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대학의 연구에 대한 외부 압력과 경쟁 정도는 한국과 미국 대학에 비하여 그리 심하지 않은 편이다. 교수 평가에서도 엄격한 잣대로 연구 성과를 정량화하는 편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일본의 교수들은 연구를 그리 열심히 하지 않는 교수 집단과 스스로 연구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하는 교수 집단으로 확연히 구분이 된다. 외부 압력 없이도 연구에 집중하는 교수에게는 대체로 긍정적인 연구 환경이며 연구비 지원이 중장기적으로 이루어져 하나의 연구주제를 수년에 걸쳐 깊이 있게 연구할 수 있다. 교수 이야기를 시작한 김에 먼저 일본대학의 교수들의 평가 제도 및 연구 환경과 연구비의 지원 체제를 통하여, 연구력과 연구성과가 떨어진다고 자평한 일본대학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많은 이유를 찾아보려고 한다. 물론 노벨상을 수상자들의 개인적인 우수함은 인정하고, 여기서는 제도와 정책에 초정을 맞추어 이야기할 것이다.
1) 일본 대학의 연구 현실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일본은 유카와 히데끼 씨가 1949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이후로 2023년도까지 물리학, 화학, 의학 등 과학 분야에서 25개의 노벨상을 받았다. 이러한 업적의 중심에는 대학 교수들의 창의적이고 지속적인 연구 활동이 있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우수한 연구자들의 노벨상 성과의 다른 한편에는 일본 대학의 연구력과 연구 성과가 저하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일본 문부과학성은 다른 선진국과 비교했을 때 일본 대학의 연구력과 성과가 부족하다고 비판한다. 주요 과학 분야에서의 논문 수와 주요 저널에 출판되는 논문 수가 2000년 이후 감소했으며, 연구 영역도 편중되었음을 지적한다. 또한 일본의 국제적인 공동 연구에서의 존재감도 약해졌으며, 대학 교수들의 연구 시간과 젊은 연구 인력의 감소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여기에 2022년 8월 10일 자 아사히 신문에 따르면, 일본의 과학 분야 논문은 1998년 이후로 계속해서 인용률이 감소하여 중국과 한국보다도 낮은 12위로 평가되었다. 사회과학 분야에서의 연구 실적도 낮아서 동경 대학이 세계 대학 중 186위로 평가되기도 했다. 나의 전문 영역인 교육 연구 분야에서도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비교하여 일본 교수들의 국제적인 저널 출판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적은 편이다.
다시 말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노벨 수상자 등 우수한 연구자들이 나오고 있으면서도 일본 대학 전반에서 연구 역량과 성과가 저하되고 있는 문제는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러한 상반된 현상이 일어나는가? 나는 그 답이 일본대학의 연구 업적을 포함한 교수 평가 제도에 있다고 생각한다.
2) 한국과 달리 교수 업적 평가에서 주관적인 해석이 중시된다
한국과 미국, 중국 대학들의 임용, 승진, 정년보장 (Tenure) 등을 포함하는 교수 평가와 비교해 보면, 일본 대학의 교수 평가는 여전히 느긋한 편이다. (참조로 다음 자료들를 보기 바란다. 1) 한국연구재단 (2022). 국내외 대학의 연구업적 평가제도 소개. 2) 김용환 외 (2022). 연구업적 평가에 관한 대학 교수 인식 연구.
최근 몇 년 동안은 강화되고 있긴 하지만, 일본 대학의 교수 평가는 객관적인 수치보다는 주관적인 해석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연구 업적을 수치나 객관적 잣대로 측정하는 정량적인 평가는 적고, 주관적인 견해와 맥락에 따른 해석을 중요시한다. 이로 인해 몇 년간 단 한 편의 논문 출판만으로도 그 교수의 전문 분야에서 중요하다고 인정되면 승진이 가능한 경우가 있다. 해당 논문이 국제적으로 크게 인정받거나 인용 횟수가 높은 저널에 실린 것이 아니어도 되며, 평가 위원회나 동료 교수들이 그 논문의 가치와 질을 인정한다면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한국에서는 어림없는 일이다.
주관적 해석을 중시하는 교수평가 제도는 교수들이 자율적으로 연구를 깊이 파고들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줄 수 있는 큰 장점이기도 하다.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교수들은 외부 평가의 수치를 달성하려는 압박 없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다. 빠르진 않지만 묵묵히 자신의 분야에서 성과를 축적하고자 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일본인 교수들이 물리학, 화학, 의료 분야에서 많은 노벨상을 받은 이유 중 하나는 연구에 대한 계속적인 투자와 개인의 능력을 지원하는 체제뿐만 아니라, 교수 평가 제도가 개인의 창의적이고 수년, 수십 년 동안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한 장기적인 연구를 받아들여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교수 평가에 대한 객관적 기준이 부족하거나 모호한 일본대학의 경우, 바쁜 일정에 허덕이는 많은 교수들은 자율적으로 연구를 지속하기 위한 의지가 약해지는 경향이 있다. 이는 일본대학 전반적으로 연구력이나 연구 성과의 저하를 가져왔고, 세계적인 연구 경쟁력 약화로 이어져 왔다는 문제점이 제기된 바 있다.
3) 어찌 보면 아쉽게도 교수 업적 평가가 서서히 객관화, 정량화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여, 일본 정부와 대학들은 2000년대 들어오면서, 더 가깝게는 2015년부터 대학 개혁의 일환으로 교수 평가 제도의 개선을 서서히 진행하고 있다. 이에 대한 예시로, 내가 근무했던 국제기독교대학은 본 대학 중에서 개혁적인 교수 평가 제도를 도입하였다. 그 특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채용과 동시에 65세까지 정년 보장이 되던 제도를 버리고, 처음 5년간은 계약으로 시작하며, 5년 후 승진 및 정년 보장 심사를 진행하는 제도를 도입하였다. 신임 교수인 경우 조교수 (Assistant professor로 많은 일본 대학 들에서 조교라고 불린다)로 시작하여 5년 차가 되기 1년 전에 부교수 (Associate professor, 많은 일본 대학 들에서 준교수라고 불린다) 승진과 정년 보장을 동시에 심사받게 된다. 이러한 절차는 지금까지 일본대학들이 신임 교수로 채용되는 순간 평생 정년 보장을 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일본 내에서 개혁적인 제도로 평가되고 있다. 이미 다른 일본 대학에서도 이러한 제도가 도입되고 있으며 앞으로 더 많은 대학들이 평생 정년 보장제도는 없앨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국대학에는 오래전부터 채용하면서 평생 정년을 보장하는 제도는 없어졌다.
둘째로, 임용 5년 후의 승진 및 정년 보장을 위한 평가 기준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정량화하였다. 이 평가 기준은 각 학과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연구, 강의, 서비스의 세 영역에 필수사항 60점 (연구 30점, 교육 20점, 서비스 10점)과 선택사항 40점 (연구, 교육, 서비스 영역에서 필수사항 이외의 주요 업적)으로 구성되어 최소 요건으로 산정된다. 특히 연구 영역에서의 성과 기준을 비교적 상세히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한 학과에서 조교수에서 부교수로 승진하고 정년 보장을 받기 위해서는 연구 영역의 필수사항으로 최소 30점을 얻어야 한다. 여기서 국제 서적을 쓰면 30점, 국내 서적을 쓰면 25점, 책 번역을 하면 15점, 동료평가가 있는 저널에 논문을 게재하면 20점, 동료평가 없는 저널에 논문을 게재하면 10점과 같이 연구 성과를 점수로 환산하는 기준이 마련되어 있다. 물론 단독으로 쓰느냐 공동으로 쓰느냐, 어느 정도 기여하였느냐에 따라 점수 차가 나도록 되어 있다. 또 논문이 출판된 저널의 수준을 평가하여 연구 업적에 대한 상세한 평가가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개혁적인 제도로 여겨지고 있으나, 한국 대학의 평가 제도와 비교하면 여전히 느슨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객관적 평가 기준이 점차 마련되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 대학들이 연구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 개인적으로는 너무 상세하게 객관적인 기준과 수치로 연구 성과를 평가하는 제도는, 시간이 걸리는 획기적이고 창의적인 연구를 지원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4) 혼자만의 빠른 성과보다는 교수와 학생 함께 하는 연구 활동 과정을 중시한다
일본 대학의 교수 평가에는 혼자만의 성과가 아니라 교수의 연구실에 있는 팀원들과 어떤 활동을 하고, 어떻게 지원하였는지에 대한 항목이 흔히 포함된다. 일본 대학에 처음 왔을 때 감명 깊게 느낀 것 중 하나는 전임 교수들이 학부생을 마치 한국 대학의 대학원생과 같이 자주 만나고 친밀하게 대하는 점이었다. 또한, 학부생을 대상으로 한 연구 세미나, 제미가 매주 혹은 격주로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었다. 학부 중심의 대학은 물론 규모가 큰 종합 대학들도 전임 교수들이 학부생을 위한 세미나를 매 학기에 운영하면서 학부생의 연구를 지원한다. 나 역시 이러한 학부 세미나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며, 별도의 시간을 할애하여 학부생 개인의 연구 활동을 지원하였다. 일본의 대규모 국립 및 사립 대학에서도 전임 교수들은 학부생과 대학원생을 함께 혹은 따로 모아 "누구누구 교수의 연구실"이라는 이름으로 정기적인 세미나를 개최하며 학생들과 학문적 대화를 나누고 개인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예를 들어, 고바야시라는 교수는 자신의 성을 딴 "고바야시 연구실"을 운영하며 학부생과 대학원생들과 함께 서로의 연구 주제를 토론하고 국내외 학술대회에서 논문을 발표하며, 매 학기 학생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식사를 함께 하면서 학습 커뮤니티를 만들고자 한다. 물론 다른 교수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에게 연구란 빨리빨리 성과를 내는 활동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축적해 나가는 활동으로 인식된다.
한국의 학술 대회나 국제 학술 대회에서는 학부생이 발표하는 경우를 거의 보기 어렵지만, 일본의 학술 대회에서는 학부생이 교수들과 함께 발표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며, 학부생들끼리 혹은 개별적으로 발표하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한국 대학에서는 연구가 과학적인 방법에 따라 전문적으로 수행되어야 하는 활동으로 간주되며, 대부분은 대학원생이나 교수들이 주도하는 활동이다. 더 나아가 연구 결과를 국내외 학술 대회에서 발표하거나 우수한 저널에 논문으로 게재하여 새로운 지식을 널리, 되도록 빠르게 공유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대학에서는 연구 성과가 강조되면서 사회 과학 분야에서도 엄격하고 객관적인 연구 방법과 양적 실험 연구 등이 널리 이루어지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본 대학에서는 연구란 교수와 대학원생뿐만 아니라 학부생까지 참여할 수 있는 보다 포괄적인 활동으로 이해된다. 연구자들은 함께 논의하고 토론하는 과정뿐만 아니라 개인들의 주관적 해석이나 경험까지 고려하는 것이다. 일본 노벨상 수상자들마다 수상의 기쁨과 공을 함께 연구한 팀에게 돌리는 것을 보면 아마도 함께 연구하고 연구 활동 과정을 중시하는 특성이 오랜 기간 여러 사람들의 노력이 필요한 연구 성과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연구 활동의 결과만이 아니라 과정과 경험을 중시하기 때문에, 연구 활동과 결과를 긴 보고서 형태로 기록하거나 국내외 학술 대회에서 구두로 발표하는 경우도 많은 편이다. 일본의 사회 과학 분야에서는 엄격한 실험 연구도 행해지지만 개인적인 사례 연구나 질적 연구 방법도 많이 사용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