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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민정 Nov 02. 2024

가을 소풍

마침 날씨가 참 좋다.

시골 택배에는 가을이 잔뜩 담겨 있다.     


“민정아, 제일 예쁜 사과 한 개, 배 한 개는 먹지 말고 두어라.”     


시골 노지 과수에 열린 열매는 내 기준에 예쁜 게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가장 반지레한 놈을 골라 비닐봉지에 넣어 냉장고 구석에 잘 모셔두었다. 엄마가 먹지 말라고 한 이유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일에 쓰일 귀한 것들이라는 것을.     


휴가를 낸 평일 새벽, 엄마를 뒷좌석에 태운 낡은 자동차가 새벽공기를 가르며 내달렸다.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무촌리 어느 야산.

아빠가 30년째 잠들어 있는 곳이다.   

   

농기계가 다니는 좁은 흙길에 차를 세우고 산에 올랐다. 산소에 가는 길은 3분쯤 걸리려나. 그 짧은 시간에 아빠의 모습을 담은 장면이 시나브로 뚜렷해지고, 잊고 있던 아빠 냄새가 코끝에 머문 것만 같다. 


마당에서 쪽파를 다듬고 있던 나를 번쩍 품에 안아 입에 곶감을 넣어주던 아빠의 손 냄새, 경운기 뒤에 동네 아이들을 태워 시골길 드라이브를 시켜주던 아빠의 소탈한 웃음. 아빠가 그려진 추억 퍼즐을 맞추며 걷다 보면 어느새 진짜 아빠를 만나게 된다.      


오랜만에 찾아왔다. 비행기를 타야 할 장거리도 아니고, 매일 숨 가쁜 하루를 사는 것도 아니면서 왜 자주 찾지 못하는 걸까, 매년 같은 후회를 반복한다. 30년이란 세월은 아빠를 잃은 슬픔도 희미하게, 제사상도 단출하게 만들어 버렸다. 제철 과일 몇 가지, 술과 황태포가 전부인 가벼운 상을 아빠 머리맡에 두었다. 두 손을 포개 두 번 절하고, 반절 한 번. 차가운 돗자리에 무릎을 닿고 아빠에게 말을 건넨다.     


‘아빠, 오랜만에 와서 미안. 잘 계셨죠? 아빠가 머문 자리엔 봄부터 겨울까지 계절을 느끼기에 너무 좋다. 오늘은 가을빛이 완연하네.’    

 

멈춰버린 아빠의 나이보다 어느새 내 나이가 더 많아졌다. 이젠 아빠가 없는 가엾은 꼬마가 아니라, 좀 일찍 아빠를 여읜 평범한 아줌마가 되었다. 지난 시간이 지워버린 아빠의 기억이 이젠 그리 슬프지 않은 덤덤한 나이. 미소 지으며 남은 소주를 부어드렸다.   

  

30년이란 시간이 내게 준 선물은

아빠의 기일이 더 이상 눈물겨운 제삿날이 아닌 경쾌한 가을 소풍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행이다. 아빠가 소풍 가기 딱 좋은 날씨에 우리 곁을 떠나서.

다행이다. 아빠가 잠든 곳이 마침 경치 좋은 시골 산이라서.

천만다행이다. 아빠를 이렇게 글로 남길 수 있는 공간이 있어서.     



**그동안 조악한 글을 읽어주신 소수의 소중한 독자님들 정말 감사드립니다. 조만간(?) 새로운 글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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