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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민정 Sep 12. 2024

아빠의 계절

더 이상 쓸쓸한 계절이 되지 않길


처서가 지나고 새벽녘에는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지금은 조금 덜 해졌지만, 한동안은 갑자기 서늘해진 날씨에 기분이 괜히 가라앉기도 했고 지금은 가을 타는 중이라며 여기저기 묻지도 않은 변명을 하며 다니던 때도 있었다. 그런 쓸쓸한 가을이 왔다.     


올해도 어김없이 따사로운 봄볕을 받고, 여름의 뜨거운 더위를 한껏 머금은 곡식을 거두는 계절이 왔다. 이 계절이 왔음을 알리듯 우리 집 앞에 커다란 택배 상자가 2개나 배달되었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보내는 상자처럼 깨끗하고 빳빳한 재질은 아니다. 마트에서 넣어 보내는 드라이아이스처럼 식품의 신선도를 유지할 만한 것도 들어 있지 않다. ‘문경 사과’라고 적힌 너절한 상자를 박스테이프로 여러 번 감고, 다 먹은 생수병에 수돗물을 채워 넣어 얼린 허술한 아이스박스가 문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혼자 집안으로 옮기기에 꽤 무거운 무게다.  


“엄마, 뭘 이렇게 또 많이 보냈어.”

“우리 애기들 먹으라고 보냈지. 아주 쪼금 보냈는데?”

“이게 쪼금이야? 이걸 다 어떻게 먹으라고.”

“이웃들하고 나눠 먹으면 되지.”

“내가 서울에 이웃이 어딨 다고.”     


비슷한 내용의 대화가 족히 스무 번은 오갔을 것이다. 시골에서 재는 무게와 부피의 단위는 서울과 다른 걸까. 정말 조금씩만 보냈다는 채소와 곡식은 이미 상자의 크기를 넘어 황토색 박스테이프로 간신히 지탱하고 있었다.     


참기름은 나물 무칠 때마다 듬뿍 넣어야지.

고구마는 금방 상하니까 썩기 전에 자주 쪄먹어야겠다.

단호박은 다듬어서 냉동실에 넣었다가 카레나 된장찌개에 넣으면 되겠지?     


까만 봉지를 하나씩 열며 어떻게 먹고, 보관할지 머리를 굴렸다. 봄볕 아래 씨앗을 심고, 뙤약볕 아래 잡초를 뽑았으며, 좁은 마당에서 쭈그리고 앉아 채소를 다듬었을 엄마의 얼굴이 떠오른다. 흙냄새 풍기는 촌스러운 시골 할머니가 다 된 엄마의 땀을 빼곡히 담은 것들을 만지면서.     


이번 택배에서 가장 큰 부피를 차지한 녀석은 생땅콩이었다. 그것도 무려 3 봉지나 됐다. 

우둘투둘 겉껍질째 상경한 생땅콩은 자연스레 아빠를 생각나게 한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TV 앞에 놓인 작은 상 위에 삶은 땅콩이 가득 담긴 소쿠리가 놓였다.   

  

“민정아, 이것 좀 까먹어봐.”

“싫어, 맛이 없어.”

“삶은 땅콩이 얼마나 맛있는데, 에이 바보.”     


아빠는 TV를 보며 삶은 땅콩을 오독오독 씹어먹었다. 아빠는 초가을에만 먹을 수 있는 아주 귀한 간식이라며 여러 번 권했지만 난 먹지 않았다. 달콤한 땅콩 크림이 묻은 과자나 땅콩에 설탕물을 입힌 꿀땅콩 같은 게 더 맛있었다.     




나이가 들어서일까, 아니면 아빠의 유전자를 꼬박 닮은 걸까. 서른이 좀 넘어서는 나도 땅콩을 껍질째 삶아 먹기 시작했다. 엄마가 시골서 보내준 생땅콩을 더 이상 타박하지 않는다. 깨끗하게 씻어 냄비에 한참을 끓여 낸 땅콩이 대체 어떤 맛이냐 하면, 볶은 땅콩처럼 느끼하지 않고, 꿀땅콩처럼 금세 질리지 않는 적당히 고소한 맛. 앉은자리에서 한 접시를 까먹어도 속이 부대끼지 않는 맛.     


우리 가족은 땅콩을 즐기는 방법에서 딱 절반으로 나뉜다. 볶은 땅콩파와 삶은 땅콩파. 다행히 둘씩 갈려 나는 그리 외롭지 않게 삶은 땅콩을 즐길 수 있다.     

올해도 서늘한 가을바람과 높은 하늘은 아빠를 기억나게 한다.     


이른 가을엔 아빠의 생신이 있고,

늦가을엔 아빠의 기일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은 아빠가 좋아하는 삶은 땅콩을 오독오독 씹고 있기 때문이다.     


아빠의 기호를 몇 가지 알고 있다는 건 살면서 아빠를 추억할 기회가 더 많다는 걸 의미한다. 아침에 졸린 눈을 비비며 커피와 삶은 땅콩을 씹으며 오랜만에 아빠의 이름을 떠올려본다.     


최. 종.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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