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편하지도 너무 힘들지도 않은 길 위에서
뜻밖의 행운이 깃들기를 바라며
비 오는 다산성곽길
J에게 연락이 왔다. 선배, 저 이제 그만하려고요. 수화기 너머 힘이 쭉 빠진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술 한잔 사주세요. 그래 그러자. 술을 마시기엔 이른 시각이었지만 일단 만나야 할 것 같았다. J가 무너지기 전에 달려가서 어깨를 받쳐주고 싶었다. 어디서 만날까? 잠깐 고민하다 약수동에 있는 맛집에 가기로 했다.
“어디니? 약수역에서 볼래?”
약속 장소로 가는 내내 마음이 좋지 않았다.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J는 취업을 앞두고 자신의 전공이 스스로에게 맞나 고민을 하다가 연기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수려한 외모에 어려서부터 종종 기획사의 명함을 받았던 것이 떠올랐다. 뒤에서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도 좋지만, 누군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연기를 배운 적이 없으니 뭐든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
중고생을 대상으로 하는 연기학원을 운영하는 선배의 학원에서 J를 처음 봤다. J는 아이들이 오기 전 비는 시간에 연기를 배우는 중이었다. 선배는 나를 글 쓰는 프리랜서라고 소개했다. J가 눈을 빛내더니 책도 많이 읽느냐고 물었다.
“글을 쓰시니까 책도 많이 읽으실 것 같아서요.”
“뭐 아무래도 직업상 적지 않게 읽는 편이죠. 그런데 예전만 못해요. 저도 요즘은 스마트폰에 빠져서. 그런데 왜요?”
“다양한 인물을 경험하는 데 책이 가장 좋다고 하더라고요. 지금부터라도 읽으려고 하는데 무슨 책부터 시작해야할지 감이 안 잡혀서요.”
해맑게 웃으며 책 추천을 부탁하는 J에게 서머셋 모옴의 작품 몇 권을 소개해 주었다.
“짧은 것부터 차근차근 읽어봐요. 방황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면 사는 게 이런 거구나 싶어요.”
추천한 책을 다 읽은 J는 사진을 찍어 DM을 보냈다. <너무 좋았어요! 이 책을 읽으니까 왠지 여행 가고 싶어지네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책 추천을 하고 또 가끔은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는 서로의 고민을 나눌 만큼 제법 친밀해졌다. 그는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것인지에 대한 불안을 이야기했고, 나는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불안을 이야기했다.
그렇게 우리는 친구에게도 가족에게도 할 수 없는 각자의 불안에 대해 이야기할 대상이 되어주었다.
잘될 거라고, 걱정 말라고,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을 서로에게 전하면서 우리의 시간이 흘러갔다. J는 나아갈 듯하다가 좀처럼 나아가지 못했다. 미친 듯이 오디션을 보러 다닌 끝에 작은 역할을 얻었지만 그다음 계단에 오르지 못하고 머물렀다. 언젠가 배우 에이전시를 하고 있는 친구와 미팅을 주선해 주었는데 결과가 좋지 않았다. 친구는 J가 너무 담백하다고 했다. 얼굴은 좋은데 느껴지는 게 없다고 했다.
“이 바닥에서 가장 안타까운 친구들이 누구인 줄 알아? 성실한데 매력이 없는 사람이야.”
J는 성실했다. 자기관리도 잘했고 번잡스러운 인간관계에 매여 지내지도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식물에 물을 주고 고양이 모래를 갈고 밥을 챙기며 하루를 시작하는 루틴을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사람이었다. 나는 J의 그런 점이 참 매력적인데 도대체 매력의 정의가 무엇이라는 이야기인지 친구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빗물까지 합세해 더 복잡해진 약수역 앞에 우산을 쓴 J가 먼저 와 있었다. “선배!”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몇 년간 혼신의 힘을 쏟아낸 J가 꿈에 마침표를 찍으려는 중이었다. 그의 얼굴을 보는데 마음이 복잡했다. 괜히 어깨를 툭 치고 뭐가 이렇게 갑작스럽냐고 별일 아니라는 듯 물었다. 꿈이라는 게 어느 순간 타오른 것처럼 꺼지는 것도 순간인 것 같다는 J의 목소리에는 미련이 가득했다. 아무래도 맛있는 걸 먹으면서 길게 이야기를 들어줘야 할 것 같았는데 맛집 앞은 벌써 대기 줄이 길었다.
“배가 고픈 게 아니면 일단 우리 좀 걸을까?”
“그래요. 걷고 먹으면 더 맛있겠지. 어디 갈 건데요?”
나는 J를 데리고 길을 건너 장충체육관 방향으로 올라갔다. 장충체육관 못미처 동호로 17길로 들어서면 오른쪽에 남산 자락에 세워진 성곽이 나타난다. 성곽을 따라 쭉 오르는 길은 아주 편하지도 너무 힘들지도 않은, 그러나 걸음에 집중을 하느라 잡생각이 사라지는 그런 길이다.
“J, 예전에 선비들이 과거시험을 보러 한양에 와서 이 성곽길을 걸으면서 합격을 기원했대. 성곽의 안쪽 바깥쪽 너른 한양 풍경을 보면서 기도했겠지. 나의 큰 꿈을 이루게 해주세요.”
“재밌네요. 기도가 좀 먹히는 곳인가?”
“글쎄. 뭐 누군가에겐 먹혔고, 누군가에겐 불발됐겠지. 인생이 그런 거잖아. 대부분이 운이고 절대로 공평하지 않고 말야.”
나의 말에 J는 잠시 침묵했다. 찰박찰박 빗길을 걷는 발소리와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만 들렸다. 우리는 조용히 빗소리를 들으며 오르막을 올랐다. 한참 뒤 J가 말했다.
“맞아요. 꿈을 이루고 안 이루고는 내 노력이 잘못됐거나 부족해서가 아닌 거죠. 그냥 주파수가 맞지 않은 거예요. 안테나를 높이 세우고 최선을 다해 전파를 이으려고 했지만 결국 안된 거지.”
담담한 J의 목소리는 처음 나에게 전화했을 때와 달리 물기가 사라져 있었다. 우리는 다시 침묵하며 성곽을 따라 걸었다. 군데군데 이름이 새겨진 각자성석이 보였다.
“이것 좀 봐봐. 이게 성을 축조했던 그 당시 공사 담당자 이름이랑 직책을 새겨놓은 거래. 재미있지 않아? 큰 꿈을 가지고 한양도성을 찾았던 무수한 선비들의 이름은 흔적도 없지만, 하나하나 돌을 쌓던 사람들의 이름이 남아 있다는 게.”
무슨 이야기인 줄 알겠다는 듯, J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려가기 전 잠시 다산성곽도서관에 들렸다. 앞으로 J는 일단 엄청 걷고 왕창 읽을 거라고 거창한 계획을 이야기하듯 말했다.
“걷고 읽는 일은 운과 멀리 떨어져 있잖아요. 걷는 거랑 읽는 거에 운이 어딨어. 그냥 하는 거지. 지금의 내가 해야 할 일인 거 같아요.”
한결 차분해진 표정으로 책을 고르는 J에게 어쩌면 걷고 읽는 삶을 사는 것이 너에게 주어진 행운일지도 모른다고 말해줬다. 걷고 읽다 보면 분명 희망이 보일 거라고.
어떤 행운이 J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고 믿고 싶다. 읽고 걷는 시간이 그의 성실함과 만나 튼튼한 성곽을 만들어내길. 그 성곽 아래 평범하지만 그래서 아름다운 풍경이 매일매일 펼쳐지길. 건투를 빌며, 브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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