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친다 진짜
국내 매장엔 마땅한 모델이 없어서, 결혼 전 가족끼리 LA 여행을 갔을 때, 베버리힐즈의 매장에서 직접 사 왔던 롤렉스.
힙합을 사랑하던 그는
래퍼들이 '롤리'라고 부르는 그놈의 롤렉스를 너무 좋아했었다.
자기도 '롤리'가 생겼다며 중요한 날이면 늘 그 시계를 차고 다녔다.
아마 그의 '롤리'가 그가 부자 행세를 하는데에 큰 도움을 줬을 거다.
이혼을 하기로 결정한 후, 이혼 접수를 하러 가기 전.
난 그에게 서로 줬었던 예물을 돌려주자고 했다.
내가 다이아 반지를 돌려줄 테니 롤렉스를 돌려달라고.
그는 다이아는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서 롤렉스는 돌려주겠다 약속했다.
"그러면 시계 갖고 올 때 마트 문화센터에서 아기 사진첩 좀 찾아와. 내 스마트워치 충전기도 좀 갖다 줘. 아마 침대 옆 바닥에 떨어져 있을 거야."
갑작스럽게 시작된 별거였기 때문에 자잘하게 챙겨 와야 할 게 많았다.
그는 여전히 원래 우리가 살던 집에서 지내고 있었으니까 그에게 몇 가지 물건을 함께 부탁했다.
그리고 약속한 날, 그는 내가 부탁한 모든 물건을 가져다줬다.
롤렉스 시계만 빼고. ㅋㅋㅋ
난 그가 시계를 빼고 가져다줬다는 걸 이틀이 지나서 알아차렸다.
(우울증으로 인한 건망증이 그때까지도 매우 심한 상태였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건 나의 심각한 건망증을 악용하는 전형적인 그의 수법이었다.
생각해 보면 결혼생활 중에도 이런 적이 몇 번 있었다.
의도적으로 교묘하게 나의 심각한 건망증을 이용해서,
내가 까먹길 바라면서 본인이 하기 싫은 일을 계속 미루는 것.
내가 너무 건망증이 심하다 보니, 그도 나처럼 종종 까먹는구나 하고 지나갔던 사소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에게 다시 메신저를 보냈다.
-야 장난하냐? 너 시계만 쏙 빼고 안 가져왔더라. 시계 가져와.
나의 추궁에 그는 예상한 그대로의 답변을 내놓았다.
바로, '본인도 정신없어서 까먹었다'는 논리.
진짜 웃기지도 않았다. 너무 화가 났다. 그에게 미친 듯이 메신저를 보냈다.
내가 까먹기를 기대하며 어영부영 넘어갈 줄 알았다면 웃기지 말라고,
나 이거 받을 때까지 절대 포기 안 한다고.
그 시계 받아서 팔아서 너 때문에 생긴 내 빚부터 갚을 거라고.
네가 생활비 저번달부터 안 줘서 당장 이번달 카드 리볼빙하게 생겼다고.
그러자 답변이 왔다.
시계는 조금만 더 가지고 있을게. 우리 결혼했다는 증표고, 이 안에 자기, 장모님, 아버님 추억, 사랑 다 들어있어서 지금도 이걸 보면 가슴이 너무 아파서... 도저히 못주고 못 팔겠어... 미안해
ㅋㅋㅋ
그는 본인이 감옥 갈지도 모르는 위기에도 여전히 '롤리'만은 포기할 수 없었나 보다.
시계는 결국 돌려받았다.
그리고 팔아버렸다.
다이아반지도 받지 않겠다고 고집부리길래, 그의 어머님께 돌려드렸다.
그렇게 나는 모든 결혼의 징표를 깔끔하게 정리했다.
감정도 물건처럼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하고 싶었던 말들을 거의 다 해갑니다.
아마 곧 완결이 날 것 같네요.
글을 쓰는 내내 지난 상처를 헤집으며 더 아파지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고름은 짜내는 것부터 치료를 시작하는 게 맞으니까요.
글 쓰는 동안의 아픔은 고름을 짜내는 과정에서 느끼는 통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좀 후련하기도 하니까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