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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현석 Apr 06. 2024

비빔밥

주절주절 #4

#비빔밥


반찬이 슬슬 동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평일에 시장에 들러 반찬거리를 사 와야겠다. 시장 안에 위치한 단골 가게는, 여러 반찬들이 봉지 당 3000원 정도로 저렴한 편이다. 저녁 메뉴를 생각하기 귀찮을 때, 나물은 밥과 함께 적당히 비벼 먹기 좋은 선택지다. 한 번 사두면 한 일주일가량은 반찬 걱정이 없는 것이다.

나물 반찬을 떠올리며 밤거리를 터덕터덕 걷다가 문득, 전에 친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요지는, 비빔밥과 음식물 쓰레기의 차이는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별 관련 없는 여러 음식들을 무질서하게 비벼버리는 비빔밥이, 역시 다양한 종류가 혼재된 채 아무렇게나 뒤섞인 음식물 쓰레기에 대해 차별성을 갖는 지점은 어디에 있는가.  친구는 해당 발언 이후, 주변 사람들로부터 많은 질타를 받았다고 한다. 불현듯 떠오른 친구의 말을 곱씹으며 산책을 이어간다. 음식을 쓰레기와 동일시한다는 사회적으로 학습된 불편함을 잠시 거둬둔 채, 출발점에서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 보기로 한다. 비빔밥이 음식의 지위를 갖는 이유는 무엇인가.

재료들을 비비는 요리사의 실력을 증거로 제시하기엔 왠지 부실하다. 비빔밥에 실력이 어디 있나. 10살짜리 애도 숟가락으로 비비는 실력은 어른 못지않다. 슥삭슥삭 비벼내는 걸 실력의 영역으로 치부하는 것은 다소 비약이다. 그렇다면, 재료의 신선도는 어떤가. 먹다 남은 재료는 쓰레기가 되는 것이다. 그럼, 먹다 남은 비빔밥은 곧바로 쓰레기가 되는 것인가? 음식이 자리한 위치는 어떤가. 음식물 쓰레기통에 자리하면 쓰레기인 것이다. 누울 자리에 따라 지위가 달라지는 건가? 그럼, 야외에서 양철통에 비비면 쓰레기인 건가. 그것보다, 음식과 쓰레기를 나누는 기준은 단지 외적인 요인에 기인하는 건가. 여러 대답들이 떠오르지만, 그 무엇도 명쾌하게 의문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 비빔밥, 넌 왜 이리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냐!

이런저런 생각으로 가득 찬 발걸음은 어느덧 공원으로 향한다. 주말 밤거리의 소음과 풍경이 마치 나물처럼 한데 섞인다. 젊은 연인들이 정답게 팔짱을 낀 채 밤바다를 따라 낭만적으로 걷고, 그 옆에 한데 모인 청년들은 욕지거리와 함께 담배에 불을 붙인다. 한쪽에선 주말에도 어김없이 근무한 노동자들이 땀에 절은 채 작업복을 어깨에 들쳐매고 느릿느릿 걸어가며 가래침을 뱉는다. 젊은이들은 화려한 옷차림으로 활기차게 웃으며 조명이 현란한 술집으로 향하고, 편의점 야외 테이블에서 소주로 병나발을 부는 아저씨는 코가 빨개진 채 여자들의 뒷모습을 음흉한 눈빛으로 훑는다. 고등학생이나 될 법한 학생 무리는 그런 남자를 보며 낄낄댄다. 종종 보이는 외국인들은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자기들끼리의 모국어로 이 소극에 가담한다.

공원을 지나자 바닷가가 펼쳐진 해변이 모습을 드러낸다. 밤바다에 수직으로 꽂힌 교각이 떠받치는 선소대교는 화려한 불빛으로 야경을 수놓는다. 그 옆에 육지와 연결된 장도는 예술가들의 작업 공간임을 드러내듯 은은한 광채를 발휘한다. 둘의 사이로 조업을 끝마치고 복귀하는 남루한 어선들이 유유히 순항한다. 바다 한켠에는 정박한 요트가 반짝이고, 차들이 빠른 속도로 줄지어 대교를 통과한다. 관광객들은 고대하던 여수 밤바다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며, 현지인들은 그런 그들을 흘긋거리며 지나간다. 나이, 성별, 출신, 인종 등 다양한 사람들이 무질서하게 한데 섞인 이곳 여수에 비빔밥의 모습이 겹쳐진다. 우연히 마주친 채 오가는 그들은 나물이요 재료이며, 그들을 에워싼 바다와 야경은 참기름이자 고추장이다. 카메라를 든 사람들은 피사체의 위치와 비율을 조정하여 먹음직스럽게 사진에 담아내지만, 결국 그들은 무자비하게 뒤섞일 운명이다. 휘젓는 움직임에 기준이나 공식은 없다. 질서는 비빔밥의 미학이 아닌 것이다.

비단 여수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최근 다녀온 서울 역시 그러한 비빔밥의 논리 안에 갇힌다. 경복궁역만 가도 알 수 있다. 갓을 쓰고 한복을 입은 외국인들과 헤진 옷차림으로 적선을 요구하는 노숙인들. 아이와 청년과 노인의 같은 듯 다른 활발함과 광기. 코트와 봄버와 나시티와 치마와 바지와 원피스에 대체 그 어떤 공식이 있단 말인가! 우연히 모인 그들은 어쩌다 마주쳤을 뿐이고 뒤섞이며 지나칠 뿐이다. 그 안에 어떤 명징한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은 마치 요리 프로그램에서 비빔밥을 평가하는 평론가의 진지함만큼이나 희극적이다. 비빔밥에 철학이 어디 있나. 그냥 재료 넣고 슥삭슥삭 비벼먹는 거지. 주절주절 전문 용어를 나열하는 평론가를 식당 주인은 한심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런 점에서, 비빔밥의 음식적 숭고함보다 음식물 쓰레기의 가벼움이 더 와닿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게 뭐가 중요한가. 먹으면 음식이고 버리면 쓰레기인 것을. 먹는 사람 옆에 대고 쓰레기라 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만, 미간에 잔뜩 힘을 주고 요리라 숭배하는 것도 왠지 우스꽝스럽다.

산책을 끝내고 집으로 향하는 길, 눈앞에 늘어선 아파트의 각진 창문에서는 저마다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다. 현현하는 사각 프레임 속 빛들을 보고 있으니 전에 봤던 백남준의 <다다익선>이 떠오른다. 1,003대의 TV 모니터에서 송출되는 무분별한 영상들. 잠깐, 생각해 보니 그것 역시 비빔밥이 아닌가! 국가와 시대를 막론한 화면 속 영상들은 나물이며 이들을 떠받치는 거대한 철골 기둥은 밥알이자 기름장, 그릇인 것이다. 작품이 만들어진 시기는 88올림픽이 열리던 때였다. 전두환으로 대표되는 군사정부와 독재, 경제 개발과 시민 탄압, 쿠데타와 올림픽, 세계화가 어우러진 당시의 한국 역시 비빔밥의 원형을 따른다. 아파트와 미디어. 현대를 상징하는 두 오브제는 비빔밥의 키치를 두른 채 근대의 진지함을 조소한다. 백남준이 갓 위에 케잌을 두르고 머리를 처박듯, 전통과 근본의 근엄함은 현대 미술의 쓸만한 나물로 재탄생한다.

어느덧 집 안에 들어서고, 나는 <다다익선>을 닮은 아파트를 이루는 창문에 불빛 하나를 추가한다. 귀에 꽂은 에어팟에선 쳇 베이커와 뉴진스를 거쳐 검정치마의 1집이 흘러나온다. 휴대폰을 켜니 인스타그램 속 사각 프레임에 광고와 연예계 가십거리, 사진과 영상이 무분별하게 나열되어 있다. 온 세상이 나물이고 쌀밥이다! 보기 좋게 사진에 담기면, 곧이어 힘 좋은 손놀림으로 슥슥 비벼지겠지. 이리저리 뒤섞이는 나물들은 언뜻 보면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하다. 나물과 사람과 모니터와 불빛이 한데 모여 춤을 추는구나. 문득, 데이빗 린치 감독의 영화 오프닝이 떠오른다. 잔뜩 희극적인 표정을 지으며 흐느적거리는 사람들과 그들 사이로 흐르는 할리우드. 인물과 배우와 영화와 시뮬라크르들. 린치 감독은 카메라 앵글과 편집이라는 숟가락으로 그들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린다. 그는 비빔밥의 미학적 본질을 알고 있는 자다. 아무래도 조만간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를 다시 한번 봐야겠다.


<다다익선>, 백남준


# 보이스



리움미술관을 찾았다. 관 내에선 필립 파레노의 <보이스>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최근 인기 있는 전시회임을 증명하듯 미술관 안은 가득 찬 관람객들로 시끌벅적했다. 미리 예매를 하지 않았던 나는, 창구에서 표를 구매한 후 사물함에 가방과 짐을 넣어두고 직원분의 안내에 따라 전시관에 입장했다.

전시장에 들어선 후, 맨 처음 눈에 들어온 오브제는 피아노였다. 연주자가 부재한 피아노의 건반은 프로그램에 의해 스스로 눌리고 있었다. 피아노에선 음악이 흘러나오고, 바로 위 천장에서는 먼지 같은 존재들이 피아노 위에 내려앉고 있었다. 황금빛 먼지는 형질을 특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연주자의 부재를 드러내는 것 같기도, 그러나 엄연히 존재하여 불규칙하게 흩날린다는 점에서 흘러나오는 연주를 나타내는 것 같기도 했다.

피아노 위에 먼지들이 떠다닌다면, 피아노를 에워싼 전시장 곳곳에선 물고기 모양의 풍선들이 부유하고 있었다. 실이 매달려 있겠거니 싶었는데, 관람객들이 풍선을 이리저리 옮겨놓는 걸 보고 풍선에 아무런 장치도 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고기 모양의 공기주머니들은 그저 무질서하게 이리저리 떠다닐 뿐이었다. 천장에는 철조물에 낀 풍선들도 종종 보였다.

파레노의 전시회 곳곳에선 음악과 목소리, 풍선과 빛과 먼지들이 공존했다. 그러나, 정작 뚜렷한 형상을 지닌 작품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가끔씩 보이는 정물들(아이의 얼굴과 어른의 몸을 한 인물화, 성인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합성된 포스터 등)도 뒤틀린 모습으로 혼란을 일으킬 뿐이다. 대상은 다들 어딘가 불완전했으며,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건 현상이었다. 비정형의 대상들은 인간의 시각에 대한 믿음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존재를 과시하며 떠다녔다. 그 아래, 역시 대상으로 존재하던 나는 시각을 통해 투사했던 나의 인식을 재고했다. 내가 보는 것은 과연 실재하는가. 나의 인식과 존재는 완전하다 할 수 있는가.

미술관을 나서며, 문득 어떤 전시를 상상했다. 상설 전시가 진행 중인 평화로운 미술관, 한 남성이 저벅저벅 전시관에 입장하더니 품속에 지니던 칼로 누군가를 찌르는 것이다. 쓰러지는 육체와 분출하는 선혈. 사람들은 당황한 채 패닉 상태가 된다. 겨우 정신을 다잡는 사이,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차린다. 전시관 내에 상주하는 안내인들이 미동도 없이 서 있는 것이다! 관람객들은 이 상황이 혹시 전시의 일종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갖는다. 사람들은 이윽고 집으로 돌아간다. 누군가는 신고를 하고, 누군가는 SNS에 관련 내용을 포스팅하며 지인에게 전화를 걸기도 한다. 그렇게 이 소극은 각자의 인식 속에 자리하게 된다.

다음 날, 전날의 사태에 대해 궁금증을 지닌 관람객들은 다시 미술관을 찾는다. 더없이 평화로운 전시관은 어제의 참극의 흔적이라곤 어디에도 없으며, 여전히 안내인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전시관 한켠에 자리한다. 같은 어제를 공유한 사람들은, 자신의 인식과 기억을 재고하기 시작한다. 누군가는 전날의 상황을 전시의 일종이라 여기고, 누군가는 끔찍한 범죄의 은닉이라 판단한다. 자신의 기억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부재하는 하나의 대상적 사건은, 목도한 개인들의 인식 속에 각기 다른 형질로 자리하게 된다. 사람들은 저마다 생각의 갈래를 펼쳐나가고, 전시는 그런 그들의 사유와는 상관없이 유유히 진행된다.



<보이스>, 필립 파레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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