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이크 Apr 26. 2024

왕가위 (1)

16. 중경삼림

홍콩이 낳은 세계적인 감독들은 많지 않았지만 그 몇 안 되는 감독들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특히 그중에 90년대를 관통했던 왕가위 감독은 화면의 스타일리시함에 있어서 단연코 세계적인 재능을 보여준 감독 중 하나였다.

단언하건대 지금 세계적인 선풍을 불러오고 있는 한류 드라마, 영화들도 많은 부분을 왕가위 감독에게 빚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영화를 보고 자란 세대들이 지금 영화를 만들고 있게 되면서 말이다.

이 멜로장르의 거장이 만든 영화들 중에 세 편을 고르는 일은 사실 매우 힘들다.

홍콩 느와르를 변주한 < 열혈남아 > 부터 예술가로서 그의 이름을 알리게 된 < 아비정전>, < 화양연화 >, < 2046 >, 쿵푸영화조차 가슴을 애잔하게 만드는 멜로로 승화시키는 < 일대종사 >까지 그의 작품 면면히 들어다 볼 가치가 있는 감독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내가 말하려고 했던 영화들은 20세기에 국한되어 있고, < 아비정전 >을 가장 먼저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21세기에 만들어진 < 화양연화 >< 2046 >도 이야기해야 되기에 < 아비정전 >을 일단 제외했다.


< 열혈남아 >는 홍콩 느와르가 어떻게 멜로로 바뀔 수 있는 지를 보여주지만 이때만 해도 왕가위의 영원한 촬영 감독인 크리스토퍼 도일이 없었다. 그래서 첫 작품으로 정한 것이 < 중경삼림 >이다.

이 작품은 한국에 상영되어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작품이었다. 스텝 프린팅이라는 기법이 충격적인 것이 아니라 왜 감독이 영화의 모든 곳에 관여해야만 하는 지를 보여주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스텝 프린팅 (Step Printing) 기법은 당시에 이미 많은 뮤직비디오에 쓰이던 기법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익숙했던 왕가위 감독이 이를 영화에 사용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왕가위 감독은 뮤직비디오 감독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누누이 말하지만 필름시절의 카메라는 1초에 24장의 화면을 찍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그걸 1초에 240장을 찍도록 하면 슬로우모션이 되고 8장을 찍게 만들면 패스트모션이 된다. 하지만 스텝 프린팅은 찍을 때 하는 것이 아니라 편집을 할 때 24장 중 짝수번째나 홀수번째를 거둬내고 나머지 12장을 가지고 한 장씩 복사해 24장을 만드는 방식이다. 이렇게 되면 느리게 움직이던 피사체는 마치 점프컷과 보통샷의 중간쯤 움직임을 보이고 빠르게 움직이는 배경은 잔상을 남기며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스텝 프린팅 기법은 도시적 감각을 연출하는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이런 스텝 프린팅은 왕가위 감독의  전매특허처럼 쓰였고, < 중경삼림 > 부터 시작해 이후에 < 타락천사 >, < 동사서독 >, < 해피투게더 > 에서도 쓰인다. 하지만 < 아비정전 > 에는 이 기법이 안 보인다.


< 중경삼림 >은 크게 두 가지 파트로 나뉘는데 이 스텝 프린팅이 지속적으로 사용되는 금성무, 임청하 파트와 스텝 프린팅보다는 조명과 소품의 사용이 뛰어난 양조위, 왕페이 파트이다.

영화는 1994년에 발표된 영화인데, 홍콩 반환시기가 3년이 남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러면서 많은 홍콩인들은 불안에 떨고 있었다. 이는 모든 장르를 멜로로 만들어 버리는 왕가위에게 있어서 탁월한 포인트이기도 했다. 왕가위 멜로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만남, 사랑보다는 헤어짐, 이별이기 때문이다. 홍콩이 귀속되는 불안에 대해 이별을 경험했거나 경험해야 하는 연인들을 중심으로 불안한 도시적 감각을 밑에 풀어놓아 당대의 스타일리스트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 바로 이 < 중경삼림 > 인 것이다.


사실 < 중경삼림 >은 왕가위가 유일하게 짧은 촬영기간을 지닌 영화인데, 이는 왕가위 감독이 현장의 즉흥성을 중시하는 한국의 홍상수 감독 타입이라서 그렇다. 이 영화를 만들던 당시 왕가위 감독은 장국영, 양조위, 장학우, 임청하, 양가휘, 장만옥 등 당시 내놓으라 하는 모든 탑배우들을 모아놓고 < 동사서독 >을 찍고 있었다. 하지만 초반 분장, 의상부터 시작해서 로케이션 이동까지 촬영 준비 시간이 긴 현장에서 왕가위 감독은 아예 대본도 제대로 주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다. 전체 기획 얼개만 있었을 뿐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그의 결정을 모든 탑배우들이 주야장천 기다려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런 그의 특이한 연출 성향은 배우들을 남달리 괴롭힌 것으로도 유명했다. 본인이 현장에서 납득이 되지 않으면 배우와의 타협 없이 수십 번 반복시키는 감독으로 유명했다. 장국영이나 양조위 같은 배우가 아니면 정말 함께 하기가 힘든 감독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 동사서독 >의 촬영이 늘어지면서 결국 배우들은 하나둘씩 계약기간이 되면 다음 스케쥴로 인해 떠나야 했고, 제작비는 다시 계속 늘어나기만 했다. 이때 남은 배우들을 데리고 거의 즉석에서 만든 영화가 이 < 중경삼림 > 이다.


< 중경삼림 > 은 그야말로 왕가위 감독의 숨통을 튀워준 영화이기도 했다. < 아비정전 > 의 흥행적인 폭망 후 왕가위는 상업영화감독이 아니라 예술영화감독으로 낙인찍혔고, 이런 예술감독이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제작비를 지원해 줄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었다. 이런 와중에 < 중경삼림 >이 범아시아적인 흥행을 일으키면서 왕가위 감독은 예술감독을 뛰어넘는 유명세를 얻게 되었고, 다시 한번 < 동사서독 >의 배우들을 불러 모아 촬영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 중경삼림 >의 모든 모티브는 홍콩 반환으로 귀결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금성무는 여기서 이별의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기한이 지난 통조림만 찾아 먹는다. 임청하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홍콩으로 왔지만 어디로 갈지 몰라 방황하기만 한다. 양조위는 이별의 아픔을 참지 못해 주위의 모든 것에 관심을 버린다. 하지만 왕페이만이 오로지 그런 양조위를 사랑하기에 안 보이는 곳에서 자신의 사랑을 하나하나 채워 놓는다. 그래도 양조위는 왕페이가 떠난 후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일련의 캐릭터들만 봐도 생각나는 것은 홍콩 반환뿐이다. 홍콩과의 이별을 준비하거나 이별을 이미 정해버린 사람들,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들과 아예 관심을 안 두는 사람들까지 탁월한 영상미와 더불어 홍콩인들의 마음을 대변한 것이다. 그나마 이 영화의 희망은 왕페이가 스튜어디스로 다시 돌아와 양조위를 만나는 한 장면뿐이다.


이 영화는 애초에 옴니버스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왕가위는 이를 바꿔 나머지 3부를 < 타락천사 >라는 이름으로 나중에 내놓게 된다. 그래서 < 중경삼림 >을 봤으면 < 타락천사 >도 보라는 말이 많이 나왔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 타락천사 >는 꼭 보지 않아도 된다. < 타락천사 >는 왕가위 감독이 잠시 방향을 잃은 작품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과한 이미지의 남용과 이해하기 힘든 캐릭터들, 그리고 부정확한 스토리 라인들이 나로 하여금 피로도를 높인 작품이었다. 이 작품으로 인해 난 왕가위 감독이 이젠 바닥인가 싶었던 기억이 있다.

물론 이후에 내놓은 < 해피 투게더 >가 모든 것을 다 바꿔놓고 왕가위 감독을 진정한 멜로의 거장으로 올려놓지만 말이다.


스텝 프린팅이 많이 쓰인 금성무, 임청하 파트를 좋아하는 관객들도 많았지만, 조명과 소품만으로 멋들어진 장면을 연출해 낸 양조위, 왕페이 파트를 좋아하는 관객들이 더 많았었다.

특히, 왕페이가 양조위 방을 몰래 찾아가 소품 하나하나를 바꿔 놓으며 양조위와의 일방적인 사랑을 키워나가는 모습이나 무빙 에스컬레이터 아래로 몸을 낮추는 장면 등은 크리스토퍼 도일의 탁월한 촬영 감각과 조명으로 인해 감각적으로 와닿는다. 그래서 이 당시에 흘러나왔던 'California Dream' 이라는 OST는 엄청난 열풍을 일으키고, 노래를 불렀던 '마마스 앤 파파스' 그룹이 내한공연을 가질 정도였다.

그렇다고 금성무와 임청하 파트가 이 파트보다 절대 퀄러티가 낮은 것이 아니었다. 바에서 둘이 머리를 기댄 장면은 아직도 많은 뮤직비디오와 영화에서 따라 할 정도이니 말이다.

그만큼 왕가위 감독의 연출력은 누구보다 뛰어났다.

그 조명과 소품, 그리고 촬영과 편집까지 아우르는 디테일은 그 당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결국 감독의 연출력은 현장에서 결정되기에 왕가위 감독의 현장 디테일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명확히 왜 멜로에 집착하는지 그리고 왜 모든 장르를 멜로로 환원하는 지를 자신의 스타일과 함께 첫 작품부터 일관되게 추진할 수 있는 감독이 몇이나 있을까?


난 왕가위 감독 작품 중 < 중경삼림 >은 반드시 추천한다. 왜냐하면 여기부터 왕가위 감독의 스타일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아비정전 > 이라는 출발점에서 < 화양연화 > 와 < 2046 >에서 멜로의 세계관을 확장시켜 세계를 놀라게 했으니, 이 세 작품은 왕가위 감독의 팬이라면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한국 영화계에 그의 이름을 알리고, 아시아적으로 홍콩의 영상예술 경지를 보여준 작품은 바로 < 중경삼림 > 이었다.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스토리로 완성해 나가는 감독을 제대로 보여준 필름인 < 중경삼림 > 은 어떤 식으로 영화를 만들어야 할지, 아니면 관객들이 보고 싶은 것은 감독의 스타일과 맞닿아 있는 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이다.

이 작품을 통해 지나간 홍콩의 밤을 만끽하고자 한다면 충분히 그 값어치를 할 것이다.










이전 15화 조지 로이 힐 (3)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