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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민정 Jun 20. 2024

결핍이라는 행운

모자라서 오히려 잘됐습니다.

체력이 좋지 않은 편이다.     


학창 시절 제일 싫어하는 과목은 체육이었다. 특히 공을 다루는 모든 종목은 공포였다. 축구할 때면 겁에 질려 날아다니는 공을 피해 다니기 바빴다. 반면 피구공은 달아나는 나를 붙잡기라도 하듯 몸에 착착 잘도 붙었다.

나는 남들보다 몸을 잘 쓰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걸 일찌감치 깨달았다.  

   

내가 근력이 없고 대단한 운동치라는 사실은 체력장 당일, 여실히 증명되었다.  

    

“에계 민정아, 이게 다야?”     


멀리 뛰기, 오래 매달리기, 포환 던지기, 윗몸일으키기. 뭐 하나 빠지지 않고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최선을 다해도 다른 친구들의 반의반도 해내지 못하는 저질 체력.


몸이 자랐다고 체력이 좋아지는 건 아니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몸으로 놀아주는 시간이 길지 않았고, 지금도 집안일은 크게 구멍 나지 않을 정도로 근근이 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런 약점을 알기 때문에 남들보다 내 몸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다. 

요새 어디가 아픈지, 오늘 하루 쓸 수 있는 기력이 얼마나 남았는지 살뜰히 살피며 살고 있다.      


“여보, 요새 오른쪽 어깨가 좀 아파. 당분간 저녁 설거지는 자기가 해야겠어.”     


남편을 집안일에 동참시키려는 수작이 아니다. 어깨를 더 썼다가는 금방이라도 병원 신세를 져야 할 게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내가 에너지 넘치는 사람이 아니다 보니 오히려 몸이 말하는 작은 소리에도 귀 기울이게 되었다.

유독 약한 체력이라 몸에 대한 애착이 충분하다고 할까.      


누구의 도움 없이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우리 부부가 결혼을 준비한 13년 전에는 양가 모두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다. 물론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전세금은 몇 푼 안 되는 저축과 대출금으로 마련했고, 예식에 드는 비용 일체도 우리 부부가 자력으로 준비했다.      


불행한 생각은 늘 남들과의 비교에서 찾아오던가. 예비 시댁에서 살 집을 마련해 주셨다는 동기, 신랑이 벌어놓은 돈으로 혼수를 마련했다는 친구의 소식은 가끔 행복한 일상에 돌을 던졌다.   

   

하지만 10년 넘게 결혼 생활을 해보니 부모에게 손을 벌리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스스로 일군 가정에 그 누구도 간섭하지 않기에 감사하기까지 하다.     


“그래, 잘했다.”    

 

무엇이든 양가의 지지와 응원을 받고 있으니, 무거운 책임감 뒤에 맛보는 짜릿한 자유랄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대도, 부모의 도움과 자유로운 결혼 생활을 맞바꿀 생각은 전혀 없다.  

    

아빠가 없어서 기회가 생겼다.     


졸업을 목전에 둔 오빠는 컴퓨터 앞에서 입사 지원서를 쓰는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내가 쓴 자기소개서 한번 봐봐.”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고 도시로 전학을 왔습니다. 도시로 오게 된 건 어쩌면 아빠가 주고 간 잔인한 선물인 것 같습니다. 

 

라는 문장이 있었다. 선물이란 모름지기 받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물건인데, 잔인함과 선물은 너무 역설적인 조합이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더 이상 아빠가 없는 시골에 우리가 살 이유는 없었다. 우리가 사는 동네 이름이 00리에서 00동으로 바뀌면서 우리의 삶에도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엄마가 찾을 수 있는 일자리는 많아졌고,

오빠는 전보다 훨씬 우월한 경쟁자들을 만났으며,

나는 다양한 인간관계를 경험했다.    

 

아빠가 없는 빈자리에는 낯설지만 다양한 기회들이 찾아왔다.      

아빠의 부재가 아니었으면,

겪지 못했을 일들, 배우지 못했을 것들, 만나기 어려웠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아빠의 잔인한 선물이었다.    

 

결핍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보석들이 있다.     


어차피 인생은

어둡고 칙칙한 현실에서 작은 진주를 찾아내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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