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2.
"..."
몇 분이나 지났을까? 침을 꿀꺽 삼킨다.
체감으로는 억겁의 세월이 흐른 것만 같다. 하지만, 실은 알고 있다. 아마 기껏해야 1분 정도 지났으리라.
"..."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으악, 답답해. 진짜 더는... 못 견디겠다.
꾹 닫혀 있던 입에서 답답함이 비집고 빠져나온다.
"... 그래요, 그럼 오늘은 어떤 얘기를 해볼까요."
또다. 결국, 또 졌다!
침묵을 못 견디고 먼저 입을 열어버렸다는 사실에 자책한다.
이런 순간이 상담 중에 늘 불편하게 다가온다. 초보 상담자로서,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의 침묵이 길어질 때 마음이 복잡하다. 도대체 침묵은 어떻게 견딜 수 있는 걸까?
침묵은 금이 맞나요?
유독 상담할 때 침묵이 길어지는 순간이 있다. 내담자가 사색에 잠긴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론 상담자의 말을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한 그런 순간. 이런 침묵이 찾아올 때, 더럭 긴장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음속에선 여러 목소리들이 소리 높여 싸운다.
'뭐지, 이제 내가 말할 차례인 건가? 뭐라고 질문하지?'
'내담자가 생각을 정리하는 중일 수도 있잖아. 나도 같이 침묵하자.'
'이렇게 침묵이 길어져도 돼? 지금 너무 어색한데.'
'내담자가 말할 차례야. 계속 내가 질문만 하는 건 안 좋아.'
'그치만... 그치만!'
"그래요, 그럼 그 부분에 대해서 더 얘기해 볼까요?"
결국 내가 질문을 던지게 되었을 때,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린다. 정적을 깬 나의 질문에, 내담자는 무언가 '대답'이 될 만한 걸 생각한다. 대화의 주도권이 또 나에게 넘어간 것이다. '침묵을 견딜 줄 알아야 한다'는 슈퍼바이저의 조언을 들어왔음에도, 지금 내 모습은 역시나 그 조언과는 너무나 멀다.
하지만 계속 침묵을 고수해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50분, 대화로 채워야 하는 시간에 의도치 않은 공백이 생기고 있다. 상담자로서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하게 느껴진다. 마치 아무것도 개입하지 않고 있는 듯한, 무기력한 상담자가 된 것 같은 기분. 질문조차 떠올리지 못한 채, 그저 시간만 흘러가는 느낌. 그렇기에 더욱 내담자의 침묵을 견디는 것이 나에겐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침묵은 금이라던데, 정말 침묵이 상담에서도 도움이 되는 걸까?
침묵의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들
돌이켜보면 일상의 대화 속에서도, 종종 침묵을 경험한다. 대화의 한 텀이 끝나고, 이제 어떤 말을 이어가야 할지 모를 때, 순간적으로 긴장감이 고조되며 재빨리 질문거리를 찾는다. 상대방과 나 사이의 공통적인 관심사라도, 그것도 아니라면 대부분 알만한 드라마나 영화라도!
침묵은 보통 내게 그런 식으로 기능해 왔다. 대화 사이의 공백이자 빈칸. 빈칸은 불편하고, 답이 될 수 없다. 그렇기에 상담에서도 침묵이 생기게 되면, 그 빈칸을 메꿀 질문거리를 찾는 것에 혈안이 되곤 했다. 하지만 상담에서의 '침묵'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다. 일상의 대화에서와는 달리, 상담에서의 침묵은 여러 의미와 기능을 갖는다.
1)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
: 상담에서의 침묵은 단순히 말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내면으로 향하는 문을 여는 시간이 될 수 있다. 즉, 내담자의 침묵은 자기 안에 떠오른 생각과 감정들을 조용히 들여다보는 시간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성찰을 가능케 하는 '정지 버튼'처럼, '나 정말 그랬던가?', '지금 느껴지는 이 감정이, 슬픔인가?'와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수 있다. 상담자는 이러한 성찰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도록, 침묵의 리듬을 조율하며 조용히 곁에 머문다. 내담자가 더 깊게 자신 내면에 닿을 수 있도록.
2) 대화 내용을 소화하는 데 필요한 시간
: 상담자와 대화할 때, 그 내용을 곧바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때론 중요한 내용을 곱씹는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고, 감정이 너무 벅차올라 정리할 틈이 필요하기도 한다. 침묵은 내면에서 충분히 소화해 나갈 수 있도록 주어지는 시간이 될 수 있다. 이럴 때, 천천히 소화시켜 나갈 수 있도록 상담자는 침묵을 지켜줄 필요가 있다.
3) 하나의 의사소통 방식
: 상담 중 내담자가 말없이 고개를 숙이거나, 시선을 피하거나, 눈물을 흘리는 순간이 있다. 이럴 때 나타나는 침묵은 무엇보다 풍부한 정보와 정서가 담겨있기도 한다. 물론, 한편으로 내담자는 상담 과정 중에 불만이 있을 때 이를 표현하기 위해 침묵하기도 한다. 즉, 침묵은 종종 말보다도 더 강력한 언어가 될 수 있다.
침묵을 허용하라
상담 중에 침묵이 흐르면, 여전히 마음속에 불안감이 피어오른다. 이대로 시간이 흘러가도 괜찮은 걸까? 싶은 마음과 동시에, 또다시 입이 달싹거릴 때 스스로에게 되뇐다.
'이건 내담자에게 필요한 시간이야. 그러니 견뎌.'
침묵은 정지된 시간이 아니라, 조용히 움직이는 시간이다. 그 시간 속에서 생각이 떠오르고, 감정이 정리되며, 진심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이는 내 안에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잠시 뒤로하고, 내담자에게 집중했을 때 더 분명히 드러난다. 내담자가 점차 무언가를 깨닫고 있다.
이제 나는 안다.
침묵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내담자가 자신의 삶과 마주하는 소중한 시간일 수 있음을.
(물론, 내가 질문을 이상하게 해서 생긴 침묵은... 반성해야겠다만)
그러니 나는 조용히 곁에 머무르기로 한다.
말이 없어도 함께하며, 침묵이 흘러가도록 허락하며.
공백처럼 느껴지는 그 순간이, 누군가에게는 가장 깊은 만남의 시간이 될 수 있음을 믿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