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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크 Apr 29. 2024

왕가위 (2)

17. 동사서독

연출을 하는 많은 방법 중에 현장의 즉흥성에 의존하는 것이 있다. 찍는 당시에 발생하는 우연이 겹쳐 화면 위에 필연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독립영화가 아닌 상업영화 제작 시스템이 반기는 방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커져버린 제작비에 이런 현장의 즉흥성에 의존하다가는 언제 영화가 만들어질지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짓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해내던 이가 바로 왕가위 감독이다.


당시에 홍콩 영화에는 등광영이라는 흑사회 출신의 제작자겸 배우가 있었다. 많은 홍콩 느와르를 제작하거나 주연하며 그중에 하나가 흥행을 하면 돈을 벌던 사람이었는데, 그는 < 열혈남아 > 제작으로 흥행을 하게 되자 왕가위 감독으로 하여금 장국영, 유덕화, 양조위, 장학우, 장만옥 등 당대 스타들을 모아두고 비슷한 영화 하나를 만들어 달라고 전 제작과정을 통째로 맡겼다. 그런데 왕가위 감독은 < 열혈남아 > 때부터 자신의 연출에 간섭했던 등광영이 싫었고, 이번에는 홍콩 느와르가 아닌 자신이 원했던 멜로를 찍기 시작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 아비정전 >이다. 이 < 아비정전 >은 엄청난 제작비가 들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왕가위가 소위 말하는 쪽대본을 날리기 시작한 것이 이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당대 최고 배우들은 다 불러놓고는 대본이 없어서 현장에서 놀리고 있으니 제작비가 계속 치솟는 게 당연했다.

결국 < 아비정전 >은 흥행에서 참패를 기록했고, 등광영은 엄청난 빚을 지게 된다. 그러자 홍콩 영화계에서는 등광영이 흑사회를 등에 업고 왕가위를 없애버릴 거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까지 한다. 물론 < 아비정전 >이 각종 영화제 상들을 휩쓸면서 잔잔해졌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런 제작과정으로 인해 왕가위는 이후에 < 동사서독 >을 위한 제작사를 찾기 힘들어진다. 그래서 절친인 유진위와 더불어 제작사를 차리고는 < 동사서독 >의 제작에 들어간다. 하지만 이 영화는 촬영만 1992년에 시작해 1994년에 끝나는 지옥 같은 스케쥴에 시달려야 했다.


왕가위 감독은 언제나 그랬듯 < 동사서독 > 촬영 당시에도 장국영, 장학우, 양조위, 양가휘, 왕조현, 장만옥, 임청하, 유가령, 양채니 등 당시 가장 잘 나가는 유명 홍콩 배우들은 모두 불러놓고는 세월아 네월아 한다. 그것도 중국의 사막에서 말이다. 절친인 유진위가 이를 감당하지 못해 이 배우들을 다시 싹 담아서 설날용 영화이자 홍콩영화의 최대 막장 무협으로 불리는 < 동성서취 >를 만들어 일단 보장된 명절 흥행으로 제작비를 돌릴 정도였다.

하지만 영화의 완성은 험난하기만 했다. 홍콩에서 가장 바쁜 배우들을 모두 불러놓고 찍으면서 모자란 제작비와 어긋나는 배우들의 스케쥴로 인해 촬영 중단은 예사였고, 거의 완성 무렵에는 왕조현이 스캔들을 터트리면서 하차하게 되어 그 부분을 다시 촬영하니라 또다시 제작기간이 늘어지고 말았다.

물론 이 무렵에 홍콩으로 돌아온 왕가위는 < 중경삼림 >을 만들어 아시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스타일리시한 감독이 되었지만, 여전히 < 동사서독 >의 완성은 멀어 보였다.

그래서 이 < 동사서독 >은 왕가위 감독의 저주받은 영화로 알려졌었다. < 아비정전 > 부터 영화만 찍었다 하면 제작사 하나를 말아먹으니 말이다.


영화는 김용 소설인 < 사조영웅전 >의 프리퀄을 띄고 있다. 동사서독, 남제북개가 어떻게 젊은 시절을 보냈는지를 무협영화의 명작 중 하나인 < 용문객잔 >의 틀을 가져와 보여준다.

사실 말이 무협영화이지, 이 영화의 장르를 말하자면 정확하게는 멜로물이다.

 < 해피 투게더 > 와 더불어 20세기에 왕가위 감독이 내놓은 가장 훌륭한 멜로 작품이기도 하다.

저번에도 이야기했듯 왕가위 감독의 손에 닿으면 그 어떤 장르도 이별 멜로 장르가 된다. 그것이 왕가위 감독의 힘이다. 그게 < 동사서독 > 같은 무협영화든, < 열혈남아 > 같은 홍콩 느와르든, < 2046 > 같은 미스터리 환타지든, < 해피 투게더 > 같은 퀴어영화든, < 일대종사 > 같은 쿵후영화든 그에게 있어서는 모두 멜로일 뿐이다. 그것도 지독한 이별의 상처를 담보로 하는.


이 영화가 만들어지던 때만 해도 홍콩 영화는 그야말로 아시아를 휩쓸고 있던 시기였다. 제작자 서극은 정소동이라는 걸출한 무협액션 영화감독을 내세워 < 천녀유혼 >, < 동방불패 > 로 한국시장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의 홍콩 영화 흥행기록을 갈아치우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나온 새로운 무협영화들만 해도 < 신용문객잔 >, < 절대 쌍교 >, < 녹정기 > 등을 비롯해 정말 어마어마한 숫자들이었다. 물론 다 자기 복제를 넘지 못하고 금방 주저앉고 말았지만 말이다.

이런 특수효과 (특히 와이어)를 앞세운 무협영화들의 주인공이었던 임청하는 당연히 당대 최고의 주가를 자랑하던 여배우였고, 이런 톱배우들을 한 명도 아니고 열명을 데리고 땅이 갈라지거나 하늘을 나는 특수 효과 하나 없이 느릿하게 찍고 있었던 것이 < 동사서독 > 이다.

관객들은 특수효과 액션에 열광했는데, 왕가위 감독은 이런 트렌드들은 아예 무시하고 무협 영화를 전혀 다른 차원의 영화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영화는 위에서도 이야기했듯 제목만 무협 영화이지 내용은 남녀 간의 이별과 상처를 다루고 있다.

객잔에서 살수들에게 일을 주는 역할로 나오는 구양봉 (장국영)을 중심으로 그가 사랑했던 형수 (장만옥), 맹무살수 (양조위), 남개인 홍칠공 (장학우), 동사인 황약사 (양가휘), 모용 집안의 최고 검객인 남장여자 모영언 (임청하)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의 만남과 애증 관계에 의한 복수, 이별에 따른 상처 등을 지루할 정도의 독백과 아름답지만 느린 화법으로 풀어놓았다.


이 영화는 개봉당시에 큰 흥행을 일으키지 못한다. 특히 한국에서는 흥행에 참패했다.

한국 흥행 참패의 원인은 사실 영화 자체보다는 개봉 극장에서 나왔다. < 동사서독 >이 다른 영화들처럼 홍콩 무술 영화의 화려한 액션을 보여줄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런 영화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에 < 동방불패 >로 유명해진 임청하의 액션장면 위주로 재편집을 해서 상영을 했고, 결국 아무도 내용을 알지 못하는 영화가 되어버렸다. 왕가위는 이 버전을 진짜 싫어하는 것으로 알려져 아예 보지도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이 영화에 대한 호불호는 없었다. 오히려 기대했던 무협 영화에 미치지 못해 관객들에게는 난해한 영화로만 다가왔다. 뭔가 예술적으로는 보이는데, 내용은 모르겠고 그렇다고 화려한 특수 효과나 무협 액션은 안 보이는 짜증 나는 영화 중 하나 말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한국 개봉관 버전이 아닌 다른 버전으로 본 평론가들은 이 영화에 대해 열광했다.

획일적이고 자기 복제에 충실한 기존 무협물을 이렇게 아름다운 멜로장르로 승화시키는 것에 감탄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홍콩 무협 영화는 60년대의 장철과 호금전으로 대변된다. 그런 시기에 호금전은 홍콩 무협 영화를 예술의 경지로 올려놓은 감독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내가 봤을 때 < 동사서독 >은 분명 그런 호금전을 따라가는 영화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홍콩 무협 영화는 크게 두 가지 패턴으로 나뉘게 되는데 하나는 장철류의 비장미와 폭력미를 다루는 영화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호금전의 영상미와 동양 철학을 따르는 영화들이었다. 그리고 이후에 서극은 아예 SF 영화로 무협영화를 만들어 버린다.

< 동사서독 >이 김용의 소설을 따르면서도 형식면에서 호금전의 < 용문객잔 >을 따른 것은 절대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왕가위 감독은 이미 호금전 감독이 < 용문객잔 >에서 선보였던 우아한 구성과 아름다운 무협 액션을 따르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영화의 액션의 백미는 양조위가 시력을 잃어가며 죽을 때와 장학우가 마적 떼와 싸울 때이다.

왕가위 감독은 양조위의 장면에서는 누가 봐도 호금전의 액션을 따라가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많은 마적 떼들에 맞서 사막에서 아름다운 칼 춤을 추는 양조위의 모습은 호금전 감독이 좋아했던 대나무 숲에서의 아름다움을 떠올리게 만든다.

호금전이 죽림에 스며드는 빛을 이용해 아름다운 칼춤을 만들어 냈다면 왕가위는 이글거리는 더위와 노란색을 바탕으로 한 사막의 정서를 담아냈다. 이 둘의 공통점은 무협의 액션에 기반하는 장면이 아니라 로케이션이 가지는 그 강렬함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이고, 그래서 장면은 관객의 눈을 황홀하게 만든다.

다른 하나인 장학우의 전투씬은 무협 액션을 왕가위식으로 편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스텝프린팅을 과감하게 사용해 마치 무협 액션이 아니라 포커스가 고정되어 있는 장학우가 가지는 점프컷과 슬로우모션의 중간자적인 움직임, 빠르게 움직이며 잔상으로 남는 마적 떼들의 모습은 로케이션의 강렬함을 안고 말 그대로 관객들의 마음에도 잔상을 남긴다.


액션뿐만이 아니다. 왕가위 감독은 모든 장면에서 철저하게 빛과 반사빛을 이용해 촬영을 진행한다. 이런 식으로 빛을 보여줄 수 있는 감독은 세상에 많지 않다. 마치 옛날의 독일식 표현주의 기법처럼 그늘 하나 없는 사막에서 그는 물을 이용해 반사를 통한 영상을 만들어 내고, 객잔이라고 하기에는 쓰러질 것 같은 초가집에서 새장을 통해 빛을 조절해 인물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조용히 인물들의 지루한 독백들을 느린 빛의 조절을 통해 보여주는데 이 장면들이 하나같이 압권이고 아름답다. 그래서 인물들이 가진 그 지독한 이별들이 더욱 가슴에 와닿는다.


이 영화도 물론 다루는 주제는 홍콩 반환이다.

이 영화에서 캐릭터들은 단 한 명도 정상적인 사랑을 하지 않는다. 장만옥은 동생을 사랑했지만 형과 결혼해 죽으면서 후회하고, 그런 장만옥을 좋아한 양가휘는 장만옥이 사랑한 장국영과 그녀의 메신저 역할을 자청한다. 하지만 외로움을 참지 못하고 양조위의 아내 유가령과 바람을 피우다가 결국 양조위의 추적을 받게 된다. 임청하는 양가휘의 한마디 플러팅에 넘어가 자아가 분열되어 양가휘를 죽이는 자아와 양가휘를 사랑하는 자아로 갈리게 된다. 그나마 장학우는 자신의 정의에 대한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마적 떼에 뛰어드는 캐릭터로 나오지만 그는 손가락을 잘려 이후에 칼을 쥐기 힘들어진다.  

< 동사서독 > 에서 사랑은 지독히도 변형되어 있고, 이별은 참기 힘든 것이 아니라 다른 이별을 낳고 있다. 마치 홍콩 반환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를 상상하고 만든 듯한 느낌이 든다.

이별은 모든 캐릭터들에게 필수요소이다. 마치 모든 홍콩인들이 1997년 이전의 홍콩과 이별해야 되듯이. 하지만 이별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이별은 계속 또 다른 이별을 낳고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조차 그 이별의 홍수 속에서 불구가 될 수밖에 없다.  


이 영화를 볼 때 주의해야 할 것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영화는 절대 무협 영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모든 왕가위 감독들의 영화를 볼 때 주의해야 될 부분이다. 만약 그의 영화들을 제목만 보고 그런 장르라고 생각해서 보면 후회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는 무조건 이별의 지독한 아픔을 안고 있는 멜로라고 생각하고 봐야 한다.

그렇게 이 영화를 감상한다면 그때서야 모든 캐릭터와 스토리가 이해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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