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현석 Apr 27. 2024

기억화

주절주절 #7

#기억화


알랭 드 보통의 <공항에서 일주일을>은, 작가가 일주일 간 히드로 공항에 머물며 바라본 단상에 관한 책이다. 그는 이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공항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조망한다. 출발과 도착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경유지인 공항은, 비장소로 기능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특수성으로 인해 누군가에게는 장소로 탈바꿈되기도 한다. 책 속에는 공항의 풍경들이 사진으로 수록되어 있다. 그 안에 있는 가족, 연인, 친구 등 수많은 존재들은 마주치고 헤어지며 서로를 기억 속에 아로새긴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기억으로 존재한다. 서로 다른 시공간을 경유하는 우리는 우연히 마주치며 결국엔 헤어진다. 함께함에 대한 물리적인 제약을, 인간은 기억으로 극복한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기억으로 남게 된 서로는 그 존재를 감각할 수 있다. 기억은 마치 게임 속 세이브 파일처럼 언제든 꺼내볼 수 있기에, 언제 어디서든 우리는 머릿속에 타인의 존재를 불러올 수 있다. 우리는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세계 속에서 오랜 인연과 애틋한 만남을 이어가는 중일 지도 모른다.

이렇듯 인간은 필연적으로 타자에 의해 기억화의 과정을 거친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기억화를 겪는 직업을 꼽자면, 아마도 교사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추억의 대표격인 유년 시절을 가득 메우는 학교라는 공간과, 그 중심부에 자리한 교사는 그를 거쳐가는 수많은 아이들의 머릿속에 기억으로 자리하게 된다. 순간에 집중하는 아이들은 점차 자라며 과거를 반추하게 되고, 대개 한 번쯤은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는 교사와 반 친구들을 떠올리게 된다. 매년 수많은 아이들을 마주하고 떠나보내는 교사는, 그렇기에 무수한 이들의 기억으로 박제되곤 한다.

첫 발령을 받았던 2021년, 이러한 생각 끝에 나는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다행히 교직에서 흔치 않았던 젊은 나이는 아이들로 하여금 친밀함과 좋은 인상을 남기기에 유리했다. 그 시절 나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교사가 되려고 부단히도 애썼던 것 같다. 수업은 아이들이 즐거워할 만한 놀이 중심으로 재구성하였고, 보상 및 간식 등을 아낌없이 나누어주었으며, 아이들의 시선에 신경을 많이 쓰곤 하였다. ‘괜찮은 사람이었구나 싶은 교사 정도만 되자.’ 애써 이렇게 다짐하곤 했지만, 나의 깊은 욕망 속에는 아이들이 나를 좋았던 기억으로 박제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 모든 이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기는 참 어렵다는 것을 새삼 깨닫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혼내야 하는 상황도 있었으며, 충돌하고 갈등하는 아이들을 중재하는 과정에서 억울함을 모두 해소해 주지 못하기도 하였다. 교육의 과정 속에서 불만을 가지는 아이들도 있었고, 찜찜함을 안고 어색한 관계로 남게 된 이들도 있었다. 기억은 비상호성을 띄기에, 나라는 존재에 대한 아이들의 기억화에 나는 개입할 수 없었다. 아마도 나는 그때, 그러한 사실 앞에 무력감을 느꼈던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구나. 나는 그렇게 통제력을 상실한 채 각각의 기억 속에 박제되었다.

해가 바뀌고, 군 복무와 제대 후 다른 학교로 복직하게 되면서 나는 점차 이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라는 기억을 형성하는 데에 내가 개입할 수 없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들과 대면하는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것일 뿐이었다. 복직 후 마주한 아이들과도 반 년 가까이 생활하며 서로를 점차 기억으로 형성해갔다. 그 과정에서 분명 누군가는 나를 아쉬운 기억으로 남겨놓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의 법칙은 상호 간의 충돌과 갈등을 전제로 한다. 그 정도를 줄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 삶이며, 그 삶을 통제할 수 있는 순간은 현재뿐이다. 나는 서서히 나를 기억으로 남길 미래에 대한 생각을 거둬들였다. 공항에서 애틋한 순간에 집중하는 연인들처럼, 나는 시선의 초점을 현재로 옮기려 노력했다.

오늘도 정신없는 하루 끝에 아이들을 하교 시켰다. 싸운 아이들을 혼내고,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 아이들을 다그쳤으며 청소를 시키고 급식 지도를 했다. 왁자지껄한 하루 끝에 저마다 집으로 돌아간 아이들은, 오늘의 기억을 손에 한 움큼씩 가져갔을 것이다. 그 기억은 누군가에겐 행복한 모습일 수도, 누군가에겐 속상한 모습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형상들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씩씩하게 교실 문을 나서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저 아이의 뒷모습도 머지않아 나의 기억에 남게 되겠구나. 귀여울 때도, 가끔은 미울 때도 있지만 그래도 하루가 남긴 기억을 돌이켜보면 마음 한켠이 따뜻해진다. 아직은 이 직업을 계속해도 되겠구나. 나만의 기억화를 마무리한 후, 다시 돌아올 만남을 기약하며 빈 교실을 정리했다.





#야구


2024 프로야구가 개막한 지도 한 달 가까이 지났다. 고향인 광주에 연고를 둔 기아 타이거즈가 간만에 1위를 달리고 있다. 요즘은 퇴근 후, 저녁을 먹고 쓰러지듯 침대에 누워 야구 중계를 트는 게 일상이 되었다. 널브러진 채 머리를 비우고, 주먹만 한 공을 둘러싼 경쟁과 응원을 보다 보면 왠지 모르게 피로가 다소 풀리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야구에 대한 나의 흥미는 어릴 적부터 존재했다. 2009년, 당시 초등학생이던 나는 가족들과 함께 간 여행지의 숙소에서 TV로 기아 타이거즈의 극적인 KS 우승의 순간을 목격했다. KBO 역사상 전무후무한 7차전 9회 말 끝내기 홈런은, 코흘리개 아이를 야구라는 신세계로 이끌기에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그 뒤로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의 저녁은 TV 속 실시간 야구 중계를 시청하는 것이 기본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야구 경기가 없는 월요일은 늘 어색함과 더불어 심심함이 감돌곤 했다.

어렸을 때 나는, 경기 내용과 결과에 따라 희비가 심하게 엇갈렸다. 우리 편 선수가 실책이라도 하면 분노를 참지 못해 발을 동동 굴리곤 했다. 좋아하는 선수였던 양현종이 대량 실점을 하는 날엔 우울에 빠진 채로 침대 속으로 들어가기 일쑤였으며, 우리 팀이 이기면 그날 밤은 내내 싱글벙글이었다. 팀이 무력하게 진 어느 날에는 성질을 부리다가 잔뜩 혼이 나기도 하였다.

그렇게 매 경기의 결과에 일희일비하던 아이는, 여전히 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경기가 이루어지는 아이패드 속 작아진 화면을 무심히 바라보는 어른이 되었다. 그의 표정에는 어릴 적 극심히 요동치는 감정의 진폭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팀이 이기면 흥미진진하게 경기를 관람하며, 팀이 지면 허탈하게 웃으며 화면을 끌 뿐이다. 15년 가까운 세월은 야구에 대한 흥미 자체를 빼앗지는 못했지만, 경기를 즐기는 방식은 변화시키기에 충분했다.

어느 날 문득, 어릴 적에 왜 그렇게도 분해하고 길길이 날뛰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건 아마도, 어린아이는 상황을 통제하고 싶어 하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기심이 아직 사회화로 다스려지지 않은 아이는 대개 자기 마음대로 상황을 제어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야구 경기는 철저히 관중의 영향을 벗어난 세계이다. 엄격한 규칙 아래 엄선된 구성원들끼리의 상호작용은, 그 외연을 둘러싼 관중의 개입을 완벽히 배제한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도루 저지를 하는 투수에게 야유를 보내고, 팀 선수의 기를 살리기 위해 목청껏 응원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분리를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이에게 경기 결과는 극심한 감정의 흔들림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관중의 무력함은, 지난한 하루를 끝내고 기가 잔뜩 빨린 채 집으로 돌아온 직장인에게는 오히려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삶의 주도권이 제한된 아이와 달리, 성인은 삶의 많은 영역을 자신의 통제로 제어해야 한다. 갖가지 일들을 처리하는 데 체력을 쏟아부은 어른에게는, 여전히 통제해야 할 것들이 아닌 그저 관망할 대상이 필요하다. 과거 원시인들이 모닥불을 바라보며, 사냥하느라 받은 온갖 자극들을 털어내는 것처럼, 정신없는 하루를 보낸 후 돌아온 직장인에게는 그저 바라보고 감상할 뿐인 하나의 모닥불이 필요한 것이다. 관중과는 상관없이 스스로 유유히 흘러가는 야구 경기는, 그러한 점에서 모닥불로 제격이다.

오늘도 퇴근 후, 씻고 저녁을 차린 뒤 아이패드로 야구 경기를 켠다. 15년의 세월 후, 베테랑이 된 양현종은 무려 7개의 피안타에도 불구하고 2자책점으로 퀄리티스타트에 성공했으며, 타석에서는 외국인 타자의 2점 홈런을 앞세워 짜릿한 1점 차 승리를 이루어냈다. 최근 기세가 좋은 것으로 보아, 당분간 팀의 순위는 유지될 듯싶다. 오늘도 그들만의 리그는 끝이 났고, 멍하니 경기를 시청하던 관중의 일과도 끝이 났다. 아마도 한 시간 후면 유튜브에 편집된 하이라이트 영상이 업로드되겠지. 글을 마저 정리한 후, 자기 전 15분가량의 영상으로 하루를 마무리해야겠다.


출처 : 티빙 KBO 2024 NC vs KIA (2024.04.19)
이전 06화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