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 1948년 서울 출생, 자전거 레이서, 장편소설 『빗살무늬토기의 추억』,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성』, 『공무도하』, 『내 젊은 날의 숲』, 『흑산』, 『공터에서』, 『달 너머로 달리는 말』, 『하얼빈』, 소설집 『강산무진』, 『저만치 혼자서』, 산문집 『풍경과 상처』, 『자전거 여행』, 『라면을 끓이며』, 『연필로 쓰기』 등이 있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로 시작하는 김 훈의 장편 소설인 칼의 노래를 읽어 내려갔다. 이순신 장군이 '나'라는 1인칭 인물로 하여금 써 내려가 장군과 휘하의 인물들이 환영이 되게 하였다. 오직 나라의 안위를 염려하여 한 명의 왜군이라도 이강산을 밟지 못하도록 무장으로서의 마음을 행동으로 보이게 한다.
군공을 날조해서 임금을 기만했다는 조정의 모함으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고 원균이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조정은 이순신의 혐의를 입증하지 못했고 고문을 받은 후 출옥하여 백의종군을 시작했다.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임에 임금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원균의 함대가 칠천량 해전에서 참패한 후 수군을 폐하겠다는 임금에게 보내는 장계에는.
....... 이제 수군을 폐하시면, 전하의 적들은 서해를 따라 충청 해안을 거쳐서 한강으로 들어가 전하에게로 갈 것이므로 신은 멀리서 이것을 염려하는 바입니다. 수군이 비록 외롭다 하나 이제 신에게 오히려 전선 열두 척이 있사온즉......
전선 열 두척이나 있으므로 살아 있는 동안 적들이 우리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겠다는 소신을 적어 보낸다. 전선 열 두척은 죽을 것 같은 상황에도, 세대가 바뀌었어도, 한줄기 빛 같은 희망의 메시지로 세대를 이어 전해진다. 바다를 뒤덮고 있는 삼백여 척의 적선들을 상상하는 수령들은 말이 없다. 바다에서 어떤 진을 펼칠 것인가를 묻는 송여종에게 방책이 없으므로 이순신은 일자 진 뿐이라 대답한다. 삼백여 척의 적선 앞에서 열두 척의 배로 어떤 진을 펼치겠는지 묻고 있는 송여종도 할 말이 없어 보이면서도 묻고 있다.
"지휘체계가 무너지면 적은 삼백 척이 아니라, 다만 삼백 개의 한 척일 뿐이다."
송여종이 쏘아댄 화살 다섯 개가 등판에 꽂혀있는 구루시마의 시체를 사부 김돌손이 갈고리를 던져 건져 올렸다. 도깨비 같은 투구를 씌운 채 목을 베어 대장선 꼭대기에 걸고 적의 정면으로 향해 나아갔다. 장졸들의 함성이 일었고, 쇠나팔이 높게 울렸다. 적장의 목이 걸려있는 대장선을 보고 적들은 혼비백산하여 뒤엉키면서 부서지며 밀렸다. 일자진은 계속하여 밀어붙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명량해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순신은 장계에 적어놓은 대로 열 두척의 전선으로 삼백여 척 되는 왜군을 격파했다.
진린이 명 수군 5백여 척을 이끌고 이순신 함대와 합류하게 되고 임금은 명의 수군에게 천병의 수군이라 부르며 예로써 맞이하라고 유시를 보낸다. 강대국에 의지해야 하는 약소국의 비굴한 지도자의 모습이 그려진다. 힘이 없는 나라는 언제고 강대국 사이에서 차이게 되고 국민을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음을 역사가 알려준다.
늦가을 햇볕에 말린 볏단을 전선에 쌓아놓고 비가 내리지 않기를 빌었으나, 나흘째 되면서 가랑비가 내렸다. 쌓아놓은 볏짚이 속수무책으로 젖기 시작한다. 적선에 불을 붙일 계획이었던 볏짚이, 내리는 빗물에 볏짚이 젖어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제갈공명도 대책 없는 상황에 지휘관은 절망스럽다. 그러나 쌍무지개가 나타나고 햇볕이 내리비추면서 젖은 볏짚단을 말리는 장면을 볼 때의 지휘관은 하늘이 내 편임을 생각하며 힘을 받는다.
사나운 노량의 물결 위로 검은 깃발의 적선이 뒤덮었다. 위태로운 근접 전에 마른 볏짚을 적선 한 척마다 수십 단씩 던져졌다. 사부들이 적선에 쌓인 볏짚에 불화살을 꽂았다. 때마침 바람도 우리를 도왔다.
왼쪽 가슴을 무겁게 누르며 장대 바닥에 쓰러진 이순신장군을 송희립이 방패로 가리며 선실 안으로 옮겼다. 죽음은 졸음처럼 서서히 다가왔다. 내 시체를 이 쓰레기의 바다에 던지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졸음이 입을 막았다. 나는 내 자연사에 안도했다.
"지금 싸움이 한창이다. 너는 내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라."
이순신은 늘 죽음의 자리를 염두에 두었던 듯하다. 살아있다 해도 조정의 모함과 임금의 뒤틀린 마음을 회복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각오되지 않는 죽음이 두려웠다. 임금의 신뢰를 얻지 못한 장수, 어쩌면 백성들의 신뢰를 얻고 있는 장수를 두려워하는 임금 사이에서 나라의 존망을 우선하지 못하는 무책임한 지도자의 모습이 대비된다. 당파싸움에 밀려 헛된 죽음을 거부하고 전장에서 죽기를 원하는 장수의 마음으로 해석된다. 결국 또 다른 누명으로 압송되는 모멸을 겪었을 터, 헛되지 않은 죽음으로 살아있는 사람들의 입에 영원히 오르내리며 사자이나 산자가 되었다.
무술戊戌년 1598, 공의 나이 쉰넷, 11월 9일, 철수하는 적의 주력을 노량 앞바다에서 맞아 싸우다 전사했다. 이 싸움에서 적선 2백여 척이 격침되고 50여 척이 도주했다. 이순신의 죽음은 전투가 끝난 뒤에 알려졌다. 통곡이 바다를 덮었다. 이날 전쟁은 끝났다 -충무공 연보 중-
역사를 바탕으로 쓰인 글이기에 나라의 존망을 생각하게 한다. 정치권력에 의해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는 작금의 우리 지도자들이 필독하여 이 시대의 리더십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