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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현석 Apr 13. 2024

이유

주절주절 #5

#이유


이번 주에는 아이들의 생존수영 학습이 진행되었다. 학교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수영 시설에 도착한 후, 아이들을 수영장으로 보내고 나서 옆 반 선생님과 함께 잠시 숨을 돌렸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던 도중, 옆 반 선생님께서 질문을 건네셨다.

“그런데, 교사는 원래 하고 싶었던 거야?”

교대를 다닌 후로, 그리고 교사가 된 이후로 종종 받게 되는 이 질문은 그간 항상 일관된 답변으로 이어졌다.

“아, 수능 끝나고 어디 갈까 하던 중에, 동네 친구가 같이 교사하자고 해서요..”

그러면 대개는 흥미로운 표정과 함께 친구 따라 강남 갔다며 재미있어한다. 옆 반 선생님도 마찬가지로 웃으며 신기해하셨다. 그 친구가 같은 지역에서 근무 중이라는 말은 최근에 덧붙이게 되었다.

무사히 수영을 마치고 학급회의까지 진행한 후 아이들을 떠나보낸 오후 3시. 텅 빈 교실에 홀로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도중, 문득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안중에도 없던 이 자리는 어느덧 집 다음으로 익숙한 공간이 되어버렸다. 어릴 적 선생님들을 보며 저 사람들은 어떻게 다수의 사람들을 인솔하고 장악하며 책임질 수 있을까 싶었는데, 시간이 변하고 강산이 흘러 2024년에는 학급 구호를 외치고 싸운 아이들을 혼내며 발표를 시키고 숙제 안 한 사람을 찾아내는 내가 존재하게 되었다. 왁자지껄 떠드는 아이들 앞에서 집중하자며 고래고래 소리치는 나를 카메라에 담아 보게 된다면, 아마 일면식도 없는 사람처럼 낯선 느낌이 들지 않을까. 의자를 뒤로 살짝 젖혀놓은 채, 가만히 앉아 나라는 인간에 교사의 정체성을 대입해 본다. 그런데, 나는 교사로서 어울리는 사람인가.

나는 덜렁대는 편이다. 길을 걷다 여기저기 부딪히기 일쑤이며, 물건도 자주 흘리거나 잃어버린다. 성격이 급해 차분함과는 거리가 멀며, 말이 빨라 발음이 정확하지 않다. 귀가 얇은지라 타인의 말을 쉽게 믿으며, 웃음이 헤프고 생각도 단순하다. 차근차근 나의 특징들을 열거하고 나니, 도저히 교사라는 직업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문득, 대한민국 교육부와 임용 체계에 의문을 품게 된다. 이런 사람을 교사로 임명하고 자격증을 수여하다니, 국가기관이 이래도 되는 것인가!

저 너머에 가 있던 생각의 초점을 지금으로 다시 옮겨본다. 그래서, 무슨 문제 있나? 교직경력이 슬슬 2년이 되어가는 지금(아직 턱도 없지만), 거쳐간 학교에서 별문제는 없었으며, 구성원들과 큰 트러블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복잡한 행정 절차들은 교사로서 나의 존재에 대해 별다른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고, 그것은 같이 부대껴 생활하는 학생과 동료, 관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매달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은, 네가 아직 교사로 있는 데 이상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럼 나는 어떤가. 친구 따라 별 고민 없이 선택한 대학교와, 춤추고 술 마시던 도중 임용 준비가 생각보다 적성에 맞아 교사가 되어버린 지금. 애초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별로 실망도 하지 않았으며, 그래도 애들은 귀여운 면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물론, 가끔은 아주아주 밉게 보일 때가 있다.) 주말과 방학과 월급날을 기다리며 뭐 재미있는 것들 없나 뒤적이면서 나름 무난하게 잘 지내는 중이다. 어쩌다 되어버린 교사인데, 왜 교사를 하게 되었고 무엇을 할 거냐는 거창한 질문들 앞에선 왠지 겸연쩍은 느낌이 든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안담? 가르칠 내용들은 어차피 정해져 있고, 그건 해야 할 업무도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왜’나 ‘무엇’이 아니다. 이미 교사가 되었고 한동안은 그럴 예정인 상태에서, 결국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남게 된다. 거기서부터 모든 게 시작되는 것이다.

최근 내가 관심을 쏟는 부분들도 그러한 생각의 연장선이다. 학생회를 어떻게 굴릴까 고민하며, 행사들을 재미있게 홍보하고 파급력을 낼 방법을 찾아 캔바를 뒤적거리고 있다. 매번 뻔한 사연의 라디오 방송에서 탈피하여 어떻게 하면 교장선생님을 초대석에 섭외하나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1층 중앙 복도 앞 방치된 스마트 TV를 살려서 어디에 써먹을까 고민한다. 네 일도 아닌데 괜히 힘 빼지 말라는 감사한 조언들도 있었지만, 고리타분한 공문들과 비슷비슷한 일과들이 앞으로도 이어질 예정이라면, 권태의 피로를 달랠 표현 방식들의 탐색이 되려 새로운 활력소로 작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보여줄 것들은 정해져 있다. 문제는, 어떻게 이들을 보여주고 감동을 줄 것인가이다.

퇴근 후, 집에 와서 씻고 저녁을 먹은 다음 스피커로 음악을 틀어놓고 서재를 뒤적거린다. 소설은 너무 무겁고, 에세이는 왠지 가벼운 듯한 금요일 밤, 책장 한켠에 있는 이상의 시집이 눈길을 끈다. 한국 대표 모더니스트였던 그라면 다르지 않을까. 그의 시에 혹시 뭔가 길이 있지 않을까. 책을 펼치니, 까마귀의 눈을 빌린 화자가 북적대는 세상을 관조하며 담담히 시를 읊는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오감도>시제1호, 이상




#영화


어릴 적, 나는 거침이 없었다. 20대 초반까지 거주했던 광주는, 곳곳에서 행인들에게 포교를 시도하는 종교 단체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지금이라면 예의 웃음과 함께 자리를 피했겠지만, 당시의 나는 타인에게 맹목적인 믿음을 전가한다는 행위에 대해 날선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나오던 도중, 내게 다가와 만물은 인간 중심이라며 교리를 전파하는 한 중년 사내와 그 자리에서 30여 분간 설전을 벌이기도 했으며, 초등학교 앞에서 교주를 신격화하는 책자를 나누어주는 교인에게 화를 내며 내쫓기도 했다. 아이들에게 무슨 짓거리냐며 겁 없이 쏘아붙이던 내 앞에 흐리멍덩한 눈을 한 채로 서 있던 그의 모습은 한동안 기억에 남곤 했다.

종교가 없는 나로서는, 외부의 객체에 온 믿음을 쏟는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실체 없는 허상에 삶을 바쳐 믿음을 구가하는 것을 이상주의라 치부했으며, 명확한 실체를 신격화하며 추종하는 태도는 질병이라 여겼다. 영화 <밀양>을 보고서는, 부조리 속에 괴로워하는 신애(전도연)의 모습에 이런 나의 사고를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봐라, 결국 믿음은 덧없는 것이 아닌가!

염세적이고 비판적이며, 결국 믿을 건 나 자신뿐이라고 굳게 확신하던 나의 삶은, 그러나 중독과 불안의 연속이었다. 고등학생 때는 입시에 빠져 매일 4시간씩 자며 공부에만 매달렸다. 졸업 후, 대학생이 되어서는 인간관계와 술에 빠져 매일 술자리에 나가곤 했으며, 임용 시기에는 연애에 집착했다. 입대 후에는 문학에 빠져 미친 듯이 글을 쓰고 책을 읽었으며, 월급은 책을 사는 데 모두 쏟아부었다. 제대 후 복직을 하고 나서는,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는가에 집착하여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쏟았다. 믿음과 신앙을 조소하던 나는, 되려 외부의 불완전한 객체들에 집착하고 휘둘리며 불안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곤 했다.

삶을 버텨내며, 문득 그러한 나의 집착 또한 종교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교란 무엇인가. 개인의 사유를 지배하며 삶의 기준이자 지침이 되고 곳곳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흐름이자 현상이다. 외적 존재에 온 관심을 쏟으며 시간을 송두리째 바치는 나의 중독적 태도는 종교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종교의 원리에 의문을 품고 거부감을 보였던 나는, 실은 스스로도 종교의 법칙 아래 놓여있던 것이다. 나의 이질감은 단순히 믿음의 대상의 차이에서 기인하였을 뿐이다.

밖을 둘러보니, 세상 역시 그러한 종교의 공식이 흐른다. 선거철 유세 차량에 올라탄 사람들은 후보의 이름을 연호하며 연신 손을 흔든다. 인터넷 안에서는 연예인들의 열애설 기사가 복제되고, 댓글은 팬이라 자청하던 사람들의 욕설과 응원으로 난장판이 된다. 팬더의 중국 송환에 감정이입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애니 캐릭터의 생일 축하 광고가 게시된 지하철역에서 인증샷을 찍는 사람들도 있다. 저마다 실체적, 허상적 존재들에 이입하며 정신과 시간을 쏟는 세상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종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찾아 헤맸던 성은 사실 내가 딛고 선 세상 그 자체였나. 카프카적 원리가 삶의 소극을 관통한다.

영화 <마스터>(2012)에서 프레디(호아킨 피닉스)는 결국 랭커스터(필립 시모어 호프먼)와 코즈를 떠난다. 랭커스터에게서 자신의 불완전함을 목격한 프레디는 차라투스트라처럼 하산하지만, 세상 역시 코즈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금 랭커스터를 찾아간다. 그러나, 역시 프레디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본 랭커스터는 프레디를 떠나보낸다. 종교에서 벗어났지만 삶 또한 종교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프레디는 그 스스로 종교가 된다. 그의 믿음은 인식 저편에 있는 과거의 순수와 평화를 좇으며, 배경 음악으로 <Changing Partners>가 흐른다.

무질서한 믿음과 추종으로 얽힌 세상은 여전히 완고하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거라곤 나의 믿음을 통합하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 대상은 메시아일 수도, 혹은 나 자신일 수도 있다. <밀양>에서 신애가 안식을 얻었던 순간은 믿음이 발현되었을 때였다. 이 영화는 종교를 비판하지 않는다. 단지, 부조리 또한 종교의 법칙 아래 놓인 세상에서 믿음을 구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드러낼 뿐이다. 여전히 평화는 위협받고, 불안은 삶과 잔존한다. 그 속에서 나의 인식은 어디에 있는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그러한 의문은, 지금껏 꾸준히 글을 작성하고 일기를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스터>(2012), 출처 : 왓챠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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