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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산호 Aug 31. 2024

슬픔의 포도2

 2     

  돌아오는 내내 소희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말이 없이 시무룩해 보였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눈앞에 병풍처럼 서 있던 산 때문인가. 영수도 그것을 보았을 때 답답함을 느꼈다. 산이 벽이 되어 불운한 일이 벌어질 때마다 자신을 밀어 붙이는 장면이 떠올랐다.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벼랑으로 떨어지는 순간에, 이제 죽었다 생각하니까, 그 때까지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싹 훑고 지나가더라니까. 누구 목소리였지? 영수는 저도 모르게 대명식품에 오기 전까지 일어났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3년 전만 해도 그는 실낱같은 희망에 목숨을 걸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헛된 욕심이나 발버둥에 지나지 않았지만, 벼랑에 매달린 신세였던 그는 어느 것도 붙잡을 것이 없었다. 무너지는 흙덩이가 그의 머리 위로 연달아 떨어졌다. 외환위기 때 실업자가 된 그는, 가지고 있던 카드가 한도가 넘어가고 있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때 카드사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일제히 카드 한도를 올려주었지만 미봉책에 지나지 않았다. 금방 다시 사용한도를 넘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살아온 건전한 삶의 방식에 구멍을 내고 투기성을 불어넣었다. 그는 큰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아랫집 여자의 말에 속아 빚까지 내서 투자했다. 그러나 금방 온다던 소식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을 때 기다리던 소식이 왔다. 곧 일이 성사될 거예요. 아랫집 여자의 말에 그는 정주로 이사까지 했지만 다시 소식이 끊어졌다. 알고 보니 아랫집 여자는 교도소에 들어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사기를 당한 사실도 밝혀졌다.  

  그가 더 이상 회사를 다닐 수 없게 된 것은 정주로 이사한 지 일 년이 지난 7월 어느 날이었다. 그는 아파트 앞 초등학교 느티나무 아래서 세탁공장 사장에게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해 슬프고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다시 회사에 다니면 안 될까요? 카드 회사가 어떻게 알고 월급 차압을 계속 넣겠습니까? 제가 이미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말한다면 말이죠.”

  이 말에 머리가 벗어진 사장은 영수를 한 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건 어려운 일입니다. 나는 세금을 떼먹은 적도 없고 노동사무소로부터 고발을 당한 적도 없지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세금을 내지 않을까 하고 고민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 나 혼자만이라도 정직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카드회사에서 형씨 월급을 차압했고, 내가 이행하지 않으면… 음, 난 법을 어겨야 하고 아주 골치 아파지는 거예요. 차라리 내게 좀 더 빨리 말했더라면 괜찮은 조치를 취할 수 있었을 겁니다. 이젠 진짜 늦었어요.”

  정말 늦었을까. 영수는 사장이 이마에 주름살을 만들며 하는 말이 진심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편법으로라도 회사를 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이 회사에서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일해 온 자신을 구해줄 수도 있으리라 여겼다. 

  “열심히 일한 것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이건 안 되는 일입니다. 형씨가 계속 우리 회사를 다닌다면 카드회사의 월급차압을 이행해야 하는 거죠. 글쎄, 미리 말했더라면 얼마든지 조치를 취할 수 있었을 텐데.”

  어떻게 미리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수치스럽고 창피한 일을. 어떻게 내가 신용불량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거의 매일 걸려오는 카드사 전화통화를 누가 들을까 무서웠는데. 영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은 사회적으로 공개되어 7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처지임을 알게 되었지만 그 때는 뭐랄까. 다들 한결같이 도저히 드러낼 수 없는 치부라고 생각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라고 카드사 직원에게 애원하던 소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해 영수는 고통스러웠다.

  다음 날부터 영수는 교차로, 벼룩시장 등 몇 종류의 정보신문을 들고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안고 아파트로 돌아왔다.

  정보신문에는 과거 벽이나 전봇대에서 볼 수 있었던 갖가지 인간 군상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사람들을 꼬여내기 위한 고리대금업자의 광고, 작은 물건들을 팔기 위한 속삭임, 어떻게든 사람들을 끌어 모아 돈을 벌려는 장사치들의 PR. 구인구직자들의 소리 없는 전쟁이 벌어졌다. 그 중에서 그의 눈길을 끈 것은 당연히 구인광고였다. 얼마를 더듬었지만 마땅한 곳이 없었다. 수십 수백의 일자리 중에서 신용불량자인 그가 고를 수 있는 업종은 고작 몇 개에 지나지 않았다. 정주라는 소도시는 아주 작은 곳이었고, 영수가 찾는 직장은 집을 제공해 주는 곳이어야 했고, 신용불량자도 받아 주는 곳이어야 했다.   

  며칠 걸려 정보지를 뒤적인 끝에 영수는 두 곳 중에 한 곳에 가기로 결정했다. 한 곳은 양돈장이었고, 또 한 곳은 대명식품이었다. 양돈장은 그런 대로 그림이 그려졌다. 하얀 털에 발그레한 빛깔의 돼지들이 눕지도 못한 채 서 있다가 먹을 것을 주면 질러대는 괴성, 청소할 때마다 맡아야 하는 분뇨 냄새, 그 중에서 견딜 수 없는 것은 곳곳에서 윙윙거리는 파리떼였다. 물론 긴 장화를 신어야했다.

  대명식품은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자작이라는 산중에 위치한 식품회사. 아니 건강보조식품 제작회사. 소희는 식당에서, 그는 공장에서 일을 해야 하는 조건이었다. 그 곳에서는 무엇을 만들까.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는 있을까. 대명 사무국 여직원 말로는 그 전에도 젊은 부부가 온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래도 돼지냄새보다야 낫지 않을까. 용하게 뱀을 잘 잡아먹지만 제 똥이나 새끼를 등으로 깔아뭉개는 그 녀석보다야 낫지 않을까.

  “애들이 곧 방학하잖아. 자기만 먼저 가면 안 되는가 물어 봐.”

  소희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영수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좀 더 나은 곳이 없나 찾아보느라 일주일을 보낸 후 영수는 소희의 주장을 받아들여 공장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아이들이 방학할 텐데, 일단 저 혼자만 가고 아이들과 애 엄마는 나중에 오면 안 될까요? 전학을 해도 방학 중에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공장 일이 급한 것은 없습니다. 나 혼자라도 해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 지금 급한 것은 식당입니다. 집사람이 혼자서 식당 밥을 하고 있는데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요, 급해요!”

  공장장의 단호한 태도에 영수는 화가 치밀었다. 그런데 왜 그때는 이렇게 급하다고 안 하셨습니까,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시는군요,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저, 그러면 다른 사람을 알아보셔야겠습니다.”

  잠시 갈등에 휩싸이던 영수는 용기 있게 말했다. 아직 산 속으로 들어가 살기에는 주저되는 부분이 많았다. 가까운 곳에 병원이나 목욕탕이 없고, 비디오가게와 시장, 슈퍼가 없다는 것은 어쩌면 속세와의 이별이었다. 떡볶이나 튀김, 오뎅을 어쩌다 한 번 얻어먹을 수도 없고, 담배 한 갑을 사기 위해 2  킬미터의 산길을 달려야 한다는 것은 귀찮고 또 성가신 일이었다. 어쩌다 이리 됐을까. 하긴 중학교 때는 오 리나 되는 길을 걸어 다녔는데.

  그 뒤 일주일이 넘는 기간 동안 영수는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혼자서 들어가 살아야 하는 수련원 청소부터 시작해서 리조트 임시직원, 조립식 건물 공장 기사직 등의 직업이 그의 앞을 스쳐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깡마르고 턱이 뾰족한 아파트 관리인으로부터 최후통첩을 들고 나왔다. 

  “하루 빨리 집을 비워주세요.”

  처음부터 그자가 야박하게 군 것은 아니었다. 인간적인 예의를 다해 처음에는 수도계량기 수도꼭지를 잠갔다. 그 다음 집세를 해결하지 않고 물을 사용했음을 확인한 후 수도계량기를 떼어갔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임시로 호스를 달라 물을 사용했을 때에, 나로서는 이젠 할 수 없다는 듯, 핵심 수도 부품을 빼갔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영수는 침통하게 작은 소리로 웃었다. 그런 뒤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막 다른 길이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영수는 소방호수를 집에 끌어들여 욕조에 채웠다. 그리고 흔적 없이 소방호스를 제자리에 가져다 놓은 후 비참하게 웃었다. 

  그러나 관리소장은 속지 않았다. 다음 날 관리소장은 소방호스를 뜯어 내  끌고 가버렸다. 그 때 처음으로 영수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나왔다. 망할 자식. 피도 눈물도 없는 놈. 죽을 때까지 아파트 주인을 위해 개처럼 살아라. 죽을 때는 닭처럼 수명도 채우지 못하고 죽어라. 

  그도 소장이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직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이 세상은 이런 틀 안에서 움직였다. 그럼에도 놈이 견딜 수 없이 미워졌다. 난 그 놈이 미워. 그런데 내가 그 놈이 미운 이유는 단지 놈에게서 사람다운 냄새가 나지 않게 규정대로만 한다는 거지.

  영수는 침통하게 웃고 싶었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흐느껴 울고 싶었지만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어깨가 쳐지고 기력이 다한 노인처럼 우울해졌을 따름이었다. 어디로 갈까요. 어디로 갈까요. 돈 데 보이. 이렇게 속삭이듯 노래를 하다가 그는 소희에게 늘어놓았다.

  “마땅한 곳이 없어. 집을 제공해주는 곳이어야 하는데. 다시 대명에 전화를 해볼까?”

  소희도 말이 없었다. 이럴 때 말하지 않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무능력한 가장에 대한 미움과 슬픔일까. 그래서 하루가 멀다 하고 집을 비우고 헤매고 다녔을까. 소희는 이후에도 내내 말이 없었다. 대명에 다시 전화를 했을 때도 밤중에 몰래 이삿짐을 싸서 용달차로 나를 때도 그랬다. 그러다가 나중에 기어이 뒷북을 쳐댔다. 그 때 다른 곳에 갈 데가 없었을까? 이 말에 영수는 화가 났지만 이 순간의 일을 상기시켜 주어야 했다. 

  “다른 방안이 있으면 이야기 해 봐.”

  소희는 관념적인 영수 앞에서 강한 체 늘 떠들어대고 있었지만 세상 물정에 어둡고 연약한 여자였다. 소희는 말이 없더니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영수는 수첩에 볼펜을 긁적거리고 있었다. 난 갈 곳이 없어. 다시 제자리야. 원점이다. 열심히 뛰어도 다시 제자리야. 제자리. 제자리.

  영수는 고민에 빠졌다. 아내에게 이 일은 힘든 일이다. 궂은일을 해본 적도 없는데 자유가 없는 남의집살이라니. 아내의 말 없음이 나를 힘들게 한다. 내게 좋은 길을 알려줄 수는 없는가. 나의 여신이여! 아, 망할 것. 되는 일이 없어. 아내는 지금 불평을 하는 거야. 나한테 원망을 하는 거고. 아내는 결벽증이 있어 식사는 안 해도 청소나 빨래는 해야 하니까. 그러니 그런 곳에 가서 살 엄두가 날 리 없지. 잔소리는 얼마나 심한가. 생각하면 넌덜머리가 난다. 그렇다, 나는 소크라테스다. 그녀는 악처다! 나를 철들게 하고 깨달음을 얻게 해서 삶의 근원에 대해 탐구하게 하고, 그 결과 인류의 고매한 정신적 스승이 되게 하려는 크산티페다. 어려움 속으로 들어가라. 고통 속으로 들어가라. 악의 소굴로 들어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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