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로 단 한 번도 그녀의 고민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다. 단지 나는 그녀의 옆을 지켰다. 그녀가 진심으로 걱정이 됐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아프지 않기를 바랐다.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중간고사 발표를 밤을 새 가며 준비했다. 너와 처음으로 함께 하는 조별과제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했던 어떤 팀플보다 완벽하고 싶었다. 발표를 무사히 마쳤다는 기쁨도 잠시 3일 뒤에 찾아 올 기말고사를 준비해야만 했다. 때는 중간고사 발표를 마친 날이었다.
"나 오늘 본가 다녀올 것 같아."
어머님께서 올라오셔서 00이와 함께 지내며 00이를 곁에서 간호하고 계셨다.
"응응. 사실 나도 오늘 본가 다녀오면 어떻겠냐고 물어보려고 했어. 이틀 뒤 시험이기는 하지만 이틀 동안만큼이라도 집에서 편히 쉬고 오면 좋을 것 같아서."
"고마워."
"아냐. 집에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푹 쉬고 왔으면 좋겠어. 물론 공부도 틈틈이 하고!"
"응 알겠어. 고마워!"
"집은 같이 가자. 데려다줄게."
"아 맞다. 저번처럼 본가에 있을 때만큼은 굳이 연락 안 해도 되니까. 정말 아무 생각도 하지 말구 편하게 푹 쉬고 와! 건강이 최우선이야. 시험기간인데 아프지 말구."
이틀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연락이 없던 너였지만 서운한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정말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진심으로 네가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공부량이 몇 배나 더 많은 1학기 전공 시험기간에도 아프지 않았던 너였기에 빨리 낫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었다.
연락이 없던 이틀 동안 나는 어쩌면 이별을 준비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고 해도 자꾸만 부정적인 생각이 나를 찾아왔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시험기간을 준비했는지 모르겠다. 나에겐 너무나도 길었던 이틀이었지만 이 기간이 계속되기를 바랐다. 끝이 없을 것만 같았던 기나긴 동굴의 출구가 드디어 보였지만 나는 이별의 입구처럼 보였다. 출구를 외면하고 싶었다.
사실, 알고 있었다. 우리의 이별을 말이다. 우리가 헤어지는 날을 말이다. 우리가 언제 헤어지는지 말이다. 우리가 연인으로서 지낼 날이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마지막 남은 그 이틀마저도 너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시험을 마치고 나오면 우리는 이별을 할 거란 사실을. 그때 말고는 네가 나에게 얘기해 줄 시간이 없을 거란 것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음에도. 알고 있었지만 현실을 부정했다. 다시 돌아올 거라고. 별 것도 아닌 고민을 나에게 얘기해 줄 거라고. 이젠 다 해결됐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서웠다.
너무나도 무서웠다.
네가 말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시험 끝나고 만나고 싶지 않았다. 너를 보고 싶지 않았다. 월요일이. 기말고사가 찾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이렇게 매일 힘들게 혼자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도 괜찮으니까. 제발 그 말만은 하지 않기를 바랐다.
야속하게도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시험 당일이 되었다. 너는 나보다 먼저 시험을 마치고 교실을 나섰다. 기말고사를 보는 와중에도 내 모든 신경은 너한테 가 있었다.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가서 날 기다리지 말고 차라리 혼자 집에 가주기를 바랐다. 시험을 어떻게 봤는지도 모르겠다. 대충 답을 적고 시험지를 제출했다. 가방을 챙기고 나 역시 교실을 나섰다.
그러나 나의 바람과는 달리 너는 1층에서 내가 시험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를 많이 좋아하긴 했나 보다. 아니. 좋아하긴 하나보다. 이별할 걸 알면서도 너의 얼굴을 보니 반가운 감정이 들다니 말이다. 그 반가움도 잠시 불안한 마음이 곧 온몸을 뒤덮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너에게 인사를 건넸다.
"00이, 먼저 안 가고 나 기다리고 있었네."
"응."
"저기 다른 사람들도 아직 안 갔는데?"
3주 동안 조별과제를 함께 준비한 간호학과 사람들 모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윤, 시험 잘 봄?"
"아, 그냥 그럭저럭 봤습니다."
"이제 뭐 하냐. 종강도 했는데 술 고?"
"아.. 오늘은 조금 애매해서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오키. 어쩔 수 없지."
그냥 술 마시러 갈 걸 그랬다. 너와 둘이 걷는 자리를 피할 걸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너를 믿었나 보다. 우리는 침묵의 동행을 하는 듯 보였지만 네가 먼저 긴 침묵을 깼다.
"오빠."
"응?"
"진지하게 할 말이 있어."
"진지하게?"
"응."
"아 그래? 뭘까."
"전에 말했던 고민이야."
"고민이 해결된 거야?"
"응.."
"안 좋은 얘기야?"
"응.."
"그래..?"
"00이가 말해줄 그날을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는데...
나는 왜 별로 듣고 싶지가 않지."
"..."
"ㅁㅁ이는 언제 온대?"
"오늘 온대.. 같이 놀 것 같아."
"아 그래? 그럼 나는? 나도 같이 놀까!?"
"그거에 관해서 할 말이야."
"..."
영화에서 사람들은 해피엔딩을 기대하기 마련이지만
슬프게도 이건 영화가 아니다.
우리의 결말에 반전은 없었고 기적 또한 없었다.
어쩌면 너를 만나 함께한 모든 시간이 기적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남아있던 기적이 없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모든 것이 끝이 났다.
헤어진 당시의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때로는 열지 않고 묻어둘 판도라의 상자가 필요한 법이다. 또한, 나는 너의 허락 없이 우리의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슬픈 사랑 이야기지만 좋았던 기억들만 적고 싶다. 행복했던 추억들만 가져가고 싶다. 그것이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다. 전혀 너를 미워하지 않는다. 전혀 너를 탓하지 않는다. 너는 내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정말 좋은 사람이다. 웃는 게 예쁜 사람이고, 착한 사람이다. 배려심이 깊어 항상 자신보다 남을 챙기기 바쁜 사람이고, 감사한 사람이기에 항상 나에겐 과분한 사람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마찬가지다. 너는 나한테 그런 존재다. 너를 미워해서 쓰는 글이 아니다. 누구보다 순수하고 누구보다 뜨겁게 너를 사랑했기 때문에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슬픈 이야기 대신 뜨거웠던 사랑의 이야기를 적었으면 충분하다. 나는 여전히 너를 좋아하고 여전히 너는 내 사람이다. 김수윤의 '사람' 안에 여전히 네가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아니지만 너는 내 친구이다.
이별과 동시에 다시 시작됐다.
내겐 너무나도 익숙한 이 감정
저번보다 더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다시 이루어질 수조차 없는
친해지는 것조차 기적이라면 기적인
기적이 존재한다면 여기에 작용해야 할
짝사랑.
4화 제목인 "봄이 와도 설레지 않겠다고 다짐했잖아."가 기억나시나요.
네. 그렇습니다.
실제로 노래 '봄이 와도'의 가사에는
봄이 와도 설레지 않겠다는 가사 뒤에
여름이 와도 흔들리지 않겠다는 가사가 있습니다.
한여름 그 무엇보다 뜨거울 것 같았던 우리의 여름은
녹음이 짙어지는 초록에 마음을 맡기고 싶었던 우리의 여름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아무것도 남지 않은 채로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저는 현재 그 가사에 맞게
흔들리지 않을 여름을 보내려고 하지만
매일이 흔들리는 여름을 보내고 있습니다.
밤마다 찾아오는 감정의 파도를
어떻게 막을 도리는 없습니다.
또 다음 가사인 여름이 지나 가을이 오면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고 견뎌왔음에 감사하다고 합니다.
과연, 가을이 오면 저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그때는 지금보단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을까요.
어쩌면 '봄이 와도' 가사대로 제 인생이 흘러갔으면 좋겠습니다.
가을엔 제가 정말 괜찮아졌으면 좋겠습니다.
페르소나의 웃음이 아니라
진정 마음속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웃음을 지어보고 싶습니다.
웃고 싶습니다. 행복하고 싶습니다.
당신도 행복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행복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끝내 겨울이 찾아온다면
제 곁에 있어준, 저를 지켜준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
.
.
"봄이 와도 설레지 않을 것이고
여름이 와도 나는 흔들리지 않을 거야.
가을이 오면 무너지지 않고 견뎌왔음에 감사하며
겨울엔 나를 지켜줬던 그대만을 내 맘에 새길 거야."
(로이킴의 '봄이 와도'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