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역사의 산 증인, 앙부아즈 성 1편

찬란한 역사를 기억하다

by 빠리누나

앙부아즈성의 정식명칭은

샤토 호얄 당부아즈

Chateau Royal d'Amboise 이며,

프랑스왕 루이11세부터 샤를8세,

프랑수아1세의 통치하에

가장 호화스런 시절을 보냈기에,

그 이름에 Royal이 붙는다.


앙부아즈 성에서 바라본 루아르 강의 모습

루아르 강변의 높은곳에 자리잡은 지리적 이점으로

앙부아즈 지역은 신석기 시대부터 점점 영토를 넓혀오며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렀다.

기원전부터 역사의 풍파를 겪어온 앙부아즈 성의 모습은 옛영광스러운 모습이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그가 기억하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통해 아직도 많은 이들이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성중에 하나로 꼽고 있는 곳이다.

16세기 당시의 앙부아즈 성의 전개도, 현재 우리가 볼수 있는 부분은 검정색 부분 뿐이다



성의 영광스러운 기억을 뽐내기라기도 하듯 앙부아즈의 관람 첫입구 양벽에

11~19세기 앙부아즈를 소유했던 성주들의 가문의 문장으로 장식해놓고 있다.

각각의 문장속에 가장 많이 보이는 칼처럼 보이기도 하는 상징은 백합을 형상화 한것으로

루아르 강변을 중심으로 하는 발루아 왕가와 파리를 중심지로 삼은 부르봉왕가의 상징이기도 하다.

실제로 루아르 고성과 파리의 루브르나 베르사유를 가면 백합모양을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다.

고성을 여러번 방문하면서 인상깊었던 것중 하나는

유럽의 귀족들은 소유욕이 강했던건지 자기가 살던곳에 자신의 가문의 문장과

자신의 이니셜과 자신을 상징하는 동물조각으로 온통 도배를 해놨다는 것이다.

프랑스와 1세의 상징인 불을 뿜는 도마뱀 (좌) 발루아 왕가의 문장과 브레타뉴가의 문장으로 꾸며진 벽난로 장식(우) (아래)

고성이나 역사에 관심이 없는 아이들에게 불도마뱀을 몇 마리나 찾을수 있냐고 퀘스트를 주는것이 하나의 꿀팁이 될수있다.


샤를 8세와 왕비인 안느 드 브레타뉴 의 초상화가 있는 첫번째 방

이곳에서 태어나고 이곳에서 눈을 감다.

샤를8세는 루이11세의 유일한 아들로 앙부아즈 성에서 태어났으며,

프랑스 북서부 지역인(당시에는 프랑스 영토가 아니였던) 브레타뉴의 상속녀였던

안느 드 브레타뉴와 결혼을 하면서 프랑스의 영토를 공고히 하며 왕권을 강화한다.

샤를8세는 왕비와의 신혼생활 역시 앙부아즈 성에서 보냈다.

이탈리아 원정에서 영감을 받아 앙부아즈 성을 증축하던 한창시기에 당시 유행하였던 테니스의 전신격인 쥬드폼 경기를 보러가던 중에

문사이의 틀인 상인방에 머리를 부딪혀,

몇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사망하게 된다.

허무하게 사망한 샤를8세로 인해,

안느 드 브레타뉴는 미망인이 되었고,

브레타뉴지역이 다시 프랑스의 영토에서 벗어날 위기에 처해지자 샤를8세의 사촌 루이12세가 왕으로 즉위한뒤 안느 드 브레타뉴를 왕비로 맞이하면서, 브레타뉴 지역을 지켜냈다.

안느 드 브레타뉴는 프랑스 역사상 유일하게 두번 왕비로 칭해진 여인이다.

샤를8세의 다른 초상화를 보면

가리비 모양의 금목걸이가 눈에 띄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그의 아버지인 루이 11세가

창단한 생미셸 기사단을 상징하는

목걸이이며, 이 생미셸 기사단은

노르망디지역의 가장유명한 관광지인

몽생미셸 수도원과 관련이 깊다.

작년에 몽생미셸 수도원이 1000주년이었을 때,

이곳 앙부아즈에서는 생미셸(성미카엘)을

테마로한 그림들과 장식품을 모아 작은

전시를 했고, 그때 샤를8세의 초상화도

같이 전시를 해서 첫번째 방에 안느 드 브레타뉴의

초상화만 놓여져 있기도 했다.


프랑스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다.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샤를8세 대신 왕위에 오른 루이 12세 역시 아들을 얻지 못하였고, 안느 드 브레타뉴 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클로드 드 프랑스가 앙굴렘의 백작과 결혼을 하면서 왕위 계승을 하게 되는데,

여성은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다고 규정한

살리카 법 때문에, 루이12세가 서거한 후 앙굴렘 백작이 왕위를 계승하면서

프랑수아 1세로 즉위하게 된다.

그는 프랑스의 첫번 째, 르네상스 형 군주로

칭송받았고 프랑스 사람들로부터 가장 사랑 받은 왕중 하나이다.

프랑수아 1세의 초상화와 앙부아즈성에서 판매하고 있는 꼬냑

유년시절을 앙부아즈 성에서 보냈지만 프랑수아1세의 본래 출생지는 꼬냑 이며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술이름인 꼬냑 도 해당 지역에서 유래된 것이다.

앙부아즈 성 관광을 마치고 기념품샵을 빠져나갈 때, 그가 늘 쓰고 다닌 베레모를 본떠 뚜껑을 제작한 꼬냑병을 보고 오는 것도 소소한 재미가 될 수 있다.


좌우의 높이가 다른 앙브아즈성의 외관

르네상스를 꿈꾸다

앙부아즈성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샤를8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아

성을 더욱화려하게 증축하기를 원하였고, 그러한 흔적을 왼쪽에서 찾을수 있다.

그후에, 프랑수아 1세가 이탈리아 원정을 성공정으로 마치고 프랑스에 돌아와

프랑스의 르네상스시대를 열면서 더욱 화려한 건축양식들이 발전하게 되었고,

그러한 흔적은 오른쪽의 성곽에서 찾아볼수있다, 실제로 오른쪽의 성이 더 높고

화려하게 장식되어있다.


플로랑탱 교회 자리에 세워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흉상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 원정에서 만난 다빈치의 천재적인 예술성에 반했고,

다빈치를 프랑스에 머물게 하였다. 앙부아즈성에서 멀지않은곳에 있는 클로뤼세성을

다빈치에게 하사하였고, 다빈치는 생을 마감하기 까지 3년동안 그곳에 머물며

프랑수와 1세를 위한 연구를 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다빈치가 생에 말년에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그가 프랑스로 넘어올때 이탈리아에서 가져온 <모나리자>,<세례자요한>등 과 같은 작품들이

다빈치 사후에 프랑수아1세에 의해 구입되었고, 프랑스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되어서

오늘날의 많은 이들이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를 관람 할 수 있게 된것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당시에는 앙부아즈성과 클로뤼세성을 연결하는 지하통로도 있어

다빈치가 언제든 프랑수아 1세와 만날수있게 하였다고 한다.

19세기 화가 기욤 메나죠가 그린 <다빈치의 최후>

프랑수아 1세는 예술가이자 위대한 스승으로 다빈치를 존경하고 아꼈다.

다빈치가 세상을 떠날때 프랑수아 1세의 팔에 안겨 생을 마감했다는 기록에 상상력을 더해

그려진 위의 그림은 모두가 원하는 엔딩의 장면이었고 많은 모작들을 탄생시키면서

19세기에 기욤메나죠를 스타 화가로 부상시켰다.

다빈치는 자신이 죽으면, 앙부아즈성에있는 플로랑탱 교회에 묻어달라는 말을 남겼는데,

많은 전쟁과 혁명시기를 거치면서 플로랑탱교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20세기에 앙부아즈성을 발굴하던 당시, 플로랑탱 교회가 있던 위치에서 다빈치로 추정되는 유해가 발견되었고, 생튀베르교회 에 다빈치의 유해를 안치했다.

앙부아즈성의 생튀베르 교회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무덤

전문가들은 다빈치의 말년에 프랑스에서 이렇다할 작품을 남기지 않다고 하지만,

그가 지나온 흔적과 그의 연구노트 그가 가지고온 작품들은 프랑스 문화를 풍부하게 만들기에 충분하였고, 아직까지도 프랑수아1세와 다빈치의 이야기를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이유이다.


프랑수아 1세와 다빈치의 이야기를 앙부아즈 성을 배경으로 촬영한 실사애니메이션 <L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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