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구 안산 (24. 4. 7.)
주말이면 가끔 '서울특별시 공공서비스예약' 사이트에 들어가 본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제공하는 전시해설 또는 공원이나 숲 체험을 찾아보기 위해서다. 보통 무료이거나 유료여도 가격이 매우 저렴한 경우가 많다. 가성비 좋은 프로그램을 검색하기 위해 때로는 손품을 팔아야 한다.
지난달에 예약한 '[산림 치유] - 더 사랑 숲'이라는 프로그램에 참석하기 위해 서대문구에 위치한 안산(무악산)으로 향했다. 산세가 험하지 않아 아이들과 오르기 좋아서 가끔 찾아왔지만 오늘은 특별히 숲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인데, 그동안 눈을 감고 그저 산을 밟기만 한 셈이다.
산림 치유라는 것은 말 그대로 산길을 걸으며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다. 정상에 오르는 것, 식물의 이름을 정확히 학습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저 숲 선생님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숲과 호흡하고 가만히 앉아 자연의 소리를 듣는 프로그램이다. 숲 속의 식물을 배우는 건 덤이다.
안산 벚꽃 축제 기간이라 만개한 꽃만큼이나 많은 인파가 모여있었다. 안산공원관리사무소 앞에서 숲 선생님이 우리 가족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다른 가족도 예약을 했는데, 깜빡 잊어버렸대요. 오늘은 우리끼리 가야겠네요."
선생님의 발걸음을 따라가며 우리는 그야말로 숲 과외를 받기 시작했다. 단출한 인원이라 선생님 말소리가 잘 전달되었다. 운이 좋은 날이다.
"친구들, 벚꽃 나무 많이 봤죠? 도심에서 볼 수 있는 건 대부분 왕벚꽃나무예요. 자, 꽃 속에 수술이 얼마나 숨어있는지 루페로 한번 들어다 볼까요?"
선생님이 준비해 온 루페를 이용해 벚꽃의 수술을 세봤다. 아이들은 10배나 확대되어 보이는 루페로 식물을 관찰하는 놀이에 금세 빠져들었다. 화살나무 기둥에 대보았다가, 떨어진 낙엽도 한번 들여다본다.
"벚꽃은 꽃잎이 5장이에요. 꽃잎이 5장인 것들은 장미과 식물에 속하지요. 여기 보이는 목련도 지나다니며 많이 봤죠? 왜 목련이란 이름이 생겼는 줄 알아요?"
선생님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다 대답이 없자 이내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알 리 없었다.
"나무에 피는 연꽃이라는 뜻이에요. 꽃잎이 붓처럼 생겨서 목필화라고 말하기도 해요. 목련은 임금님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고 피기 때문에 북향화라는 이름도 있답니다. 별명이 많은 친구예요. 여기 황매화가 있네요. 잎이 5장인 꽃은 무슨 과에 속한다고 했죠?"
"장미과요!"
아이들의 목소리가 우렁차다. 선생님 입에서 꽃 이야기가 우수수 떨어졌다. 모조리 주워 담고 싶어 적기 시작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체험은 '가족 나무 만들기'였다. 나무를 만들기 위해 길에 떨어진 낙엽, 나뭇가지, 꽃잎들을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소풍날 보물 찾기를 하듯, 연신 '좋은 거 찾았다.'를 외쳤다. 아이들이 주운 나무의 조각들을 주머니에 담아 한적한 산 중턱에 모여 앉았다.
"선생님이 도화지로 쓸 하얀 천을 준비했어요. 그 위에 친구들이 마음껏 멋진 나무를 표현해 보는 거예요. 나뭇잎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적어도 좋아요."
이보다 특별한 미술 놀이가 있을까? 아이들은 자연의 재료들로 멋지게 도화지를 꾸미기 시작했다. 굵직한 가지로 기둥을 세우고 양옆으로 나뭇가지를 쳤다. 가지 끝에 잣나무 잎, 진달래 꽃, 바싹 말라버린 활엽수 등을 붙여놓았다.
"막내가 가족 나무를 소개해 볼 수 있을까요?"
"저희 가족은 신 씨라 신나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식구는 각자 개성이 있기 때문에 다양한 잎을 통해 가족 나무를 만들어 봤어요."
선생님은 신나무가 진짜로 있는 나무라며 휴대폰에서 이미지를 찾아주셨다. 간단하게 이름 붙인 나무가 실존하는 식물이라니. 작품을 다시 자연에 돌려보내기 전, 선생님은 정현종 님의 시 <비스듬히>를 낭송했다.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 를 받치고 있는 이여.
끝없는 계단이 펼쳐지면 계단을 세며 명상을 해보자고 하셨고, 오르는 길목마다 생소한 식물의 이름을 알려주시기도 했다. 산길을 누비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었다. 걷다 보니 어느새 파란 하늘을 날카롭게 찌르고 있는 커다란 나무들이 주위를 감쌌다. 메타세쿼이아, 나도 아는 나무였다. 선생님 가방에서 피톤치드 오일이 나왔다. 체험에 필요한 모든 준비물이 때가 되면 눈앞에 나타나는 요술 가방 같았다.
"메타세쿼이아는 천적을 방어하기 위해 냄새를 뿌려요. 자신을 살리기 위한 방향제인 셈이죠. 피톤은 식물, 치드는 살균이란 의미가 있어요. 오일을 손등에 바르고 냄새 한 번 맡아볼래요?"
"냄새 좋다. 엄마 우리도 이거 사요."
뭐든 사자고 한다. 그렇다고 척척 사주지 않는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나무 이야기를 들으며 안산의 가슴 정도 되는 높이까지 올라갔다. 등산객의 발길이 드문 아지트에 도착했다. 나무 푯말엔 '숲 속에서의 낮잠'이라고 적혀있었다. 자연이 만든 쉼터에는 해먹이 몇 개 걸려있었다.
아이들은 한 마리의 번데기처럼 해먹 사이로 들어가 숨어버렸다.
"차 한잔 하면서 싱잉볼 연주 해볼게요."
프로그램의 막바지였다. 선생님이 따라주신 연초록색 캐모마일 차를 마시며 한 사람씩 싱잉볼 연주를 시작했다. 연주하는 사람에 따라 소리의 울림이나 크기가 달랐다. 청아한 울림이 고요한 숲 속에 퍼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이제까지 경험한 숲 체험 중 제일이라고 했다. 엄마인 나도 마찬가지였다. 노란 꽃, 키가 큰 나무 등 그냥 꽃과 그냥 나무를 무심히 지나치며 살았다. 몇몇 식물의 이름과 특징을 알 게 되니 새로운 친구를 사귄 듯 가슴속이 일렁였다.
벚꽃 말은 아름다운 정신, 정신적 사랑 또는 삶의 아름다움이라고 한다. 내 삶에 벚꽃처럼 은은한 아름다움이 숨어 있다면 매일 비슷한 일상조차도 의미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