리와 함께 경찰관 둘이 나타났다. 사람들 시선이 모조리 경찰관에게 향했다. 경찰관들은 진지한 태도로 영수와 의사에게 설명을 듣고 질문을 했지만,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여기서 무엇을 판가름할 수 없습니다. 고소를 통해 해결하십시오.”

  경찰이 떠나고 난 후 영수와 소희는 터벅터벅 병원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다희를 데리고 다시 이 병원으로 온 셈이었다. 영수는 그 점이 고통스러웠다. 게다가 의사가 영수를 곱게 볼 리 없을 터였다.

  그 사이 의사는 서둘러 마취제를 놓고 살이 떨어져 나간 다리의 표피를 잡아당겨 꿰맸다. 고통스러워하던 다희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일단 꿰맸으니 약을 먹고 일주일 동안은 치료를 받으러 오세요.”

  “매일요?”

  “녜, 소독을 해야 합니다.”

  대현병원을 나서며 영수는 이곳이 예사로운 곳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수차례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어야 하는 인연이 있을까. 

  “괜찮아?”

  다희는 말이 없었다. 놀란 탓인지 아프다는 말도 못하고 있었다. 눈물이 흘러 얼굴을 적셔 놓았다. 

  “인제 가면 돼, 아빠?”

  “그래! 학교로 갈까?”

  “응!”

  다희를 학교 앞에 내려주고 돌아오면서 영수는 녹동댁 집에 들렀다. 녹동댁 남편은 얼굴에 주름살이 가득한 오십대의 농부였다. 그는 잠시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루에 선 채로 영수에게 명함을 한 장 건네주었다. 진오양 신경정신과 의원. 뒷면에는 병천 국민은행 부근의 약도가 있었다. 

  다음 날 영수는 소희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영수는 운전하는 내내 말이 없었다. 소희도 차창 밖 풍경을 보기만 했다. 엑셀은 지방도를 따라 달렸다. 남천 가는 길을 따라가다가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차는 들판 가운데에서 달려갔다. 어쩌다 산들이 나타나고 포도밭이 이어졌다. 어디에서 내려야 하지. 병천농공단지로군. 영수는 갓길에 차를 세우고 명함을 보았다. 도로는 한산했다. 행인들도 많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사거리에 있는 병원을 향해 달렸다.

  엑셀을 주차한 후 영수는 소희를 업기 위해 등을 갖다 댔다. 소희가 잠시 머뭇거렸다. 그는 지금껏 소희를 업어 본 적이 없었다. 애정의 표시로도 그랬다. 소희는 여자로서는 키가 컸고 체구도 작지 않았다. 영수가 업지 않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소희 쪽에서 부담스러워했다. 곧 십여 개의 상가 계단이 나타났다. 

  영수는 낑낑거리며 계단에 발을 올려놓았다. 계단을 다 오르자, 엘리베이터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나중에 소희가 그때 어떻게 올라갔어, 하고 물으면 영수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잘 모르지. 무슨 힘이 생겨 계단을 올라갔는지 모르지. 사실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어.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것 같았어. 영수는 계단을 따라 2층 병원을 향해 걸음을 떼었을 따름이다. 

  마침내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 가만, 다른 병원과 다른 풍경이 영수의 눈에 들어왔다. 진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이상하다 싶었지만 누구도 문제 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 누구에게 묻기도 힘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에서는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것은 병원의 배려였다. 환자들은 긴 소파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진료를 기다렸다.  

  영수는 소희를 소파에 눕히고 접수대를 향해 걸어갔다. 간호사도 일반 병원의 간호사들과 달랐다. 그들은 자리에 앉아 있지 않았다. 환자에게 물을 주기도 하고, 먹을 것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환자들이 시시콜콜한 것을 물어도 귀찮아하지 않고 대답해 주었다. 

  “좀 기다리면 될 거야.”

  접수를 마친 영수는 소희 옆에 앉았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들을 가여운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젊은 사람이 어쩌다가 저리 되었나, 라는 속삭임도 들었다. 누군가 의사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기도 했다. 의사는 병천 정신병원에서 일하다가 개업한 의사로 각지에서 환자가 몰려들고 있었다. 

  “박소희 씨, 안으로 들어오세요.”

  영수는 소희를 부축해 진찰실 안으로 들어갔다. 의사는 사십 대 후반이나 오십 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목(目)형 남자였다. 영수가 소희를 대신해 그간의 일을 빠르게 말했다. 신용불량자가 된 이야기며 우연히 취업한 관광버스 회사 운전기사에게 스토킹과 성폭행을 당하게 된 사정을 털어놓았다. 이후 형편이 어려워 산중의 식품회사로 이사 온 일과 갑자기 찾아온 심한 변비, 일하다 말고 대현병원에 입원하게 된 경위 등. 영수는 말하는 동안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이미 내친김이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법정에 가기 전에 이루어지는 경찰 조사, 검찰조사에서 부끄럽고 고통스런 일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말하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소희 입으로 대답하고, 그 입으로 대답하고 또 그 입으로 대답하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그동안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약물 중독으로 보입니다. 같은 의사로서 말하기 쉽지 않지만, 정신과에서 취급하는 약은 미세한 양으로도 신경에 영향을 줄 수가 있는데, 전문 지식도 없는 외과의사가 과도하게 약을 처방한 것 같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에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이런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약물중독이라고 들어보셨지요? 사람을 죽이거나 바보로 만들 수도 있지요. 아무튼 이런 식으로 고통 받는 분들이 많이 옵니다.”

  의사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단호한 표정이었다. 어쩌면, 하는 희망에 영수는 눈이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제가…그 병원에 들어가기 전에는… 걸어서 들어갔는데 나올 때는… 제 힘으로 못 나왔지요.”

  소희가 더듬거리며 말했지만 알아듣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일단 제가 해독제를 쓸 겁니다. 링거를 맞아야 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지요. 그리고 나중에 집에 가서는 포카리스웨트 같은 이온음료를 틈나는 대로 자주 마셔야 합니다. 진료 끝나고 댁에 가면서도 바로 사서 드세요. 아마 링거를 맞고 나면 걸어서 집으로 갈 힘이 생길 겁니다. …제가 처방한 약은 전국 각지에서 어렵게 구한 약들인데 부작용 없는 것들입니다. 안심하시고 치료를 받으시면 될 겁니다. 좋아질 것이니 걱정만 하지 마시고.”

  “일주일에 한 번씩은 오실 수 있지요?”

  “녜, 와야지요.”

  영수가 서둘러 대답했다. 소희는 눈을 감았다가 동그랗게 떴다.

  “일주일에 한 번씩 진찰하고 약을 받아가도록 하세요. 나중에는 약을 좀 늘리도록 하겠습니다. 옆에 치료실로 가십시오.”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왔다. 곧 치료가 시작되었다. 소희가 침대에 누워 수액을 맞는 동안 영수는 대기소파에 앉아 기다리기로 했다. 젊은 환자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할머니들이었다. 인근 도시뿐 아니라 거제도, 대전 등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씩 오는 듯했다. 

  문득 공장 일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을 걱정이 되며 공장장 얼굴이 떠올랐다. 그물이 쳐진 자두나무 밭의 풀을 베고 난 후 공장장이 잠시 쉬는 동안 땀을 닦으며 말했었다. 

  “요새 전씨 좀 힘들지요?”

  “저야 괜찮습니다. 아내가 식당 일을 못해 걱정이네요.”

  “여자들이란 게 그렇잖아요. 나는 그럴 마음이 없는데도 마누라가 힘들다고 볶으니 나도 그러는 거지요.”

  코끝이 찡해진 영수는 눈물을 찔끔거렸다. 그러는 사이사이 공장장의 물방울처럼 동그란 얼굴을 힐끗 보았다. 지금 그는 그럴 마음이 없어보였지만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집을 비워줘야 했다. 영수는 공장장이 더할 나위 없이 선량한 사람임을 믿고 싶어졌다.  

  “잠깐 이리 와 보세요. 여기가 선생님이 공부를 했던 곳입니다.”

  영수는 귀가 솔깃해서 공장장 뒤를 따랐다. 바위 사이로 흐르는 물 옆에 촛대가 세워져 있었다. 

  “바로 여기요.”

  바위 아래 문이 달려 있었다. 이곳에 누가 산다는 말인가. 언젠가 찾았던 현곡의 용담정을 보는 것만 같았다. 도를 구하던 최제우가 시천주의 종교체험을 한 후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무극대도(無極大道)를 창시했다. 정주도 계룡산만큼 도인들이 많았다. 

  공장장은 방문을 열었다가 안을 들여다 본 후 다시 닫았다. 

  “여기서 선생님이 동의보감을 읽고 대명사혈에 대한 책을 쓰셨습니다.”

  이곳은 대명사혈의 성지인 셈이었다. 지극한 예를 갖춘 듯 말하는 공장장에게 영수는 왜 동서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물을 수는 없었다. 

  “어서 자네 집사람이 좋아져야 하는데. 식당보다 자네 집이 걱정이네.”

  “좋아질 겁니다. 우환도 끊어질 날이 오겠지요.”

  이 말을 한 후 영수는 덜컥 후회했다. 금기를 깨뜨린 듯 불안해졌다. 이 직감은 맞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큰애가 다치는 사고가 일어났다. 불행은 어깨동무를 하고 온다더니. 어디선가 듣고 있었던 귀신이 나를 시험하기 위해 벌인 짓일까. 그래서 내 혀는 그것을 눈치 채고 내게 이런 말을 했고. 영수는 휴,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일임을 어쩌랴.

  지난 일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신혼 초부터 고부간의 갈등은 극심했다. 어머니는 영수에게 변했다, 다른 놈은 몰라도 너는 그럴 줄 몰랐다며 울부짖었다. 영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어라 변명이라도 할라치면 어머니는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화살은 소희에게도 돌아갔다. 극단적으로 변한 어머니는 사돈에게까지 못할 짓을 했다. 며느리를 어찌 그렇게 키웠느냐며 모욕적인 말을 퍼부어댔다. 한동안 영수는 인연을 끊고 왕래를 하지 않는 상황까지 왔고, 급기야 실업자가 되었고 카드빚이 늘어갔다. 그들이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교회 할머니에게 빌렸던 돈. 그것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때 그들은 산중으로 들어왔다.

  얼마 후 침상에 누워 있던 소희가 밖으로 나왔다. 비틀거리기는 했지만 혼자서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좋아져 있었다. 영수는 도대체 어찌된 일인지 눈을 비비고 보았다. 의사선생님이 요술이라도 부렸는가 보았다.

  “해독이 많이 되었는데 아직도 약 기운이 남아 있어요. 아무 것도 하지 말고 푹 쉬고 잠을 자야 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계속 이온음료 마시고 해독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에 꼭 오시구요.”

  그들은 몇 번이나 의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올 때는 소희를 업고 왔지만 갈 때는 혼자 갈 수 있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영수는 하늘을 보았다. 교인이 아니었지만 어디선가 읽은 성경 구절이 떠올랐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라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가는 길은 발걸음이 가벼웠다. 영수는 소희의 손을 가볍게 잡아주었다. 마치 아이에게 걸음마를 시킬 때처럼 행복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희의 병이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몇 번이나 되뇌었다. 

  저녁부터 소희는 약을 먹은 후 겨울잠에 든 반달곰처럼 깊은 잠에 빠졌다. 거의 깨지 않고 아침까지 늘어지게 잤다. 낮에도 마찬가지였다. 식당에 가지 못해 영수가 식사를 가져다주면 그것을 먹고 곧 다시 잠이 들었다. 이것이 불안하기는 했지만 영수는 의사의 말을 믿고 싶었다. 아니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싶었다.

  그러다가 한 번씩 소희의 울부짖는 소리가 아래층까지 들려왔다. 그 때마다 옆방에 있던 아이들이 뛰어갔는데 그녀는 이성을 잃고 날뛰고 있었다. 

  “아빠, 아빠! 엄마가 이상해.”

  아이들이 부르는 소리에 놀란 영수가 뛰어올라가 보면 그녀의 요구는 별 것이 아니었다. 목이 타서 물이 먹고 싶거나 화장실에 가고 싶어 괴성을 질러댄 것이었다. 아이들이 알지 듣지 못했을 따름이다. 영수는 크게 벽에 써 붙여 놓았다. 약, 물, 화장실. 

  “애들아, 엄마가 말을 잘 못하니까 엄마한테 이 중 하나를 짚어보라고 해? 알겠지?”

  “응, 아빠!”

  이후 괴성을 지르는 일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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