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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산호 Sep 07. 2024

슬픔의 포도 4

       4     

  처음에 영수는 공장장과 친해질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지금까지 다녔던 직장과 달리 대명식품에서는 주택과 식사를 제공하고 있었다. 이것은 호의라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달리 생각하면 끔찍했다. 공장장 말 한 마디라도 거스르게 되면 그는 집을 비워주어야 했다. 영수는 그 어떤 능력보다 공장장의 눈에 들어두는 것이 중요함을 몇 번이나 잊지 말자고 다짐했다. 누가 말했지. 비겁하게라도 살아남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비겁하게? 아, 그렇게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아무튼 공장장에게 잘 하렴. 

  그는 익은 감빛 생활한복에 하얀 고무신을 신은 공장장이 식당에 모습을 드러내자, 의도적으로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영수가 이렇게 말하면 공장장은 쳐다보지도 않고 건성으로 말했다.

  “예! 많이 드세요.”

  공장장의 말에 영수는 말없는 머슴이 된 것처럼 허겁지겁 밥을 먹기 시작했다. 넌 누구냐? 난 더부살이하는 일꾼이지. 그래, 맞아. 스스로 말하면서 공장장을 보았다. 공장에서 일할 때와 달리 그는 무게를 잡았다. 좀 이상해. 하긴 입고 있는 옷이나 품위 있게 밥을 먹는 것도 그런 것 같아. 무슨 상관이겠어. 그는 스스로의 지위에 맞는 행동을 하고 있을 따름이야.

  그 때 사십 대의 남자가 식당에 모습을 드러냈다.

  “관리과장!”

  공장장이 남자를 불러 세웠다. 남자가 공장장 쪽을 보았다. 

  “요즘 지부에 문제가 좀 있는가?”

  공장장 말투가 이상했다. 영수 또래밖에 안 되는 과장은 아직 귀때기가 새파랬는데 공장장은 경어 비슷한 어투를 구사했다. 

  “이 사람들이 우리가 공급하는 물건만 취급해야 하는데, 다른 물건들을 몰래 가져다 파는데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내게는 함부로 전씨, 전씨 하는 공장장이 과장에게는 쩔쩔매는 이유가 뭘까. 영수는 그것이 궁금했지만 대화는 계속 진행되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둘의 대화를 듣고 있었기 때문에 관리과장은 공장장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일부러라도 공장장 옆에 가서 밥을 먹을까. 이렇게 생각하기도 했지만 공장에서 일하는 시간으로도 충분했다. 오전 8시부터 저녁 5시까지 많은 시간을 공장장과 함께 있어야 했고, 때로는 공장장을 대신하여 할머니들에게 지시를 전달하고 공장장과 단 둘이 일을 하기도 했다.  

  오후가 되자, 공장 안에 딸린 작은방에 직원들이 모두 모였다. 공장장 마누라가 플라스틱 병에 검은 환을 담으면, 옆에 앉은 할머니가 뚜껑을 닫고 종이 박스에 넣으면, 다음 할머니가 쉽게 먹을 수 있도록 만든 보조용기와 설명서를 넣었다. 도사는 어떻게 이런 제품을 만들 생각을 다 했을까. 몇 가지 약초가 들어갔을까. 어떤 효과가 있는지 모르지만 대단한 발명이로군. 영수는 속으로 감탄했다. 

  “이건 대명원이라는 제품인데 전국에 있는 우리 지부에서 15만원에 팔리는 물건입니다. 조심히 다루세요.”  

  15만원이라는 공장장 말에 영수는 입을 쩍 벌렸다. 그 사이 공장장이 밀어내는 종이박스가 눈앞에 빠르게 쌓여갔다. 영수는 종이박스 12개를 큰 박스에 담아 트럭에 실었다.

  “내 친구한테 이것을 선물로 줬는데 무슨 약효가 있냐고, 이놈이 그래. 한참 설명을 해주었지. 그런데 이 놈이 주는 사람 성의도 생각지 않고 처박아 놓았길래 당장 내 놓으라고 하려다가 참았어요. 이것이 아무 약효가 없으면 대명 선생님이 무엇 때문에 힘들게 연구해서 만들고, 사람들이 또 너도나도 사먹겠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할머니들도 대명원을 먹어보지 못했다. 일하다가 흘린 환을 몇 개씩 집어먹기는 했지만 비싼 약을 사먹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대명원 포장박스는 붉은색이었다. 가만히 보니 그 안에 들어가는 플라스틱 통에 검은 머리와 수염을 길게 기른 대명도사의 얼굴이 타원형 안에 인쇄되어 있었다. 아직 많은 나이로 보이지 않는데 수염을 기른 이유는 뭘까. 한국에서는 낯선 모습이었다. 영수는 옆면에 인쇄된 FDA승인마크도 보았다. 그럼 미국 식품의약국의 승인을 받은 것인가. 알 수 없지, 가짜인지도. 그렇지만 사실이라면 대단하지 않은가. 공장 안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도 이것과 관련이 있어보였다. 참 대단한 아이디어로군. 약재 몇 개를 가지고 만병통치약을 만들어내다니. 영수는 또다시 감탄하고 있었다. 

  영수는 밀려오는 약을 종이박스에 담아 4.5톤 트럭에 한 상자씩 실었다. 혼자서 바삐 실으려니 갈수록 힘겨워졌다. 무겁기보다는 부피가 커서 트럭 위에 들어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박스를 트럭에 올린 후 다시 영수는 빈 박스를 펴고 자리에 앉았다. 

  그 때 공장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손을 들어 밖을 가리키며 영수에게 나가보라는 표정을 지었다. 영수는 퍼뜩 걸음을 옮겼다. 소희가 공장 앞에 서 있었다. 어딘가 위태롭게 보였다.

  “나 병원에 좀 갔다가 올게. 몸이 안 좋아.”

  “그래? 혼자 갈 수 있어?”

  일하던 할머니들과 공장장이 두 사람을 안타깝게 보고 있었다. 그것이 의식되어 영수는 더 이상 무어라 말하기 곤란함을 느꼈다. 소희도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영수는 호주머니에서 자동차 키를 꺼내 그녀에게 주었다.

  “밑에 좀 잠깐 갔다 올게요.”

  영수의 말에 공장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수는 소희를 부축해 다리 아래 주차장까지 내려갔다. 지친 아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안에 갖가지 슬픔과 어려움이 담겨 있었다. 차에 오른 소희가 시동을 걸었다.

  “나중에 연락할게.”

  소희는 영수를 보지 않고 말했다. 그녀는 엑셀을 몰고 무릉도원 대명식품을 빠져나갔다. 영수는 엑셀이 순식간에 벚나무 길을 통과하여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그날 밤 영수는 식당에서 아이들과 저녁을 먹고 공장장을 찾아갔다.

  “공장장님! 공장장님!”

  몇 번의 부름 끝에 공장장이 철제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무슨 일로?”

  공장장은 이쑤시개를 입에 물고 있었다. 

  “집사람이 병원에 입원했다고 합니다.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그러면 갔다 와. 나한테 이야기할 거 있는가 갔다 오면 되지.”

  영수는 몇 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저 차 좀 빌려주셨으면 해서요.”

  영수는 공장장 집 앞에 세워진 상아색 카니발을 보았지만 그것을 빌려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차는 무슨 차?”

  “공장 건물 앞에 있는 트럭이요.”
   공장장은 머뭇거리다 영수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저 차는 회사차야. 얼마 전에 조카가 와서 빌려달라고 했는데도 안 빌려준 거야. 한 번도 사고 난 적도 없고 말이야.”

  영수는 공장장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안 된다면 다시 한 번 사정을 해봐야지 생각하고 있을 때,

  “알았어.” 

라고 말한 후 공장장이 철제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는 자동차 열쇠를 들고 나왔다.

  “조심해서 갔다 와야 돼.”
   “예, 알겠습니다.”

  자동차 키를 받아 든 영수는 집으로 들어가 아이들에게 옷을 입혔다.

  “엄마가 병원에 있는데 가 봐야 돼.”

  “엄마가?”

  큰 애 다희가 물었다. 

  “엄마한테 간다고? 어디가 아파?”

  둘째도 덩달아 물었다.

  “응, 그래. 가보면 알거야.”

  잠시 후 영수는 아이들과 함께 오톤 트럭에 올랐다. 언젠가 오톤 트럭을 운전한 적이 있었지만, 차체가 크고 새 차여서 흠집이라도 생길까 부담스러웠다. 영수는 시동을 걸고 아주 천천히 위태로운 다리를 건넜다. 벚나무 가지가 창문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벚꽃 핀 작천정의 밤이 떠올랐다. 하늘에 구름이 내려온 것처럼 하얀 벚꽃이 나무 위에 둥둥 떠 있었다. 아니 구름이 아니라 흰 눈 같았다. 설레고 있었던 영수는 처음으로 소희에게 고백했다. 

  “소희씨, 사랑 해. 하늘만큼 땅만큼.” 

  그 말에 소희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내 소원을 들어줄 수도 있겠네.”

  “그럼, 무슨 소원이라도.”

  “저 하늘의 별이 필요해.”

  영수는 하늘로 올라가는 듯 팔다리를 허우적거렸고, 슈퍼맨처럼 한 손을 높이 치켜들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시 땅에 내려오는 듯 발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아, 별은 너무 멀어. 사다리도 없고. 대신 구름을 가지고 왔어.” 

  영수는 벚나무에서 꽃잎 몇 개를 따서 그녀에게 바쳤다. 소희는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것을 집어 들며 웃었다. 

  진입로를 빠져나가는 동안 아이들은 몇 차례 더 물었다.

  “어디 있는 병원이야?”

  “정주 시내 있는 병원이래.”

  “응, 알았어.”

  가로등이 없는 길은 캄캄하고 인적이 거의 없었다. 이것이 낯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유년시절 시골에 살던 기분 그대로였다. 그때는 아무 걱정이 없었다. 무엇을 얼마나 가져야 행복할지 생각하지 않았다. 이따금 차들이 한 대씩 휙 지나가며 영수에게 강하게 라이트를 쏘았다. 잠시 장님이 된 것처럼 아무 것도 볼 수 없다가 시력을 되찾았다. 갑작스런 빛의 세례를 받으면 그렇게 되는 것을 예전에는 몰랐던 듯 새삼스러웠다. 도로변에서 멀지않은 곳에 마을이 더러 있었다. 여러 개의 불빛이 한 데서 뭉쳐 빛나며 등불인 양 길을 안내했다.

  영수는 대현병원 앞 도로에 차를 세우고 안으로 들어갔다. 소희는 2층의 다인실 침대 하나를 차지하고 누워 있었다.

  “대체 어찌 된 거야? 병원도 안 알려주려고 하고.”

  “조용히 있을라고 그랬지.”

  “오지 말라고 해도 안 올 수가 있나?”

  “무슨 큰 병이라고? 조금 있으면 갈 텐데 자기라도 잘 해야지.”

  “아이 참, 걱정시켜 놓고는.”

  그 말에 소희는 대답은 않고 아이들을 불렀다. 그녀의 부름에 아이들이 달려가 품에 안겼다. 그녀는 아이들을 오랫동안 끌어안고 있다가 풀어주었다. 그 때에야 영수는 주위 환자들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할머니들이 대부분이었다.

  “안녕하세요?”

  영수는 할머니들을 향해 이곳저곳 인사를 했다.

  “신랑인갑네. 애들하고. 그러면 낮에 수박 사 온 사람은 누군데?”

  문 쪽 침대에 누워 있던 할머니가 물었다. 이 말에 영수가 소희에게 물었다.

  “누가 왔었어? 교회 할아버지? 아니면 포항의 그 사기꾼놈?”

  “아니, 다른 사람.”

  소희는 고개를 젓더니 침대 밑으로 손을 넣어 끌어당겼다. 

  “이것 좀 빨아다 줘. 샤워실 가서 비누칠하고, 그냥 주물주물 좀 하면 돼.”

  소희는 속옷을 꺼내 놓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적이 있었던가. 놀란 영수는 묻지도 못했다. 그는 속옷을 수건에 싸서 들고 병실을 나왔다. 2층은 여자 병실인 듯 오가는 환자는 모두 여자였다. 그는 조심조심 화장실에 딸린 샤워실 안으로 들어가려다 하마터면 여자 환자와 마주칠 뻔했다. 영수는 헉, 하고 놀랐지만 환자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는 팬티와 브래지어에 비누칠을 하고 조심조심 문질렀다. 아내의 속옷을 빨아본 지 오래였다. 문득 신혼 때의 달콤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한 번씩 시댁 문제가 괴롭혔지만 둘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 당시에는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저 행복하다고만 생각했다.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사람이라더니. 고통이 밀려오더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하긴, 앞일을 안다면 사람은 행복할 수 없을 거야. 그래서 신은 인간이 앞일을 볼 수 없게 커튼을 쳐버린 거야.  

  병실로 돌아온 영수는 환자들 보기 부끄러웠지만 침대 뒤에 팬티와 브래지어를 걸쳐놓은 후, 병상에 앉았다. 소희는 아이들과 함께 다른 환자의 병상에서 놀고 있었다.

  그 때 메시지가 왔음을 알리는 핸드폰 음이 짧게 들렸다. 영수는 침대에 놓인 소희의 핸드폰 폴더를 열었다.

  ‘포항에서 8시에 출발합니다.’ 

  도대체 누구일까. 영수는 자신에게 사기를 치고 달아난 놈이 아닐까 싶었다. 다른 메시지도 눈에 들어왔다. 

  ‘병실에 갔더니 없어서 응급실에 죽을 놔두고 갑니다.’

  같은 사람이 보낸 메시지 같았지만 소희에게 묻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 놈이 누구이든 무슨 상관이야. 풍마우불상급이지. 그는 소희가 아픈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었다. 그녀만 제자리로 돌아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떤 어려움도 이길 수 있을 텐데. 

  “어서 공장으로 가. 애들도 재우고 내일 일도 해야지.”

  “의사 선생님은 뭐래?”

  “검사를 했으니 결과가 나와 봐야 안 대.”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어서 가 봐. 자기라도 잘 해야지. 그래야 거기서 안 쫓기고 애들하고 살지.”

  “그렇기는 하지만. 좀 있다 가야지.”

  소희는 몇 번이나 영수를 채근했다. 

  “필요한 건 없어?”

  “응, 내가 알아서 할게.”

  나오기 전에 소희는 아이들을 다시 한 번 끌어안았다.

  “내일 또 올게.”

  영수의 말에 소희는 힘없이 웃었다.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아이들이 작은 손을 흔들었다.

  “이제 오지 마. 공장에 눈치 보이잖아.”

  “그래도 와야지.”


  3일 후였다.

  병상에서 내려온 소희는 제대로 걷지 못했다. 발을 떼는가 싶더니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비틀거렸는데 금방 자리에 주저앉을 것 같았다.

  “이게 대체 어찌된 거야?”

  놀란 영수의 말에 소희는 대답할 새도 없이 다급하게 소리 질렀다.

  “휠체어 좀! 빨리!”

  영수는 급히 복도에 있는 휠체어를 가지고 왔다. 

  “자, 여기!”

  소희는 휠체어에 겨우 앉았다. 가쁘게 숨을 헐떡였다.

  “민국대병원에 검사를 받으러 가야 돼. 예약해 놨어.”

  소희의 말은 어눌하고 알아듣기 힘들었다. 

  “어떻게 해서 이 지경이 된 거야? 검사는 무슨 검사?” 

  “일단 가!”

  소희는 말을 하는 것이 힘든 듯 짜증스럽게 악을 썼다. 영수는 소희를 뒷좌석에 태우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삼 일 사이에 소희는 놀랄 만큼 나빠져 있었다. 이제 아무 것도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어 보였다.

  영수는 민국대학병원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여기 내려, 여기!”

  영수는 소희를 부축해 천천히 걸어갔다. 현관문 앞에서 소희가 두 손을 엉덩이 아래에 갔다 댔다.

  “휠체어?”

  “응.”

  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수는 휠체어를 가져다가 그녀를 태웠다. 휠체어가 뒤로 밀려서 몇 번이나 애를 쓴 끝에 그녀를 태웠다. 이마에 땀이 맺혔다. 잠시 후 그는 휠체어를 밀고 현관문을 통과했다.

  “이제 그만 가봐!”

  “무슨 소리야?”

  영수도 소희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소희는 공장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자꾸 영수를 밀어내기만 하고 있었다. 간혹 우리는 지나칠 정도로 서로 잘 맞았지. 주위 사람들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사랑했고. 이것이 신의 질투를 불러왔을까. 그래, 한 번 시험을 해 보고 싶었을지 모르지. 네깟 놈이 견디나 보자, 하고 말이야. 그렇다면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생각해야 하지.

  “진찰실에 어떻게 갈려고?”

  영수의 말에 대답은 않고 소희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식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지하 식당에까지만 데려다 주고 가.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휴게소 식당까지 휠체어를 밀고 가는 동안 소희는 별 말이 없었다. 그도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쉴 새 없이 바윗돌을 정상으로 밀어 올려야 하는 벌을 받은 시시포스의 슬픔이 떠올랐다. 휠체어 손잡이가 바윗돌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내가 받아야 하는 벌은 이런 것일까? 조상이 지은 업보 때문일까. 아니면 죄인의 표지를 이마에 달고 나온 것은 아닐까. 소희는 혼자 할 수 있을 것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꼭 보호자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저기 세워 줘.”

  영수는 식탁 앞에 소희를 앉혀 놓은 후 멍하니 서 있다가, 몇 번이나 소희의 채근을 받고서 자리를 떠났다.

  엑셀을 몰고 공장으로 가는 동안 영수는 자신도 모르게 울고 있었다. 그러다가 눈물이 그쳤을 때 차안에 놓인 소희의 장갑을 보았다. 그 날 혼자 병원에 가던 소희의 모습이 떠올랐다. 주남 버스정류장 부근에 이르렀을 때 그녀가 느꼈을 고통도 느껴졌다. 소희는 주남에 차를 세워둔 채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간 것이었다. 

  자작로를 따라 달리는 동안 처음 이 곳에 들어오던 때를 생각했다. 영수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자작저수지 옆 오르막길을 돌며 영수는 그 곳에 몸을 던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래도 아직은 안 되지. 죽는 건 언제 죽어도 늦지 않을 거야.

  얼마 뒤 대명식품 주차장에 차를 세웠을 때 마침 아래를 내려다보던 공장장과 눈이 마주쳤다.

  “어찌되었는가, 자네 마누라는?”

  크게 물은 후 그가 아래로 내려왔다.

  “병원에 검사를 받는다고 가 있습니다. 데려다 주고 오는 길입니다.”

  “지금 공장에 바쁜 일은 없으니까 가 봐.”

  뜻밖의 말에 영수는 공장장을 다시 보았다. 

  “자네 집안일이 급하지 공장일이 급한 것은 아니잖은가.” 

  “예, 고맙습니다.”

  영수는 다시 엑셀에 올랐다. 공장장은 그의 고향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나도 전라도가 고향인데 자네도 그렇구만. 전라도 사람들은 벌을 받았는가 봐. 고향에서 살 수 없이 각지로 흩어져 살아야 하는 벌 말이지. 근디 우리 집은 촌에 있어도 잘 살았어. 공장장은 자신이 부잣집 자식이라고 몇 번 말했다. 단지 공부하기가 싫어 객지에 나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한 때 유랑극단을 따라 다니는 건달생활을 했다. 기도를 봤는데 집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것보다 재미있어, 돈도 벌고. 그 후 그는 택시기사를 하며 영산 시내를 누비고 다녔다. 

  민국대 병원으로 다시 돌아갔을 때 소희는 놀란 표정이었다. 마치 헛것을 보았을 때처럼 눈이 둥그레졌다.

  “일은 안 하고 어떻게 왔어? 왜 온 거야?”

  “공장장이 일이 없다고 가보라고 해서.”

  “어쩐 일인가 싶네. 고맙기는 하지만.”

  “어디 있었어?”

  “밥 먹고 천천히 올라왔어.”

  “지하 식당에서 혼자?”

  영수는 소희가 혼자 휠체어 바퀴를 굴리는 모습을 생각해 보았지만 상상이 되지 않았다. 누군가 밀어주었을까. 아마 그랬을 거야.

  “배가 고팠어.”

  소희는 묻지도 않은 말을 혼자 어눌하게 늘어놓았다. 그것이 영수의 가슴을 울렸다. 도대체 이게 무슨 병이야? 풍일까, 파킨슨병일까. 뇌경색일까. 삼일 전에는 분명하게 했던 말이 이젠 본인의 통제를 벗어난 거야. 영수는 그가 아는 병명을 모조리 생각해 보았지만 적당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긴 병명을 안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지.  

  “아, 어쩐다지? 전화기 앞으로 데려다 줘.”

  조금 전까지 평온했던 소희가 불안하게 말했다. 견딜 수 없어 곧 고함이라도 지르고 발도 구를 것 같았다. 영수는 벽시계를 보았다. 오전 9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이제 곧 진료시간이었다. 

  “우리 어머이한테, 걸어 줘. 전화 좀.”

  영수는 공중전화 부스 앞으로 소희를 밀고 갔다. 전화기를 들고 번호판을 눌렀다. 장모님 목소리가 들리자, 소희에게 바꾸어 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아직 심각한 장애가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좀 여기 와주라고. 와 주라고.”

  소희는 울부짖으며 몇 번이나 말했지만 장모는 와줄 처지가 아니었다. 고령의 장인이 몇 달 전에도 폐렴으로 입원을 했다가 퇴원을 한 터라 옆에 사람이 있어야 했다. 

  “내가 어찌 됐는지 알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는데 왜 못 온다는 거야.” 

  통화를 하는 내내 소희는 연신 울었다. 소희는 결혼 전까지 엄마의 그늘에서 살아왔다. 그때까지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동네에서 잔치가 있으면 음식 할 사람으로 제일 먼저 어머니를 찾았다. 큰언니가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옥에 갇혔을 때는 다른 부모님들과 함께 항의시위도 했다. 굴하지 않는 용기를 가진 대범한 어머니였다. 소희는 어머니처럼 살고 싶어 했다. 결혼 후에도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소희는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했다. 음식을 할 때마다 시댁에 일이 생길 때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딸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 아이들 백일이나 돌, 심지어 시아버지 회갑 때도 와서 음식을 만들어 주었다. 

  “언니도 여기 못 온다고 그랬어. 가게를 못 비운다고.”

  지금 이 순간 누구도 와 줄 사람이 없었다. 영수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지만 지푸라기 하나 잡을 데가 없었다. 소희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가 다시 들었다. 

  “누구한테 할라고?”

  영수가 말렸지만 소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번호를 눌렀다. 전화번호를 기억하고 있다니. 영수는 그것이 안심이 되기도 했다. 

  “교회 할머니.”

  소희는 간혹 그녀를 어머니라고 불렀고, 상대도 그 호칭 듣는 것을 기꺼워했다. 목욕탕에서 처음 만나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에 대해 이야기했던 그들은 곧 친해져서 드나들었다. 소희가 교회할머니라 부르는 여자는 오십대 후반의 서울 출신이었다. 소희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어머이, 나 여기 병원이야. 병원!”

  흥분 된 소희는 더욱 말을 더듬거렸다. 

  “거기 무슨 일로 갔는데? 목소리는 왜 그렇고?”

  놀란 교회할머니가 꼬치꼬치 물었지만 소희는 대답하기 힘들었다. 

  “민국대 병원에 진찰 받으러 왔어요.”

  소희는 간신히 이 말을 했을 따름이었다.

  “어쩌다 그리 된 거야?”

  이 말에 소희는 쉽게 말하지 못했다. 

  “내가 그냥 아파요. 말도 하기 힘들고 걷기도 힘들고.”

  “알았어. 거기 어디야?”

  이 말에 소희는 영수에게 전화기를 바꾸어 주었다. 영수는 교회할머니에게 정주 민국대 병원을 말해준 후 통화를 끊었다. 돌아서며 영수는 밝게 웃는 소희를 보았다. 

  “이리 와 준다고 그랬어?”

  “응, 그래.”

  그들은 문을 열고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원무과 앞 의자에는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몇 분 후 사람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영수는 벽시계를 보았다. 9시, 진료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의사가 등장할 참이었다. 세상은 거대한 수레바퀴의 움직임에 의존하는 듯했다. 시간이 시작되었으므로 예배를 시작합니다. 이건 누구의 목소린가. 주일학교 전도사님 목소리였다. 십자가 모양의 벨소리가 울리고 아이들은 일제히 주기도문을 외기 시작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신경과 진료실 앞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온 어머니가 몇 있었다. 그들이 들어가고, 채 몇 분이 지나지 않아 곧 차례가 되었다.

  “박소희 환자 들어오세요.”

  간호원의 호명에 영수는 휠체어를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50대의 정신과 의사는 휠체어에 앉은 소희에게 말을 시키고 일어났다 앉았다를 시켜 보았다. 

  “어떻게 이 상태로 지금까지 있었습니까? 일단 입원을 해서 검사를 받아 봅시다.”

  “헉, 그래요?”

  영수는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 번 소용돌이에 휘말리면 헤어나기 어렵지. 언젠가도 이런 일이 있었던 거 같아. 어느 때일까. 이렇게 황당한 때는. 분명 이런 일이 한 번쯤 있었을 것 같았다. 조짐 없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으니까. 그래, 맞아. 아마 기분이 매우 좋을 때였어.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1등을 했을 때였어. 갑자기 동급생한테 한 대 주먹으로 이마를 정통으로 맞았지. 난 저항할 수 없었지. 누가 시켰을까. 몰라, 모르겠어. 아무 생각 없이 비틀거리며, 난 그 자리를 물러났어.  

  “지금까지 치료를 안 했습니까?”

  “변비가 심해서 대현병원에 입원했다가 오는 길입니다.”

  “언제요?”

  “저번 주 수요일입니다.”

  “검사할 것이 많으니까 일단 입원을 합시다. 출납에 가서 계산을 하고 절차를 밟고 오십시오.”

  대체 무슨 일이냐고 영수는 외치고 싶었지만 의사의 말에 반론을 제기할 수는 없었다. 누가 의사에게 이런 권능을 주었는지 생각할 틈도 없었다. 이 순간 의사는 신이었다. 영수는 오로지 따라야 할 의무만 있었다. 

  입원수속은 담당자의 간단한 설명이 있고 영수가 보호자임을 인정하는 서명 몇 개로 끝났다. 영수는 그들의 지시에 따라 소희를 데리고 병원 5층으로 올라갔다. 유리문을 밀고 병동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을 때 간호원이 나타났다. 

  “일단 환자 분은 가지고 계신 소지품을 여기 바구니에 담으세요.”

  소희는 목걸이를 벗어 바구니에 넣은 후 손가락에서 반지를 뺐다. 

  “지금까지 한 번도 뺀 적이 없는 것인데.”

  소희는 어느 때보다 슬프고 우울해 보였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영수는 더한 슬픔에 빠질까 두려워 애써 외면했다. 그러나 소희에 대한 일이 터졌을 때 그는 몇 번이나 이 장면을 떠올리며, 어쩌면 그 때 소희가 가장 먼저 몸에서 빼고 싶었던 물건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소희가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고 믿게끔 되자 그녀의 행동 하나 하나가 의심스러워졌다.

  소희는 휴대폰과 핸드백에 든 소지품을 간호사에게 넘겨주었다. 

  “이제 안으로 들어오세요.”  

  간호원은 작은 병실로 그들을 안내했다. 그런 다음 잠시 나갔다가 은테안경을 낀 여의사를 데리고 돌아왔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나는 대로 말씀해 보세요.”

  여의사의 말에 영수는 거부감을 느꼈지만 곧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는 곧 남에게 쉽게 말하기 어려운 일들을 털어놓았다.

  “그간에 어려운 일이 여러 번 있었어요. 실업자로 고통을 당했고, 카드회사에서 시도 때도 없이 빚 독촉을 받았지요. 그리고 또 다시 일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치다가 가지고 있는 것, 빌린 돈까지 모두 사기를 당했어요. 음, 살고 있는 집에서 쫓겨났고, 얼마 전에는 산중에 있는 공장 이층으로 이사 왔어요.”

  참으로 복잡하고 힘들게 살아온 것 같았는데 말하고 보니 간단했다. 인생을 말할라치면, 어느 날인가 불쑥 태어나 어찌어찌 살다가 삶을 마치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말을 마친 영수는 스스로 놀라며 상담의사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흘낏 보았다. 의사는 감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직분을 다할 따름이었다. 몇 가지를 더 자세히 묻고 나서 의사는 밖으로 나갔고 간호사가 나섰다.

  “앞으로 환자는 보호자 지시 없이는 누구도 만나지 못합니다.”

  “뭐라고요? 어떻게 이런 일이.”

  영수는 무감각했지만 소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혹시 연락이 안 되면 누구도 만날 수 없나요?”

  “예. 병원 규정상 그렇습니다.”

  소희는 입을 다물었지만 경악하고 있었다. 아니 누군가 찾아와도 남편의 허락이 없으면 만날 수 없다니, 그녀는 다시 중얼거렸다. 

  “병실은 몇 인실로 할까요?”

  간호사가 영수에게 물었다.

  “1인실로 해요.”

  대뜸 소희가 끼어들었다. 영수는 병원비가 걱정되어 조금 더 알아보기로 했다. 

  “다른 병실은 어떻게 해요?”

  간호사는 병실과 입원비에 대해 자세히 말해 주었다. 영수는 소희가 잠시 진찰을 받기 위해 나간 동안 자신의 사정에 대해 말한 후 다인실로 해줄 것을 요청했다.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습니다, 라고 말한 후 나갔다.

  잠시 후 영수는 주사를 맞고 잠든 소희를 두고 밖으로 나왔다. 이중으로 된 유리문을 빠져 나오며 그는 환자들이 이곳을 빠져 나오기는 힘들 거라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다. 누구인지 확인이 되어야 문이 열렸고, 밖에서는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이곳은 그가 군대 시절에 들어갔던 유치장과 다를 바가 없었다. 입고 있던 옷을 벗고 신체검사를 받았고, 소지품은 무엇 하나 가질 수 없었다. 그런 후 원형의 유치장 안에 동물처럼 앉아 있었다.  

  영수가 병실 밖 의자에 앉아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교회 할머니였다.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아무도 와 주지 않는 이 순간 그녀만이 타인이 아니었다. 

  “곧 정류장에 도착하니까 병원 밖으로 나와.”

  “벌써 왔어요?”

  구세주를 만나는 기분으로 그는 버스 정류장에서 교회할머니를 기다렸다. 채3분이 되지 않아 버스는 도착했다.

  “여기요!”

 반가운 마음에 영수는 손을 들었지만 그녀에게서 터져 나온 한 마디는 청천벽력 같았다. 

  “이래가지고 내 돈을 갚겠어? 그래, 애 엄마는 어디 있어?”

  이 말은 번개처럼 그의 몸을 감전시킨 후 내내 깊은 상처로 남았다. 

  “좀 전에 병실에 들어갔어요.”

  “병원에서는 뭐라고 그래?”

  “아직 진단은 나오지 않았지만 입원치료를 받아야 한 대요.”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 도대체! 우리는 화산에 놔두고, 갑자기 정주로 가더니…일이 잘 안 됐어?”

  영수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교회 할머니는 화가 단단히 나 있었다. 소희가 교회 할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기 시작한 지 고작 1년이 지났을 따름이었지만, 부모보다 사이가 더 가까워져 있었다. 영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 세상 한 곳, 믿을 만한 구석이 되어 주었다. 그런데 그것이 한낱 가벼운 외피에 지나지 않았다니. 돈 앞에 장사가 없다고 사기꾼이 그러더니. 이럴 때 사람을 알게 되는 거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교회할머니가 그럴 리가 없을 거야. 지금은 화가 나서 그러는 것이야.

  병원 5층으로 가는 동안 그녀는 잠시도 쉬지 않고 묻고, 영수는 고통스럽게 대답했다.

  “일이 잘 안 됐어요. 아무래도 사기를 당한 것 같아요.”

  조금만 기다리면 돈을 갚을 수 있어요. 이런 거짓말이라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지만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간 소희가 그녀에게 한 거짓말만 해도 영수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언제까지는 돈이 될 것 같다고 한 사기꾼의 말을 받아 전하느라 소희는 더 많은 거짓말을 만들어 내야 했다. 이것 때문에 소희나 영수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일지 몰랐다. 영수는 자신이라도 잘못을 빌어야 할 것 같았다.

  “같이 모텔을 운영하기로 해 놓고, 여자가 연락이 안 돼요.”

  교회 할머니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거야. 하지만 나는 누군가가 필요해. 지금 이 순간,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그렇다고 무턱대고 정신병원에 입원 시키면 어떻게 해?”

  “그러면 어떻게 해요? 사람이 제 정신이 아닌 걸. 저도 어찌해야 할지 지금도 모르겠어요.”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집 날린 사람, 쪽박 찬 사람 이야기 못 들었어? 큰일 났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나 시원한 거 하나만 갖다 줘. 내가 열이 나 죽겠네.”

  영수는 가까운 자판기로 달려가 사이다 캔을 빼다 주었다. 

  “그래, 빚은 갚을 거지? 네 마누라가 빌려갔지만 말이야. 이혼할 건 아니지?”

  영수는 슬며시 화가 올라왔지만 입을 다물었다. 눈물이 솟구쳐 오르며,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흐릿하게 영화 속 장면처럼 여겨졌다. 할머니가 아주 오래 전에 내게 이런 식으로 나를 섭섭하게 한 적이 있지. 언제일까. 꼭 이번처럼 하얀 건물 안에서였지. 나는 울었고, 그녀는 짓궂게 바라보며 동정했었지? 바이올린이 흐느끼고 있었고. 그 때 할머니의 말이 다시 들려왔다.  

  “왜 돈이 필요했던 거야? 이제는 솔직하게 말해 봐. 좀 어려웠지?”

  영수는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 더 이상 할머니를 속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원했던 것은 애정이나 사랑이 아니라 허전함을 달래 줄 친구였다. 이제 모든 것을 까발리는 거야. 그래야만 현실을 차고 나갈 힘이 생길 거야. 영수는 입술을 달싹거려 보았다. 

  “실직한 이후 너무 어려웠어요. 조금만 돈을 내면, 같이 모텔을 할 수 있다던 여자의 말에 속아 넘어간 거예요.”

  사실은 이렇게 간단한 것이었다. 이것을 돌려서 말하려니 태산처럼 많은 말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당신에게 돈을 빌렸고, 당신은 내게 빚 받으러 온 빚쟁이다! 흐흐 웃음이 나왔다. 언어의 힘이란 대단하군 그래. 현실을 곧바로 알게 해 주는군.

  “이혼 안 합니다. 제가 갚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영수의 말에 할머니는 안심하는 눈치였다. 이 말이 거짓이 아니냐고 물을 법도 했지만 묻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누가 뭐래도 분명 내 속에서 우러난 진실이야. 난 갚을 거야. 영수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갚는다는 말에 그녀의 표정이 몰라보게 부드러워졌다.

  “사실 내가 네 마누라보구 돈을 빌려준 게 아니야. 너를 보고 빌려준 거지.”

  교활한 할망구 같으니라고. 영수는 갑자기 서러워져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영수를 몇 번 달래다가 같이 울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얼마를 또 울었다. 

  “울지 마, 네가 힘을 내야지.”

  “녜.”

  얼마 후 영수는 5층 병실 앞에서 벨을 눌렀다. 스피커를 통해 간호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세요?” 

  “할머니가 오셔서 환자를 좀 봐야하는데요.”

  “누구요?”

  “조금 전에 들어간 박소희 환자요.”

  “지금 환자가 주사 맞고 막 잠들었어요. 깨우기 어렵겠어요.”

  “어쩌지요, 이거.”

  영수는 교회할머니를 돌아보았다. 그사이 스피커 음이 똑 하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좀 기다려 보고 가야지, 안 되면.”

  둘은 병실 문을 바라보며 대기석에 앉았다. 그녀는 병원에 오기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몇 가지를 더 물었다.

  “일이 잘 될 것 같더니, 곤두박질치는 건 한 순간이네요.”

  “그래. 한 번 더 생각해 봐. 병원에 두면 안 돼.”  

  그녀는 병실로 들어가는 유리문을 몇 번 쳐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야겠어. 언제까지 기다릴 수 있나. 할아버지가 기다리시고. 

  잠시 후 그들은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버스에서 내렸던 지점에 서서 둥근 정류소 표지판을 훑어보았다.

  “여기가 종점이니까 여기서 타면 되겠지?”

  영수는 표지판에서 버스터미널로 가는 버스번호를 확인했다.

  “예, 여기서 기다려요.”

  곧 기다리던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에 오르며 할머니가 외쳤다.

  “저대로 놔두면 안 돼. 다 파탄날 거야. 잠에서 깨거든 어서 데리고 나와. 한 번씩 일이 어떻게 되는지 전화 좀 주고.”

  “녜. 알겠습니다.”

  영수가 손을 흔들기 무섭게 버스가 출발했다. 다시 혼자가 되자, 영수는 5층 병동으로 올라갔다. 벨을 누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전에 소희를 진찰했던 여의사는 상담실에 앉아 있었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그랬는데 아내를 여기 둘 형편이 안 됩니다.”

  의사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지금 저 상태에서 집으로 가면 큰일 납니다. 절대 좋아지지 않아요.”

  “저도 알지만 형편이 안 되는 걸 어쩝니까?”

  그 때 유리문을 열고 사십 대 남자 의사가 들어왔다. 그는 여의사보다 좀 더 직위가 높아보였다. 그가 감정 없는 투로 말했다.

  “우리한테는 의무가 있어요. 의사로서 환자를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의무입니다. 이렇게 내보내 줄 수 없어요.”

  “그러면 좀 전에 제 손으로 입원시킨 환자를, 보호자인 제가 퇴원을 시킬 수 없다는 겁니까?”

  “뭐라고 해도 좋습니다. 이건 우리 사회와도 관련되는 문제입니다. 지금 나가면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어요. 그런 걸 뻔히 아는데 제가 어찌 환자를 보내줄 수 있습니까?”

  “좋아요, 좋다구요. 죽어도 상관없으니까 보내주세요. 이렇게 많은 돈이 들 줄 몰랐어요. 돈을 못 내도 상관없다면 모르지만, 보내주세요.”

  “그럼 다른 환자들은 어떻게 입원했겠습니까?”

  “아니, 돈이 없습니다. 먹고 죽을래도 없는데 혹시 돈을 안 내도 됩니까?”

  “좀 기다려주세요.”

  남자의사가 밖으로 나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 의사가 밖으로 나갔다. 영수는 이제 곧 눈앞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점쳐보고 있었다. 넌 나약하게 그들이 내린 결정을 따를 거야. 많은 사람들이 태어났다가 죽은 것처럼. 아니야. 난 이 누군가 만든 이 세계에 동의할 의무가 없어. 물론 내 선택으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대로 죽을 권리가 있다는 건 아니야. 단지 무언가 지금 지층이 어긋났다는 거야. 나갔던 여의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퇴원시켜 드리기로 결정이 났습니다. 먼저 원무과에 다녀오십시오.”

  영수는 부리나케 1층 원무과로 달려갔다. 1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받은 치료비가 십 만원이 넘었다. 어쩌지 통장에 돈이 얼마 없는데. 부산을 떤 끝에 그는 몇 개의 통장에서 돈을 찾아 겨우 원무과에 납부했다.

  잠시 후 영수는 소희에게 반지를 끼워주고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불안하고 우울한 얼굴로 유리감옥을 빠져 나오며 소희는 혼미한 상태에서도 웃었다.

  “아까 화장실에 갔는데 웬 남자 환자가 들어와서 나한테 오는 거야. 얼마나 놀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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