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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현석 Apr 20. 2024

이야기

주절주절 #6

#이야기


어릴 적, 나는 침대 위에서 뛰어다니는 걸 좋아했다. 저녁 식사 후 해가 적당히 저물면, 나는 방문을 닫아놓고 침대 위에 올라 이런저런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혼자만의 역할극을 펼쳤다. 머릿속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동안, 몸은 상상 속의 주인공이 되어 적을 무찌르고, 권력을 쟁취하기도 하며 때로는 장렬히 전사하기도 하였다. 잔뜩 체력을 쏟아부은 후, 기진맥진하여 침대에 털썩 누울 때면 가상의 이야기도 끝이 나고, 그 후로 짧은 고요가 찾아왔다. 행여 누가 쳐다볼까 조마조마하며 이어지던 1인극은, 중학교에 입학하고 사춘기가 찾아오면서 점차 뜸해지더니 이윽고 사라지게 되었다.

어쩌면 이야기에 대한 나의 동경은 그때부터 시작되었을 지도 모른다. 더 이상 침대에서 역할놀이를 하지는 않았지만, 사춘기를 거치며 정점을 달리던  감성으로 나는 매일 이런저런 상상을 하곤 했다. 사람은 죽으면 어떻게 될까, 나는 정말 존재하는 걸까. 흔히 ‘중2병’이라 불리는 이러한 고민들은, 그러나 당시에 꽤나 진지하게 내 머릿속에 오래도록 머무르곤 했다. 입시 지옥에서 벗어나 대학생이 되자, 나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대개 장소는 달리는 버스 안에서였다. 차창 너머 빛처럼 흐르는 풍경을 바라보며 한 문장씩 끄적이던 게 모여, 어느덧 내 메모장 안에는 꽤 다양한 시들이 자리하게 되었다. 20살 여름, 한낮의 도로를 달리며 썼던 시는 다음과 같았다.

너의 품에 안길 수는 있어도
너에게 영원히 머물 수는 없기에

너와 포근한 햇빛을 느낄 수는 있어도
비에 젖는 너의 몸을 감쌀 수는 없기에

허나
따스한 봄 쓸쓸한 가을
늘 그곳에 자리한 너이기에

널 두고 떠나는 걸음에
미련은 두지 않으련다

<공터>, 2017.07.02


군에 입대한 후, 미친 듯이 책을 읽으며 나의 표현 방식은 시에서 소설로 옮겨갔다. 여름의 끝물, 아침 점호를 위해 연병장에 집합하던 도중 고양이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길 위를 지나는 것을 보았다. 당시 뉴스에서는 기록적인 홍수로 인해 침수된 반지하 방과 사망한 일가족에 대한 소식이 이어졌다. 왜 고양이를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일과 후 개인 정비 시간 내내 쓰던 소설은 반지하 방에서 가족을 잃은 주인공과, 그의 앞에 덩그러니 놓인 고양이 한 마리에 관한 내용이었다. 감정이 과해 다소 작위적인 문체로 쓰인 이 소설은 당연히 신춘문예에 낙방했지만, 내가 쓴 첫 소설이 남겨진 자의 이야기를 다루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머릿속에 명징하게 남아있다.

제대할 때까지 여러 편의 습작을 썼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이별 후 남겨진 자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가족, 연인, 친구와 이웃을 잃은 사람들이 느끼는 슬픔과 고통, 하루하루가 겨우 버티는 과정인 그들의 삶은 오래도록 나의 관심 속에 자리했다. 이야기 자체에 흥미를 느꼈던 아이는 떠나는 자의 심경을 노래하는 시를 쓰더니, 이윽고 남겨진 자의 고통을 들여다보는 소설을 다루게 되었다. 작년 초,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환상의 빛>(1995)을 보고 나서 한동안 멍한 채 하늘을 바라보곤 했다. 원인 모를 자살로 남편을 떠나보낸 주인공이 그의 부재를 점차 감각하는 이야기는 나의 마음속 어떤 부분을 자극했다. 삶과 죽음이 가까이에 있으며, 우리는 언제나 남겨진 자들이자 떠날 존재라는 사실은 내 마음을 흔들었다.

이런 나의 초점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그 근원을 알 수는 없지만, 나의 기억은 2014년의 봄으로 향한다. 당시 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신입생이던 나는, 동아리 면접을 위해 선배들이 있는 한 교실에 앉아 있었다. 교실 앞에 자리한 TV 모니터는 별안간 긴급 뉴스라며 헤드라인을 띄우더니, 큰 배 한 척이 침몰하는 영상을 송출했다. 너 나 할 것 없이 당황했던 우리들은, 그러나 승객 전원 구조라는 소식을 듣고 적잖이 안심했다. 그리고, 모두가 같은 심정이겠지만, 잠시의 그 안도감은 걷잡을 수 없는 슬픔과 괴로움의 전조가 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노란 리본이 휘날렸고, 학교는 모든 행사를 간소화하거나 취소했다. 뉴스는 선박이 점차 가라앉는 과정을 생중계했으며, 그 디지털 화면 앞에 우리는 인간의 끝없는 무력함을 느꼈다.

당시 17살이던 나는 어느덧 성인이 되었고, 이제는 아이들 앞에 자리한 초등 교사가 되어 있다. 1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르며, 나의 시선은 바다에 침몰한 그들에게서, 땅 위의 남겨진 자들로 옮겨갔다.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그들은 우리의 상상 속에서 다시금 태어날 수 있다. 나 역시 여러 번 머릿속에서 그들을 살려내곤 했다. 사실은 배에서 탈출한 그들이 새로운 곳에서 잘 살고 있을 거라고, 혹은 부조리한 세상에서 벗어난 그들이 천국에서 안식을 누릴 거라고. 그러나, 남겨진 이들은 그럴 수 없었다. 이들은 여전히 슬픔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기약 없는 괴로운 기다림과 함께 하루하루 버텨내는 중이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들의 기다림을 쓰기 시작했다. 결코 해피 엔딩일 수 없는 이야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글자를 새겨 넣을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다. 그렇게 나의 메모장에는 남겨진 이들이 자리하게 되었다. 이들은 떠난 자들을 그리워하며 슬픔과 괴로움을 느낀다. 그러나, 이들은 그럼에도 여전히 살아간다. 이 지난한 삶을, 불행과 부조리로 가득한 이 세상을 말이다.

올해 초, 영화 <너와 나>(2023)를 보고 나서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리곤 했다. 영화 감상 후, 독립 영화관 한켠에 있던 세월호 엽서를 집에 가져왔다. 얼마 후, 서점에 진열된 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을 집어 와 읽었다. 그즈음 단편 소설을 구상하기 시작했으며, 남편을 사고로 잃은 주인공이 슬픔을 받아들이는 내용이었다. 바쁜 일상 탓으로 돌리며 차일피일 미루고 있지만, 메모장 한켠에 자리한 소설의 내용은 여전히 머릿속에 맴돌고 있다. 기다림 자체가 고통이자, 잠시의 행복도 죄책감처럼 느껴지는 슬픔을 내가 온전히 공감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괴로움에 조금이라도 가닿고자 나는 부지런히 이야기를 만든다. 어릴 적 침대에서 뛰놀던 아이는, 방식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그 속에서 인물들은 사랑을 하고 이별을 겪기도 하며, 슬픔 속에서도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하기도 한다.


환상의 빛(1995), 출처 : 씨네룩스




#선거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마무리되었다. 언론은 출구조사와 개표 결과를 각종 지표를 통해 나타내며 정당들의 희비를 집중 조명했다. 더러는 고개를 떨군 채 절치부심하였고, 더러는 승리의 기쁨을 누렸다. 한동안 동네를 들쑤시던 선거 유세가 사라진 거리엔 다시 고요함이 찾아들었다.

사전투표를 미처 하지 못했던 나는, 당일 늦잠을 잔 후 비적비적 일어나 오후에 집 앞 커뮤니티 센터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선거를 했다. 선거가 거의 마무리돼가던 시간이라 센터 안은 한산했고, 투표를 안내하는 공무원들은 지친 기색으로 서명란을 제시하고 표를 건네주었다. 그렇게 약 1분여 간의 시간 동안 투표가 이루어졌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책무는 비로소 완수되었다. 투표소를 나서니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고, 놀이터엔 맑은 날씨를 즐기는 아이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한때 나는 선거를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의문을 품었었다. 대부분 후보자들의 공약은 비슷비슷하다. 전에 친구와 이야기하며, 혹시 후보자들의 공약을 서로 공유하는 모종의 커뮤니티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상상해 보았을 정도다. 위성정당이 유행처럼 번졌던 어느 선거에서는, 당선 시 거대 정당에 편입하겠다는 문구가 곳곳에 출몰하곤 했다. 저건 자존심을 파는 행위가 아니냐며 조소하면서도, 표를 얻기 위한 현실적인 방법이 저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는 생각이 미치자 조금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인기투표에 지나지 않는 이러한 선거가 무슨 의미냐며 삐딱선을 타다가도, 학습된 참정권의 가치 인식은 결국 나를 투표소로 이끌곤 했다.

20대 후반이 되고 공무직에 종사하게 되면서, 나는 일이라는 것에 있어 구성원의 존재 자체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실감했다. 수십 년간 이어져 내려온 업무는 그 뼈대가 크게 다르지 않다. 일정한 절차를 거쳐 들어온 사람이 절차화된 업무를 숙달하고 나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여 그 업무를 처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사회는 일정 부분 유지된다. 투표와 정치가 사회 존속을 본질적 목적으로 둔다면, 선거 행위 자체는 현재 지속되고 있는 사회가 여전히 유지되도록 하는 데 동의한다는 무언의 합의일 것이다. 투표는 의무가 아닌 권리이기에, 자발적 행위로 이루어진 67%의 투표율은, 그래도 이 사회가 무너지지 않고 지속되도록 하는 데 절반 이상의 합의를 이루어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SNS와 언론, 커뮤니티 등지에선 투표하지 않는 자들을 무개념이라 칭하는 날선 의견들이 종종 보이곤 한다. 강제성 없는 신뢰와 합의로 이루어진 사회이니만큼 그들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엄연히 권리로서 존재하는 참정권의 행사 주체에 당위적 도덕성을 강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러나, 그 또한 세상의 단면이자 삶의 방식이다. 어쨌든 선거는 이상 없이 치러졌고, 결과는 미디어를 통해 전파되었다. 개인적으로, 세상이 좋은 방향으로 바뀔 것이라는 낙관적인 기대는 하지 않는다. 여전히 삶은 알 수 없고, 행복과 고통은 상존할 것이다. 그러나, 변함없이 흐르며 지속될 세상과 사람들의 모습은, 어쩌면 그 자체로 어떤 의미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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