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그날은 예비군 이틀 전에 갑작스럽게 약속을 잡아 데이트를 한 것이었다. 정식 데이트는 그 주 일요일이었다. 우리는 일요일에 데이트를 하러 만났지만 너는 한 번도 웃음을 보이지 않았다. 밥을 같이 먹는데도, 운전을 하는 차 안에서도, 같이 간 도서관과 카페에서마저도. 정말 단 한 번도. 그나마 친구의 카페를 놀러 갔기 때문에 너는 사회적 웃음을 내보였다. 네가 친구에게 보여준 사회적 미소마저도 나는 반가웠다. 예의상의 웃음마저 그리웠다.
너는 수업이 끝나고 내가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나 또한 수업이 끝나고 너를 데려다준 뒤 네가 무엇을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연락은 왜 보지 않을까. 무엇을 하고 있다며 연락을 먼저 걸어주던 너였는데 정말 뭐 하고 있단 말 한마디조차 못 할 만큼 바쁜 삶을 살고 있는 걸까. 몇 평도 안 되는 자취방 안에서 그렇게 치열하게 공부를 하며 살고 있는 걸까. 무엇을 하는지 얘기라도 해주면. 연락이라도 봐주면. 가끔 궁금해서 전화를 걸기도 했었지만 받지 않았다. 간혹 헤어지자마자 전화를 걸어야 받는 너였지만 받더라도 말투는 무뚝뚝했다. 그러다 보니 너를 데려다주고 너의 집 앞 놀이터에 혼자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것이 자연스레 내 하루 일과에 추가가 됐다. 혹여 네가 다시 나오진 않을까. 산책을 하러 나오진 않을까. 분리수거를 하러 나오진 않을까. 괜한 기대에 혼자 매일 30분씩 벤치에 앉아 기다리던 나였지만 너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밤에도 여러 번 너의 집 앞을 찾아갔었다. 물론 연락을 하지는 않았다. 너의 집 앞을 맴도는 것만이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정말 우린 지금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걸까. 수백 번 수천 번을 되뇌고 되뇌었다. 수천 번이라는 말이 과장 같다면 당장 이 브런치북을 나가주길 바란다. 나에겐 수만 번이라는 횟수도 아까울 뿐이다.
외로웠다. '정말', '너무'라는 표현을 잘 안 쓰려고 노력하지만 정말이지 너무나 외로웠다. 여자친구가 있는데도 느끼는 외로움은 이 경험을 겪어 본 당사자만이 알 것이다. 이때부터였다 밤이 무서워진 것이. 나는 어둠에 지배당했다.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깔려 모든 사고의 영역을 지배당하는 시간이 되면 나는 미쳐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지만 아무것이라도 하려고 했다. 어느 누구 한 사람한테도 말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서 꺼내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길 가는 아무 사람이나 붙잡고 저 좀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그리고 너에게 듣고 싶었다. 우린 아무 문제없다고. 지나가는 소나기라고. 믿고 또 믿었다. 빌고 또 빌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여자친구가 다시 돌아올 거라고 믿는 일밖에 없었다. 그렇게 믿고 또 믿었다. 나의 새벽은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처럼 길고 길었지만 다시 빛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면 아무렇지 않은 척 웃음을 지으며 너를 데리러 갔다.
새벽마다 뒤척이며 잠을 자지 못했다. 네가 꿈에 나와 잠에서 깰 때면 여전히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내 숨통을 조여왔다. 하지만 놀랍게도 1분 1초가 지옥 같던 어둠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자신감이 생겼다. 이 어둠을 이겨냈다는 자신감이었을까. 그리고 네가 보고 싶었다. 자고 일어나면 너를 보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오늘 만나면 또 내가 웃겨줘야지. 장난 쳐줘야지. 빨리 보고 싶다. 아주 힘든 새벽을 보내더라도 너를 데리러 갈 때면 항상 자신감과 믿음이 만들어 낸 희망을 꼭 챙겨갔다. 그냥 보고 싶었다. 네가 너무 좋았다. 너를 포기하기엔 내가 너를 너무 좋아하나 보다. 난 너를 사랑한다.
물론 그 희망은 너를 만나는 순간 처참히 부서진다. 피곤함은 해소되지 않은 채로 쌓여만 갔고, 스트레스성 복통까지 생긴 너였다. 00이는 중고등학교 때부터 시험기간만 되면 스트레스 때문에 스트레스성 복통이 생긴다. 근데 그 스트레스가 나에 대한 스트레스가 아니길 빌었다. 여자친구가 아픈 걸 옆에서 지켜만 보기가 힘든 와중에도 학업으로 인한 스트레스이기를 바랐던 나는 이기적인 남자친구인 걸까. 더위를 잘 견디지 못하는 너는 자주 표정을 찌푸렸는데, 정말 더위 때문인지 아니면 나 때문인 건지 괜히 눈치가 보였다. 가끔은 내 딴에 투정도 내보았다. 피곤한 척과 아픈 척도 해보고, 집 가는 동안 말 한마디조차도 안 걸어 보았다. 근데 정말 내가 말을 걸지 않으면 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침묵의 동행을 매일 함께했다.
"아 그래, 00이는 더운 걸 잘 못 참는데 나는 괜찮으니까. 아 그래, 00이는 몸이 안 좋은데 나는 건강하니까. 아 그래, 00이는 과목 두 개를 듣는데 나는 하나밖에 듣지 않으니까. 그래서 힘든 게 당연한 건데 이걸 못 기다려주는 내가 이상한 거잖아. 수윤아 네가 남자친구라면. 내가 남자친구라면 믿고 기다려줘야 되는 게 맞는 거잖아. 지금 우리 사이.. 아무 문제없는데 내가 지금 이상한 거잖아. 내가 지금 잘못하고 있는 거잖아."
결국 자기혐오가 나를 찾아왔다. 이때쯤이면 찾아와야 할 친구가 왜 안 오나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자기혐오에 빠지기 시작했다. 나의 잘못으로 돌리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것 같아서 나 스스로를 탓하기로 했다. 내가 만들어 낸 나의 생각이 나를 옥죄어 왔다.
"00아, 나 할 말 있어..."
너는 대답하지 않았다.
"혹시 요즘 무슨 고민이나 걱정이 있어..?"
"아니.. 없어."
"저번 주 금요일부터 나 만날 동안 한 번도 웃지 않았던 거 알아?"
"내가 그랬나..?"
"응. 그랬어. 혹시 지금 무슨 일이 있는 거야? 힘든 고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주면 안 될까?"
"...."
"우리 하루에 만나는 시간이 수업 시간을 제외하면 같이 등하교하는 시간 20분도 채 안되는데. 그 20분 동안 너는 한 번도 웃질 않아.. 오히려 수업 시간 조별토론 하면서 사람들이랑 있을 때 더 많이 웃는 것 같고, 나랑 있을 땐 00이네 카페 놀러 갔을 때 보여준 사회적 웃음이 다였어. 요즘 내 앞에서는 전혀 웃지 않는 너인데 정말 피곤하고 아파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다른 무슨 일이 있는 건지 걱정돼. 솔직하게 얘기해 줬으면 좋겠어. 내가 요즘 너무 힘들어서 그래. 옆에 있는 나를 위해서라도 얘기해 줄 수 있어?"
"사실, 고민이 있어.."
"고민..? 지금은 뭔지 얘기해 줄 수는 없는 거야?"
"응.. 아직 고민 중이라서.. 나중에 고민이 해결되면 말해줄게."
"내가 같이 해결해 줄 수는 없는 거야? 해결을 못하더라도 같이 고민해 주고 들어줄 수는 없는 거야?"
"응.."
"그래.. 그러면 알겠어."
"응.."
"그래도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 조금은 안심된다. 나중에 고민이 해결되면 그때 얘기해 줘. 천천히 기다릴게. 계절학기 끝나고 나중에 말해줘도 괜찮아."
"응 고마워."
"응. 들어가 봐. 푹 쉬어."
네가 말한 고민에 내가 없기를 바랐다. 무슨 고민인지 전혀 알 길이 없는 나로선 네가 걱정만 됐다. 빨리 해결되기를 빨리 괜찮아지기를 하는 마음으로 다음 날 편의점에서 츄파츕스 2개를 사서 줬다. 하지만 치과에 가야 한다는 핑계로 받지 않는 널 보며 고민의 주제가 나임을 확신했다. 확신과 동시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울컥했다. 지금까지 참아오던 모든 감정이 터져버렸다. 결국 너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편의점에 들어가면 흔하게 살 수 있는 츄파츕스 2개. 고작 600원이면 살 수 있는 선물마저 너는 받지 않았다. 어쩌면 난 츄파츕스를 건네준 것이 아니다. 빨리 괜찮아졌으면 하는 나의 마음을 전달해 준 것이다. 츄파츕스든 뭐든 무엇을 전해주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고작 600원어치 사탕 2개마저 받지 않겠다는 너의 모습을 보고. 나의 마음을 거절하는 모습을 보고 이별을 직감했다.
"00아, 이거 편의점 가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사탕 두 개야.. 너 배 아프다길래 사탕 정도는 괜찮겠거니 하고 죽 먹고 먹으라고 산 고작 600원어치 사탕 두 개라고... 빨리 고민이 해결되고 아픈 것도 괜찮아졌으면 하는 마음에 준 건데 네가 이것마저 안 받아버리면.. 고작 이것마저 거절해 버리면 나는 어떡하라고..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라고..."
너는 사탕 두 개를 다시 나에게 건넸다. 나는 받지 않았다. 주먹을 꽉 쥔 채로 받지 않았기 때문에 사탕이 땅에 떨어졌다. 너는 떨어진 사탕을 다시 주웠지만 나는 받지 않았다.
"지금 우리 사이 아무 일도 없는데 내가 이상한 거지 00아. 응..? 내가 널 믿고 기다려줘야 하는데 내가 지금 그러지 못하고 있는 거지?"
"이것 하나만 물어볼게. 고민이 나와 관련된 거야?"
"알겠어.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앞으로 고민에 대해서 먼저 얘기해 줄 때까지 더는 물어보지 않을게. 무슨 고민인지는 모르지만 빨리 해결됐으면 좋겠다. 옆에서 묵묵히 기다릴게."
"수윤아!"
눈물의 대화를 마치고 너희 집 앞에 멍하니 서 있으면서 눈물이 나오려던 찰나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뒤에서 불러주길 바랐지만 옆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고 네가 아님을 알았다.
"너 여기서 뭐 해."
"아.. 나 그냥 00이 데려다주고 이제 집 가려고.."
"무슨 일 있어? 왜 계속 멍하니 서 있어."
"아.. 그냥 어딜 가야 할지 고민 중이었어."
"우리 밥 먹을 것 같은데 너도 같이 먹을래? 저기 김치찌개 맛있대."
"아냐 아냐. 나는 약속이 있어서. 괜찮아. 고마워 다음에 먹자."
"그래~"
우연히 마주친 친구에게 눈물을 들킬 뻔했다. 눈물은 들켜도 되지만 우리의 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걸 들키면 안 됐다. 들키면 안 된다기보다는 들키고 싶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알리고 싶지 않았다. 말을 꺼내는 순간 우리의 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걸 내가 인정하는 셈이 돼버리는 거니까. 물론 독자들도 눈치를 챘겠지만 약속 따윈 없었다. 어딜 가야 할지 고민 중이라면서 약속이 있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않는가.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아서 급히 자리를 피했다.
갈 길을 잃어버린 나는 정처 없이 떠돌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다시 어둠이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