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나는, 감정을 숨기려고 무척 애를 썼다. 기뻐도 크게 웃지 않고 슬퍼도 울지 않고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으려는 일명 '포커페이스'를 언제나 유지하려 노력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성인 전까지 그랬던 것 같다.
왜 그랬냐 하면... 큰 이유는 없었다. 주변에서 어른스럽다는 말을 자주 해줬고 언제나 침착하고 안정적인 모습이 좋아보인다는 말 때문이었을까. 사실은 그게 아닌데. 어른스럽지도 않고 안정적이지도 않았다. 그저 남들보다 감정을 느끼는 게 무뎠고 표현하는 것에 서툴었다.
표정을 하나씩 짓기 시작한 건 20살 이후 연애하면서부터이다. 그녀는 나와 정반대인 사람으로 표정이 매우 많고 자신을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는,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끌렸고, 긴 시간을 함께했다. 그녀를 닮아가다보니 감정을 숨기지 않는 법, 감정을 표현하는 법에 대해 많이 배웠다.
하지만 감정을 이해하는 것은 많이 어려웠다. 남들이 슬프다고 하는 것에 슬퍼하지 못했으며 재미를 느끼는 것에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이해하지 않으려고 했다. 감정은 없어도 괜찮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긴 연애와 짧은 연애가 모두 끝나 비로소 혼자가 된 작년. 내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난 이제 혼자가 되어 홀가분한 건가? 슬픈 건가? 잘 모르겠는데. 연애를 하지 않았을 때는 어떤 느낌이었지? 혼자인 적이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제야 혼자 많은 것을 경험해보기로 한다. 많은 영화를 봤고 많은 전시를 보러 다녔다. 그 어느 때보다 일에 집중했고 술자리도 많이 다녔다. 너무 바쁘게 살았던 것일까? 슬슬 벅차기 시작한다.
이번 2024년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온전히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내가 즐거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비로소 오늘, 드디어 감정에 한 발짝 들어섰다. 영화를 보는데 영화 속의 모든 감정이 내 몸속으로 들어온다. 그들의 이야기를 온 몸으로 느꼈다.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일. 영화를 보는 내내 수십 가지의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아무런 표정도 짓지 못하던 내가 이렇게 다채로운 표정을 지을 수 있었구나. 진심으로 흐느끼며 울 수 있었구나. 드디어 실마리를 찾은 것 같다. 이게 진짜 감정이라는 거구나.
목표는 이번 년도 안에 최대한 많은 것을 경험하고 최대한 많은 감정을 이해하는 것. 9개월이 지나고 있는 지금, 벌써 많은 것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