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절주절 #2
3월 2번째 학급 회의. 새 학년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 가고, 학급 회의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도 대강 알아차린 아이들은 학급의 작동 방식에 대해 의문을 품을 만한 여유가 생겼다. 이전 회의에서 할 말 없다며 쭈뼛쭈뼛하던 아이들은 어느새 생활에서 불만족스러웠던 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여러 안건들 중에서 가장 쟁점이 되었던 이번 회의의 주제는, 학급 내 자리 배치 방식의 변경이었다.
기존의 자리 선정은 학급 번호에 의한 일률적 편성으로 이루어졌다. 학기 초 아이들의 이름을 외우기 용이하며, 각각의 성향과 서로 간의 상성을 파악하기 편리하였기 때문이다. 원하는 자리를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싶은 아이들의 욕망은, 기존 구성을 고수한다는 나의 지침을 반박할 여러 방향을 모색하게끔 하였다. 약간의 토의 시간을 가진 결과, 아이들의 의견은 각자 원하는 자리에 마음대로 앉자는 극단적 자유주의와 뽑기를 통해 정하자는 합리주의로 나누어졌다.
두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하자, 우리는 민주주의의 꽃인 투표를 통해 방안을 정해보기로 하였다. 단, 해당 방안에서 문제점이 드러날 경우 다른 방안을 채택한다는 전제를 두었다. 신이 난 아이들은 투표를 진행했고, 마음대로 자리에 앉는다는 본능적 욕망의 물결은 압도적 차이로 극단적 자유주의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쯤 되니, 나도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뽑기를 전제로 자리 배치 방식의 화두를 던졌는데, 대중의 욕망은 내 예상보다 훨씬 솔직했다. 나는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채택된 의안을 가결했다. 혹시 모르지 않는가. 예상외로 모두의 만족을 이끌어내는 결과로 이어질지.
신이 난 아이들은 이리저리 의자를 끌며 부산히 자리를 옮겼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곳곳에서 아이들의 불만 섞인 탄성이 터져 나왔다. 얼굴을 잔뜩 찡그린 몇몇 아이들을 보며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극단적 자유주의의 병패가 드러나는구나! 대중의 욕망은 한정된 자원 안에서 충돌하기 마련이다. 씩씩대는 아이들은 저마다의 불만을 토로했고, 결국 행해진 재투표에선 뽑기를 통한 자리 배치가 압도적 결과를 이루어 냈다. 그러면 원하는 자리에 앉지 못할 수도 있다는 몇몇 푸념은, 그건 다들 마찬가지라는 평등의 벽 앞에 속절없이 튕겨나갔다.
뽑기 쪽지를 만들며, 예상했던 방향으로 결과를 돌리는 데 성공한 나의 머릿속은 다소 복잡했다. 다수의 행복을 전제로 하는 공리주의는 도덕성과 결부된 이성에 의해 명분을 잃어버린 채 무너졌다. 뽑기를 통해 자리를 배정받은 아이들 중 상당수는 원했던 자리에 앉지 못할 것이다. 평등을 이유로 우연에 의탁한 방식은, 결국 사회의 작동 방향이 구성원의 행복의 증진이 아닌, 갈등의 소거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누구도 불만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모두가 행복의 직접적인 가능성을 포기하는 것. 지극히 마땅한 이 방식은,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가 사실은 모순을 전제하지 않을까 하는 다소 아나키즘적인 생각도 들게끔 했다.
긴장된 분위기 속 뽑기가 이루어졌고, 그렇게 영광스러운 3학년의 첫 자리 배치는 우연의 철저한 지배 속에 이루어졌다. 저마다 숫자를 확인한 아이들의 탄성이 이어졌고, 울림이 사그라들기도 전에 책상과 바닥의 마찰음이 교실을 가득 메웠다. 자리 배치 후, 낯선 주변 환경 속에 아쉬움과 설렘이 동시에 부유했다. 의외였던 점은, 아이들의 표정에 전과 같은 불만은 없다는 점이었다. 원하는 자리에 앉지 못한 아이들은 헛웃음을 지으며 다음에 잘 뽑을 거라고 전의를 다질 뿐이었다. 그 어디에도 억울함과 분노는 자리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보낸 후, 텅 빈 교실을 보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21세기의 교육은 아이들의 능동성과 주체성에 초점을 맞춘다. 스스로의 삶을 만들어 가는 인간. 그러나, 개인이 뿌리내리고 있는 사회의 구조는 상생이라는 이름으로 주체성의 근원인 욕망을 철저히 억제한다. 자유가 제한된 개인 앞에 우연의 법칙이 자리한다. 자유의 박탈은 역설적으로 책임의 부재를 낳는다. 나의 욕망을 침해하는 것은, 실재하는 타인이 아닌 비가시적인 공동체의 작동 원리인 것이다. 언뜻 부조리해 보이는 이러한 사회의 순환은, 되려 마음속에 자리한 억울함을 해소하며 불행을 소거한다. 원하는 자리에 앉지 못하더라도, 이를 납득한 아이들은 불행을 느끼지 않는다.(다소간의 아쉬움은 이해됨으로써 거대한 불행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는 이상적 삶을 욕구의 충족보다 정신적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는 상태에 이르는 것으로 정의한 에피쿠로스의 철학과 맥이 닿는다. 그렇다면, 교육의 목적인 행복의 추구는, 삶을 움직이는 우연과 부조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 속에 있지 않을까. 웃으며 자리를 옮기는 아이들은 불만 섞인 불편함이 깃들었던 처음과는 확연히 달랐다.
개인을 이루는 사회는 거대한 우연의 알고리즘으로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시시각각 나를 향해 달려드는 삶의 순간들은, 애써 통제하고 제어하려 해봐도 손아귀에서 속절없이 빠져나갈 뿐이다. 일회적인 삶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결국 행복이라면, 다가오는 우연에 선택을 어느 정도 맡긴 채 납득하며 살아가는 게 최선일 지도 모른다. 같은 자리에 또 앉게 되었다며 배시시 웃는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어찌 됐든 오늘도 마무리되었고, 하루의 고단함을 훌훌 털어낸 아이들은 낭랑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며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디저트류의 음식을 좋아한다. 잘 요리된 스테이크나 정식 등의 메인 요리는 먹기 전 어느 정도 몸과 마음의 준비를 마쳐야 한다. 배는 적당히 고파야 하고, 입에 다른 음식의 잔향이 남아 있지 않도록 해야 하며 온전히 맛을 느낄 수 있는 시공간적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그에 반해, 디저트를 대할 때는 이런 제약으로부터 다소 자유롭다. 적은 양으로도 아쉽지 않으며, 당도와 산미 등 응축된 미감은 간단한 입가심을 하기에 제격이다. 가볍게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디저트는 상당히 매력적인 음식이다.(물론, 가격이 메인 요리를 상회하는 경우도 있지만, 자본의 투입을 만족감의 산출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나름 합리적일지도 모르겠다.)
군에 복무할 때엔 생활관 관물대에 과자와 초콜릿, 커피 등을 상시 구비해 두기도 했으며, 제대 후 학교에선 교실 한켠에는 티백과 간단한 캔디를 놓아두었다. 퇴근 후, 주말에는 연례 행사처럼 카페에 들러 커피와 가벼운 쿠키를 시키며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무라카미 하루키)에서 주인공이 퇴근길에 매번 머핀과 커피를 주문하듯, 내게 있어 디저트는 지난한 일련의 하루 속에 위치한 쉼표와도 같다.
안규철 작가의 에세이 <사물의 뒷모습>은, 내게 있어 이러한 디저트와도 같은 책이다. 군 시절, 부대 내 도서관인 진중문고 한켠에 꽂혀 있던 이 책은 적당히 작고 알맞은 두께로 이루어져 있었다. 책은 미술가인 저자의 사유와 통찰을 단순한 그림과 함께 펼쳐 보인다. 소설이나 철학서처럼 큰 집중력을 요하지 않는 이 책은, 그러나 읽다 보면 어느새 몰입하여 다른 시공간에 나를 데려다 놓았다. 짧은 문장들로 이루어진 단락에서 빠져나오면, 주변의 사물과 세상을 보는 시선이 미묘하게 달라져 있음을 지각했다. 디저트처럼 응축된 맛은 짧은 시간의 투입에도 불구하고 오래도록 잔향과 더불어 만족감을 남겼다. 이 책을 나는 군 시절 틈틈이 읽고 또 읽었다. 일과 중 휴식 시간, TV로 아이돌 뮤비가 흘러나오는 점심시간과 새벽 근무 대기 시간 등 짧은 유휴 시간이 주어질 때면 나는 자연스레 이 책을 찾게 되었다. 치열한 하루 속에서 이 책은 잠시 숨 쉴 구석을 마련해 주었으며, 특유의 달콤함을 머릿속에 은은하게 채우게끔 하였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주말의 아침, 몽롱한 머리를 깨우기 위해 나는 가벼운 디저트를 찾는다. 드립백 커피와 소분한 마늘빵을 접시에 덜고, 쳇 베이커의 앨범을 턴테이블에 올린다. 서재에서 책의 겉표지를 훑다가, 자연스레 안규철의 에세이로 손이 향한다. 시간과 장소는 달라졌지만, 안규철의 책은 여전히 내게 기대했던 가벼운 만족감을 남긴다.
2021년 11월 경, 당시 기승을 부리던 코로나는 비교적 안전지대였던 여수에도 한차례 돌풍을 일으켜, 인구 20만의 작은 도시에서 하루 100명 가까이 확진자가 발생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시내 전 학교는 비대면 수업으로 전환하였으며 시끌벅적하던 학교엔 한순간에 고요함만이 감돌았다.
교사는 출근을 해야 했기에 오전에 비대면 수업을 진행한 후, 나는 텅 빈 교정을 거닐었다. 완연한 가을 햇살이 주황빛 단풍과 어우러진 채 이곳저곳에 내려앉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공간과,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자연스레 흐르는 시간의 이질성은 언뜻 비현실적인 환상감을 자아냈다. 당연하다 여겼던 풍경과 소음, 존재의 자연스러움이, 실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위태로운 기반 위에 자리하고 있었구나. 주변 환경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 자리에서 바람이 일고 초목이 흔들리며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여전한 세상 위에 인간이라는 사회적 동물은 자취를 감췄으며, 그 중심에는 바이러스라는 비가시적인 존재가 자리했다. 어쩌면, 코로나와 그로 인한 사회의 모습은 세상의 작동 방식과 닮아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비정형의 부조리와 그로 인해 드러나는 인간의 나약성. 지배종의 자신감과 확신은 나부끼는 바람처럼 위태롭고 공허하게 흔들렸다.
약 일주일 간의 비대면 수업 끝에, 시는 집중 격리를 해제했고 학교엔 다시 아이들이 찾아들었다. 왁자지껄하며 뛰노는 아이들을 에워싼 세상은 전과 다름없었다. 가을 하늘은 여전히 푸르렀고, 단풍은 사각사각 소리 내며 바람 따라 춤을 췄다. 카뮈의 <페스트>에서 평화가 깃든 오랑 시를 바라보는 리외 박사처럼, 불안한 안온함 속에서도 하루가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갑갑한 마스크도 서서히 익숙해져 가던 날들. 답답한 일상 속에서도 내일이 올 것이라는 희망의 존재 또한 어렴풋이 엿볼 수 있었던 계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