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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무통 LeMouton Jul 12. 2024

낮으면 낮은 대로, 낡으면 낡은 대로
규암마을 반려길

오래된 거리에

다시 새로운 이야기가 

부여 규암마을 


이번 반려길 산책을 함께한, 나의 반려신발 르무통 버디 (옐로우)


온갖 좋은 것들을 모아 놓는 블로그가 있었다. 블로그의 주인은 음악과 미술 그리고 각종 텍스트를 번갈아 올렸는데 내 심장에 들어왔다 나간 사람 같았다. 게시물 속 콘텐츠들이 내 취향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들어맞았던 것이다. 그가 소개한 샹송, 그가 발견한 회화, 링크를 걸어 놓은 신문사의 칼럼을 보며 어딘가에 나의 복제인간이 사는 건 아닌가 할 정도였다. 그 수많은 좋은 것들 중 진은영의 <청혼>이 있었다. 아직 시집으로 엮이기 전 문예지에 발표되었던 그 시를 찾아낸 눈밝은 블로그 주인은 정갈하고 단정한 서체로 낭송을 하듯 시를 실어두었다. 


사랑 같은 것이 아니라 어떤 아득한 그리움이었다


그 시를 제일 좋아하는 음악을 배경으로 틀어두고 읽고 또 읽었다.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별들처럼 웅성거리고’로 시작하는 첫 줄. 사정없이 감정을 건들이던 짧은 문장. 그때 나를 간질였던 감정은 청혼이나 사랑 같은 것이 아니라 어떤 아득한 그리움이었다. 


이번 반려길 산책을 함께한, 나의 반려신발 르무통 포레스트 (화이트)


더 이상 찾아가지 않는 나의 오래된 거리들에 대한, 그 오래된 거리를 함께 지났던 사람들에 대한, 그 거리를 가득 채웠던 사랑하던 시절의 한껏 부풀었던 감정에 대한 나를 지나온 수많은 이야기에 대한 그리움. 시를 읽으며 서랍장 제일 안쪽에 구겨져 있던 애착 티셔츠를 꺼내듯 기억의 맨 아래 아무렇게나 밀쳐 두었던 추억을 끌어올렸다. 그리운 나의 오래된 거리. 그 계절 나는 그리움에 푹 빠져 지냈고 지금은 그리움이 가득했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건조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모든 게 편안해진 삶은 때론 모든 걸 지루하게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일렁임 없는 고요함을 깨는 데는 여행이 최고


일렁임 없는 고요함을 깨는 데는 여행이 최고. 오래전부터 가고 싶었던 부여의 작은 마을로 향했다. 몰락한 백제의 사람들이 물길을 따라 멀리 멀리 섬나라로 떠나던 백마 강가 나루터가 있는 곳. 고려, 조선의 사람들이 잘 여문 것들을 내다 팔던 큰 장이 열리던 곳. 


이번 반려길 산책을 함께한, 나의 반려신발 르무통 포레스트 (화이트) 와 버디 (옐로우)


해방전후 전쟁이 끝나고 백제대교가 생기기 전까지 쇠전, 모시전, 포목전, 싸전, 어물전이 펼쳐지고 새우젓을 실은 배가 들어와 항아리를 내려놓고 곡식을 채워가던,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 일렁이며 펼쳐지던 그곳. 지금의 규암마을은 왁자한 장터의 모습 대신 다시 사비 시절로 돌아간 듯 문화의 향기가 가득했다. 그리고 그 규암마을의 작은 책방 세간에서 어느 계절 나를 흔들었던 문장을 다시 만났다. 그 문장은 시집의 제목이 되어 있었다.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이번 반려길 산책을 함께한, 나의 반려신발 르무통 버디 (옐로우)


첫 장을 넘기니 목차를 지나 존 버거의 문장이 보였다. ‘나는 당신에게 내가 함께 있다는 것을 전해줄 말들을 찾고 있어요.’ 시인의 따뜻한 포옹을 받는 기분. 다시 한 장을 넘기니 한때 열렬히 애정 했던 진은영 시인의 시 ‘청혼’이 담겨 있었다. 가만히 눈으로 단어 하나하나를 어루만지며 시를 읽어내려 갔다. 함께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단어들. 거리, 사랑, 별, 여름, 비, 맹세, 시간, 슬픔, 너 그리고 나. 오래전 그 거리를 살았던 사람들에게도 존재했고 지금의 나에게도 존재하는 단어 앞에서 한 번씩 심호흡을 했다. 


규암마을은 오래된 것을 밀어내지 않고 깊게 끌어안고 있었다


규암마을은 오래된 것을 밀어내지 않고 깊게 끌어안고 있었다. 오래전 담배 가게와 사진관과 요정과 주막과 우체국이었던 건물들이 원래의 틀을 간직한 채 다른 쓸모로 사용 중이었다. 세간을 나와 옛것과 새것이 묘하게 섞인 공간들을 찬찬히 살피며 걸었다. 한옥을 개조한 문화공간을 연 자온길과 백제 123년 사비의 역사를 의미하는 123사비 공예마을이 어울려 있는 규암마을의 구석구석을. 옛 시절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오래된 거리를. 


백제의 마지막 왕이 거느리던 궁녀들이 꽃잎처럼 떨어졌다는 강


규암마을을 한 바퀴 다 돌고 백마 강가로 갔다. 그 옛날 일본과 중국과 서역의 상인이 드나들었다는 백제에서 가장 컸던 강. 백제의 마지막 왕이 거느리던 궁녀들이 꽃잎처럼 떨어졌다는 강. 오래된 거리처럼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강가를 걷고 걷다가 백제교 근처에서 수북정(水北亭)을 만났다. 


승자의 역사에 패국의 왕에 대한 이야기는 늘 진실과 모함 사이에 존재한다


1600년대에 지어진 이 정자에서 조선의 문인들은 강경포구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물길을 바라보며 시를 지었다. 그리고 그 정자 아래 저절로 따뜻해진다고 해 이름 붙은 바위 자온대(自溫臺)가 있다. 의자왕이 백마강을 건너와 바위 위에서 절을 향해 합장하면 저절로 따뜻해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알려졌지만 또 한편으로는 의자왕이 놀기 좋게 간신들이 먼저 와 바위를 데워놓은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승자의 역사에 패국의 왕에 대한 이야기는 늘 진실과 모함 사이에 존재한다. 


그 온기로 다시 나의 일상을 일렁이게 해야겠다


‘슬픔이 담긴 물컵 같은’ 강이 있고 ‘웅성이는 별’ 같은 작은 집들이 모여 있는 규암마을.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華而不侈)라 했던가. 오래된 거리에는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았다는 그 시절 백제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시처럼 짧고 시처럼 깊은 오래된 거리를 거니는 동안 자온(自溫), 스스로 따뜻해졌다. 그 온기로 다시 나의 일상을 일렁이게 해야겠다. 




반려길이란?

길을 입양해서 가꾸며 평생을 돌보는 나의 반려길 프로젝트, 르무통이 시작합니다. 


* 나만의 반려길을 소개해주세요

댓글에 나만의 반려길을 소개해 주세요. 그 길을 사랑하고 아끼는 이유, 길의 위치, 역사, 길에 얽힌 이야기 등을 자유롭게 적어주세요. 에디터 L씨가 그 길을 소개합니다. 매주 3명의 당첨자를 선정해 르무통 공식몰 적립금 5만원과 르무통 매거진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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